흈~~ 오랫만에 프로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1300년대 당대 최고의 외교술의 달인으로 이름난 독일의 황제 카를 4세의 대한 프로필을 적겠습니다! 이 친구때문에.. 누구더라..상당히 곤란해 했던데...프랑스 국왕인걸로 기억하는데...후훗~~
카를 4세 Karl Ⅳ (영)Charles Ⅳ. 본명은 Wenzel(Wenceslas/Václav). 별칭은 Karl von Luxemburg(Charles of Luxembourg/Karel Lucembursky).
1316. 5. 14 프라하~1378. 11. 29 프라하. 독일 왕 및 보헤미아 왕(1346~78 재위)이며, 신성 로마 황제(1355~78 재위). 당대의 가장 교양 있고 외교술에 뛰어난 군주였다.
그는 무력사용보다는 외교로 원하는 바를 확보했으며 영지나 관직 매입, 결혼, 상속으로 세력을 더욱더 넓혔다. 그의 재위 때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결국은 수도)가 되었다. 사실상 그의 치세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국의 제위는 보헤미아 왕에게 귀속하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었다.
[초기생애]
카를은 보헤미아 왕인 룩셈부르크의 얀과 보헤미아의 마지막 토착 군주의 누이 엘리자베트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었다. 1323년에 그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누이 블랑슈와 결혼했으며 파리에서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6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1330년 아버지에 의해 룩셈부르크로 불려갔고 1331년에는 아버지가 일시적으로 북부 이탈리아에 획득한 영토의 행정을 도맡았으며 2년 뒤 아버지에게서 모라비아의 변경백과 보헤미아의 총사령관에 임명받았다.
자서전에서 카를은 저당잡힌 왕실의 성, 도시, 저택을 도로 찾고 군대를 양성하며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새 세력을 키워놓은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애를 먹었던 점을 회상했다.
그러나 행정치리능력이 뛰어나 아버지의 의심을 사 1335년에 해임당했다. 아버지와 화해한 뒤에는 보헤미아 국외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그의 정치적·외교적인 능력은 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1341년 눈이 멀게 된 얀은 카를을 후계자로 삼아 성직자, 귀족, 젠트리, 왕실 도시 대표자들, 브레슬라우의 사절들의 회의에 참석시켰고, 1343년에는 국가의 행정을 맡겼다.
1년 뒤 카를의 노력으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프라하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킴으로써 보헤미아에 종교적 자율권을 주었다. 동시에 카를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장크트비투스 성당의 머릿돌이 보헤미아의 수도에 있는 흐라차니 구릉에 놓여졌다.
한편 교황에 의해 파문당한(1324) 독일 왕 루트비히 4세 대신 카를을 독일 왕으로 선출하려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를은 교황이 요구하는 모든 선서를 다 하고 1346년 7명의 선제후 중 5명의 표를 얻은 뒤에야 왕위를 차지했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은 카를을 '성직자의 왕'(rex clericorum)으로 불렀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카를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자신에게 왕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보헤미아 왕]
처음에는 독일 왕이 2명 있다는 것이 별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여기서 벌어진 크레시 전투[1346]에서 그의 아버지 얀이 죽음)에 참가하고 난 뒤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루트비히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듬해 루트비히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은 대립 왕을 선출했으나 카를은 그들을 평화적으로 진정시켰다. 남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특권을 주어 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북독일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얼마 안 가 그는 독일의 유일한 왕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지인 보헤미아 영토였다. 이 영토는 그에게 가장 큰 세력 기반이었다.
1347년 카를은 프라하의 신임 대주교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을 받았다. 몇 개월 안에 그는 새로운 대관식 법률과 국내에서 왕의 지위를 규정하는 헌법을 공표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는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세습 군주국이 되었으며 카를의 후손들은 왕위계승의 확실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남자 계승 혈통이 끊어질 경우에는 여자들에게 계승권이 넘어가는 규정도 있었다.
카를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및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조와 맺은 왕위계승조약들(1364)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형성 기반이 되었다. 1348년 카를은 파리대학이나 볼로냐대학과 맞먹는 권리 및 자유를 가지는 대학을 중부 유럽에서는 최초로 설립했다.
그와 때를 같이해 프라하 근처에는 카를슈테인 성의 머릿돌이 놓여졌다. 이 성에는 신성 로마 황제관을 장식하는 보석류와 보헤미아 왕실의 휘장을 보관해두었다. 1354년 카를은 룩셈부르크 왕가의 권위를 세우고 아버지로부터 보헤미아 영토의 일부로 물려받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갔다. 1355년초 그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철왕관을 받아 썼으며 그해 부활절에는 로마에서 황제관을 받았다.
당시 피렌체의 역사가는 카를이 보통 몸집에 검은 머리와 넓은 얼굴, 선천적인 새우등을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황제관을 얻음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여겼는지 이탈리아가 계속 내분에 휘말려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프라하로 돌아왔다.
당시 페트라르카는 카를에게 심한 환멸을 느꼈다. 프라하로 돌아온 카를은 제국 법령의 일종인 금인칙서를 공표했다. 이는 특권을 지닌 7선제후('진정한 군주'라는 뜻의 domini terrae로 불리게 됨)가 독일 왕을 선출하도록 한다는 점을 규정했고 무엇보다도 보헤미아 왕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카를의 마지막 소원은 맏아들 벤첼에게 왕위를 안전하게 물려주는 것이었고 길고 어려운 협상 끝에 벤첼은 독일 왕으로 뽑혔다. 카를은 1378년에 죽어 장크트비투스 성당에 묻혔다.
카를 4세는 에술과 과학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특히 프라하의 예술을 후원했다. 또한 교회 건립과 자선단체 설립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초기 인문주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특히 그의 정부에 영향을 끼쳤고 독일의 문어(文語)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H. Preidel 글
참고문헌
카를사세
독일사 : A. 모로아, 전영애 역, 홍성사, 1990
Karoli IV. vita ab eo ipso conscripta : K. Pfisterer·W. Puess (eds.), 1950
The Emperor Charles IV : Bede Jarrett, 1935
Learning at the Court of Charles IV, 〈Speculum, 25:1-20〉 : Samul H. Thomson,
1950
첫댓글 샤를마뉴의 계승왕국(프랑스, 신성로마제국)에서 여자제위계승권이 명기되는 경우도 있었군요. 저로서는 꽤 신선한 발견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보헤미아분지는 거의 독일권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