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고개
- 강 문 석 -
오래 전 해운대에서 송정을 가기 위해선 당시 하나밖에 없던 달맞이고개의 비탈진 언덕길을 넘어야했다. 이 언덕길이 명소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해운대에 신시가지가 생기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인프라를 잘 갖춘 하나의 도시가 탄생한데다 ‘달맞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자연경관의 수려함도 한몫 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해수욕장을 비롯한 동백섬 누리마루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떠올라 달맞이고개까지도 덩달아 상승세를 탔던 것이리라. 하지만 초창기에는 이 일대도 갈빗집과 찻집 몇 군데가 고작이었고 지금처럼 흥행돌풍을 일으키진 못했다.
예로부터 해운대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을 와우산이라 불렀다. 고개가 시작되는 곳이 흡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일찍이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은 그 아름다움이 대한팔경의 하나로 꼽혔고 그러한 연유로 일출과 월출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1997년에 해월정이 들어섰다. 정자는 '공사 중'을 알리는 안내판이 오래 붙어 있어 답답했는데 이제 석재로 된 계단과 마룻바닥으로 이용객을 맞이한다. 동양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달맞이 언덕의 타운에도 화랑들이 밀집하고 이국풍의 카페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식당까지 즐비하다.
‘여명의 눈동자’란 추리소설로 대박을 터뜨린 소설가가 운영하는 문학관도 타운의 복판쯤에 있다. 그 문학관의 관장이기도 한 작가는 얼마 전 ‘달맞이고개의 안개’란 연작소설로 본인이 몸담고 있는 일대를 알리는데 성공했다. 일흔 중반의 그는 사무엘 울만의 말대로 '사람은 꿈을 잃을 때 비로소 늙기 시작한다'는 게 맞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지금도 야망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떠나오던 20여 년 전, 나는 B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소설 창작을 공부했다. 그 당시 스무 명이 넘던 소설가 지망생들의 수료식을 이곳 추리문학관에서 가졌다.
수료생을 대표하여 행사를 준비했던 나는 문학관장을 비롯한 부산의 소설가 칠팔 명을 초청하여 시간을 가지면서 그들의 인간적인 면까지도 엿볼 수 있었다. 노래방까지 동행하면서 분위기에 들떠서 값비싼 양주를 마시기도 했지만 생활이 고단했던 작가 몇몇은 시종일관 얼굴이 밝질 못했다. 그날 수료한 삼사십 대 수강생들 중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 쓰기에 뛰어든 이들도 몇이나 있었고 이들은 오직 문단에 오르는 것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난 유명 작가들의 초라한 형편에 충격을 받았지만 소설가를 꿈꾸며 정진하는 이들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고개 오른쪽 아래 동해남부선 철길에서 만나는 바다도 꽤나 절경이다. 지난해 초에 이 철길은 폐선이 되었고 당시 난 인터넷매체인 '실버넷뉴스'의 사진부 기자로서 현장을 취재했다. 철길을 걸으며 조망하는 쪽빛 바다의 풍광과 바다를 향해 경사진 야산에 빼곡하게 들어선 숲이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일반인의 발길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철로를 걸으며 감상하는 비경은 감탄 그 자체였다.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해운대의 미포에서 송정역까지 걸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폐선 철길을 걸으며 만나는 태평양 바다의 비경 외에도 밟을 때마다 재잘대는 자갈들의 소리도 좋았다. 그 때문에 난 가까운 친지들과 몇 차례나 더 이곳을 찾았다. 오늘은 경북 안동에서 초대한 여든 중반을 넘긴 성당의 원로를 모셨다. 일행은 그분의 딸인 예순에 가까운 현직 공무원과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다. 아직은 철길에서 달맞이고개로 바로 오르는 길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개구멍처럼 난 샛길로 올라야 한다. 가풀막 샛길은 초대 손님에게 극기 훈련을 시키는 꼴이 되었다. 사실은 조금 전 동백섬을 돌고 나올 때 난 빤히 바라다 보이는 달맞이고개와 동해남부선을 잊고 있었다.
이렇게 깜박이는 기억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차의 핸들을 이기대로 꺾지 않은 게 다행이다. 유월을 열흘이나 지났으니 숲도 이제 생명력이 넘치기 시작한다. 날씨는 흐리던 아침과는 달리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바다는 옅은 해무를 완전히 걷어내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오늘의 초대 손님은 2년째 병석에 누워있는 할멈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고 그는 성당의 레지오를 이끄는 단장을 맡고 있다. 86세의 레지오 단장은 전국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6.25동란에 참전했다가 전상을 입고 이곳 망미동의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뒤늦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문텐 로드'라는 이름을 붙인 산책로를 숨 가쁘게 걷다가 손님에게 물었다. '힘드시지요?' 씩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 해방 직후 잠시 철도에 근무했던 경력도 철길을 걷다가 접속부분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드러났을 정도로 조용했다. 카메라 앞에서 겸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단전 위에다 얹는 천편일률적인 포즈만 취하기에 약간 고쳐드렸더니 그마저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진을 성당에 가지고 가서 교우들에게 자랑하시라며 농을 걸었지만 희미한 미소뿐이고 대답이 없었다.
이제 ‘메르스’는 놀랍게도 해운대 백사장을 찾던 그 많은 내외국인 해수욕객들과 관광객 그리고 대로를 달리는 차량에게까지 비상을 발령한 모양이다. 복원공사를 마친 드넓은 백사장은 텅 비었고 달맞이고개 언덕길은 일반 차량들과 영업용 택시까지 합쳐도 교통량이 크게 줄어들어 한산한 편이다. 지금 우리는 메르스에 전전긍긍하느라 잘 모르고 있지만 달맞이 동산의 소나무들은 재선충이 깊어진지 오래되어 비상발령이라도 내려야 할 것 같다. 숲을 담당하는 관청에서 뒷짐을 지고 있진 않겠지만 방재를 한 흔적이 보이질 않으니 병든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만약 급속히 확산된다면 그동안 태풍과 해일 등 온갖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빽빽하게 건강한 숲을 이룬 이삼십 년생 송림은 전멸할 수도 있으리라. 지난 봄 벚꽃으로 화사하게 물든 달맞이고개를 함께 오르던 친구에게 부산의 명소에도 든 이곳 벚꽃을 자랑했더니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식재한지 30년이나 된 이곳 벚나무들을 전부 베어내야만 해운대 바다 쪽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초대하여 만난 친구인지라 목구멍까지 올라온 반박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이 친구가 관할 구청장 같은 걸 맡기에는 턱없이 함량미달인 위인임을 알고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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