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개구리가 폴짝 뛰어 오르고, 얼었던 땅속과 지상에서 조금씩 꿈틀대던 모든 생명체들이 각기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불었다.
어디론가 떠나고픈 계절에, 마침 남쪽에서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으니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 떠나고 보는 거야.
꽃잔치가 시작됐을 남쪽으로.
떡과 술축제가 열렸다는 경주로.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의 떡이며, 한국인의 생활 속에 희로애락과 함께 이어져온 전국의 떡과 술을 모아 나눔의 잔치를 한다니 화전놀이로까지 행해지던 이 계절과 걸맞아 가고 싶을 수밖에…….
마침, 영주문화연구회 팀에서 내게 함께 할 행운을 주었으니, 봄바람은 실로 허황하게 불고만 것이 아닌 셈이었다.
도착하니 좀 이른 편이라 사람에 치이지 않고 각종 술과 떡을 빚는 기구들이며 관혼상제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실감나게 볼 수 있었다.
계절에 따라, 지역에 따라, 명절이며 잔치 제사에 따라 분류되어 정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만들어 먹었던 떡이 피자며 햄버거며 빵에 밀리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경기도의 수수부꾸미 개성경단, 충청도의 감자송편 햇보리개떡, 강원도의 메밀전병 차조인절미, 전라도의 감인절미 송피떡, 경상도의 밀비지 단자류 만개잎, 제주도의 차좁쌀떡 등.
옛어른들께선 어쩜 그리도 자연에서 나는 곡식과 꽃, 풀, 열매들을 이용해서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그 지역에 맞게 각기 다른 모양과 맛을 내는지, 그 손맵씨야말로 보통 재주가 아니었으니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곱고 정갈하고 다채롭고 먹음직스런 그 많은 떡 중에서 주로 행사 때 많이 쓰이던 궁중 떡 보다는, 쑥버무리며 보리떡 수수부꾸미 같은 것이 유독 맛있었음은, 그것이 바고 끼니를 때워주고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던 민초들의 삶이 배인 음식이라서가 아닐까?
원래 음식은 자랄 때 엄마가 해주시던 먹거리가 맛있고 그립고 한 것도 한몫 톡톡히 했겠지만 말이다.
늦잠 자고픈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바지런 떨며 예까지 온 것도, 전국의 떡 다 모인다니 어릴 때 먹던 음식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립던 차에 봄바람 불자 축제 열리고 성급히 봄맞이까지 하러 경주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야말로 웬떡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의 기본생활 요소인 의식주가 마구 밀려들어온 서구풍에서 다시금 우리의 옛것을 찾는 복고풍으로 돌아와, 전원생활이며 유기농법식 먹거리를 찾듯이 술, 떡잔치에 가봐도 그러했음은 유독 나만 느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제 거나하게 한 잔할 술에 대해 얘기하자면, 외국산 양주보다 우리 나라 땅에서 내 나라 기후에 맞게 자란 재료들로 빚은 전통주를 시음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쬐끔씩 마신 술에 은근히 취하는 기분 또한 쏠쏠했다.
전시된 술들이 대체로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약주인지라, 우리네 조상들은 얼마나 지혜로웠고 운치 있고 멋이 있고 풍류가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잔의 약주에 시를 읊고 자연을 만끽하고 세월을 낚으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을 닮으며 살았을 조상님들이 종종걸음치며 앞만 보고 살아가는 후손들을 보신다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름만큼이나 재료도 다양하고 전해져 내려오는 유래도 각기 다른만큼 맛 또한 특색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쌀농사를 짓는 우리는 주로 쌀과 누룩을 많이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술은 오래된 것이 좋다고들 여기고 있으나 곡물을 사용한 발효주는 100일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하였다.
또 전통주는 8℃ 정도로 차게 마셔야 제맛이 난다고 했으며, 색상은 재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황금색을 띠면 좋고 누룩 냄새가 나는 술이 좋다고 했다.
김포의 문배주(좁쌀과 수수), 변천의 두견주(진달래꽃), 전주의 이강주(배와 생강), 용인의 옥로주(누룩과 술밥에 율무), 한산의 소곡주(누룩 찹쌀 멥쌀 메주콩 엿기름 생강 들국화 고추) 등 지역의 특산 전통주가 정말 다양했는데, 그 중에서 한산의 소곡주의 유래가 기억에 남았다.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소곡주를 먹다가 취해서 일어나지도 못해 과거를 보지 못하였다는 전설에 유래하여 일명 "앉은뱅이 술"이라 일컬어진다는 얘기다.
지방 자치제가 들어서고 나서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바로 축제가 아닐까 싶다.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축제를 좀 하나로 묶어 쓸데없는 예산 낭비 좀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축제를 열어 국민들 가슴에 수긍이 가는 축제다운 축제 좀 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웃 시에서, 혹은 이웃 군에서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식이 아니라, 그 지역의 특산품을 제대로 알리고, 애용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마디 해본다.
다행이 여섯 번째로 열었다는 경주의 축제는, 불교문화의 고장이며 천년의 역사를 지닌 지역답게 우리 전통의 오랜 술과 떡을 주제로 했다는 것이 잘 각인되었다.
오늘 하루 술과 떡 속에서 넉넉하게 풍덩풍덩 잘 놀고 왔으니, 일었던 봄바람 잠재우고 시음한 전통주 맛 오랫동안 음미하며 조상님네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아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