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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시인 금당 이재복 편
석야 신웅순
노란꽃은 노란 그대로
하얀 꽃은 하얀 그대로
피어나는 그대로가
얼마나 겨운 보람인가
제 모습 제 빛깔 따라
어울리는 꽃밭이여.
꽃도 웃고 사람도 웃고
하늘도 웃음짓는
보아라, 이 한나절
다사로운 바람결에
뿌리를 한 땅에 묻고
살아가는 인연의 빛
너는 물을 줘라
나는 모종을 하마
남남이 모인 뜰에
서로 도와 가꾸는 마음
나뉘인 슬픈 겨레여
이 길로만 나가자
- 「꽃밭」전문
금당 이재복(1918-1991) 선생의 시조「꽃밭」이다. 대전문학관 계단 입구 오른쪽 언덕에 시비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이 시조가 새겨져 있다.
노란 꽃은 노란 그대로, 하얀 꽃은 하얀 그대로 피어나는 그대로가 얼마나 보람 겨운 일인가. 제 모습 제 빛깔로 서로 어울리는 꽃밭이 아니냐. 꽃도 웃고 사람도 웃고 하늘도 웃음짓는, 보아라, 이 한나절 다사로운 바람결에 뿌리를 같은 땅에 묻고 살아가는 인연의 빛들이 아니더냐. 너는 물을 줘라. 나는 모종을 하마. 남남이 모인 뜰에 서로 도와 가꾸는 이 마음을 보아라. 그러나 남과 북이 나뉜 이 슬픈 겨레여. 꽃밭처럼 서로 도우며 가꾸는 우리 이 길로 나가자. 이런 노래이다. 이 길은 물론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다. 간절한 통일 우리의 염원이 깃든 시조이다.
꽃밭에서 우리 겨레를 생각하는 애국 시인, 금당 시인을 우리는 주목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전문학관에서「작고문인 10인 기획전」을 추진하면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금당 이재복 의 작품을 찾아나서 보니 시와 시조 유작 300여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 중 시조가 48수였는데 불 후의 명작들이었다.
- 박헌오의 「이재복 시인론」에서
숫자가 대수이랴. 예술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그 누구도 토를 달 사람이 없다. 님은 생전에 한번도 개인 시집을 낸 적이 없다. 유작시가 300 여수면 시집 4권 정도의 분량으로 많은 수도 적은 수도 아니다. 그 중에서 6분의 1 정도가 시조인데 이 시조들이 하나 같이 차원 높은 예술성을 갖고 있어 적은 숫자만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필자는 대전의 금당 이재복(1918-1991) 선생을 한번도 뵌 적이 없다. 물론 시조를 쓰신 줄도 몰랐다. 필자가 대전에 터를 잡아 살기 이전에 가셨고 한국시조시인협회에서 조차 그 존함이 없었으니 알 리가 없다. 2013년 박헌오 시인이『한밭 시조문학』에「금당 이재복론」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그 이름이 시조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 때 알았으니 명색이 시조 시인이라는 우리들은 참으로 무심했다.
그는 독실한 불교인이었고 진정한 교육자였으며 고결한 선비였고 진정한 한국의 시·시조시인이었다.
2009년 그의 전집이 용봉 대종사 금당 이재복 선생 전집 간행 위원회에서 전 8권이 출간되었다. 그중『침묵 속의 끝없는 길이여』라는 문학집에는 그가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서정주의 추모 글이 있다.
지금은
지우고 싶은
아름풋한
서름 자욱
그래도
못 잊겠는
마음의
어룽인가
어쩌다
돌아다 보면
아쉬이
그리운 것
위에 보인 것은 시우 이재복 형의「낮달」이라 제목한 시이거니와, 내 생각으로는 이 시야말로 진정한 시인이고 인간으로서의 그의 무척은 겸허하고 자비롭던 모습을 간단하게 잘 드러내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도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이 혼탁한 세상을 못 잊어 나타나듯이 나타나 있 는 낮달의 서러움 그것은 바로 이재복 그의 모습으로도 느껴져서 말씀이다.…중략…생전 그의 시 를 아끼던 조연현, 김구룡, 정한모 교수 등과 함께 여러차례 시집을 내시도록 청하였으나 그 때마 다 부족하다하여 사양하시며 끝내 원고를 넘겨주지 않으셨는데 이는 오로지 이재복 형의 그 겸양 과 순백성 때문이다.
- 미당 서정주의 「추모의 글」
게다가 젊은 유학시절 육당 최남선 선생의 서재 ‘일람각’에서 서사로 근무하며, 만여권의 장서를 섭렵했고 또 이 곳에서 오세창, 정인보, 변영만, 이광수, 고희동, 홍명희, 김원호 선생 등 석학들과 교유하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내 놓으라 하는 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에도 그의 시세계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시집을 내지 않아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겸양지덕 때문이었다.
금당 이재복 시인이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준 것은 1940년 대 말에서 1960년 대 말까지 이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정훈, 박희선,박용래,정해붕,원영한,이교탁,최영자,송석홍, 하유상, 한진 희 등과 함께 『향토시가회』,『동백』의 동인으로 활동한 바 있고, 공주사범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1949년 4월 6일에서부터 1954년 2월 29일까지는 이원구,정한모,김구용 등과 『시회』동 인으로 활동한 바 있다. 불교 종립재단인 보문중고등학교를 건립,교장으로 있던 1950년 대에는 권 선근,임희재,박용래, 송기영, 추식,한성기,손을조 등과 함께 『호서문학』동인으로 창작활동과 문단 활동을 펼쳐온 것이 그이다.…중략…이렇게 왕성하던 그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슨 이유에서 인지 갑자기 붓을 거두어들인다.
-이은봉의 「금당 이재복 시의 정신지향」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당시 적극적인 그의 문학 활동에도 불구하고 문학 활동 시기가 짧은, 조금 넘는 2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는 문학인으로 살기보다는 불교인으로 교육인으로 더 많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토해놓은 시들은 한결같이 차원 높은 명편들이어서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나 시조계에서 그만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이것이 필자가 써야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그의 시들을 분석하고 증명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의 시·시조 일부라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하는 것이 우선이며 일단의 목적이다.
시조 읽기에 앞서 먼저 시 한편을 감상해보도록 한다.
생각한다는 것, 이 얼마나 야위는 노릇입니까.
흔들리는 바람 속에 풍표(風標)와 같이 향(向)을 바꾸면서도 아름다운 생각을 놓치지 않기란 아 무래도 정착된 위치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예감이 있습니다. 한 점 없는 날씨에도 극미한 몸짓이 있습니다.
미지에의 예감은 바로 당신 앞에 비치인 잔잔한 호수의 꿈과도 통하는가 봅니다.
드디어 이 땅 위에 일절을 긍정하여 느껴 우는 날
다만 자욱한 안개 속을 고요히 기울여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갈대」전문
한용운 선생의 시 한편을 읽는 듯하다. 당신은 누구이고 갈대는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과 갈대는 서로 몸을 바꾸며 법문으로 말하고 듣는 것 같다. 부처님은 실체가 없다. 극미한 몸짓, 기울여 듣는 소리, 놓치지 않는 생각으로 감지할 수밖에 없으니 어디서 그 생각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삶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으로만 대답을 대신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부처님을 향한 시인의 곡진한 구도적 자세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35세에 썼으니 부처님을 통한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기구의 마음이 담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구원도 절망도 함께
텅 비인 가슴이다
차라리 어둠을 지켜
침묵하고 싶다마는
새벽을 또 어찌하리오
포효하는 먼 하늘
눈을 뜨면 우러러
한 하늘 별빛인데
다락같은 소슬한 뜻을
바람에 맡긴 채로
녹슬은 비원을 머금어
여기 뇌여 울어보는가
매달린 육신일레
마음은 영겁을 품어
메아리 되돌아오는
허무한 세월을 두고
스스로 못다한 절규를
달래보는 그 여운
- 「범종」전문
선생은 사하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15세에 갑사에서 불교에 입문, 수계를 받았으며 19세에 마곡사에서 5년간 수선 안거를 마쳤다. 23세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 지도자인 석전 박한영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으니 님은 태생적으로 불교인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나 싶다.
1952년 그의 나이 3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즈음에「범종」을 썼다.
구원도 절망도 텅빈 가슴이다. 차라리 어둠을 지켜 침묵하고 싶으나 포효하는 먼 하늘 새벽을 어찌하는가. 우러르면 큰 하늘 별빛인데 다락 같은 소슬한 뜻을 바람에 맡긴 채 녹슬은 비원을 되뇌여 울어보는가. 매달린 육신에 영겁을 품은 마음. 세월은 메아리로 돌아오고 스스로 못다한 절규를 여운으로 달래본다. 여기에서 ‘에밀레, 에밀레’ 하며 우는 시인의 또 하나의 범종소리를 듣는다. 범종의 울음은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불사의 끝없는, 자신의 낮은 울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시조를 보면 그에게 어머니는 차라리 하나의 종교였다.
아버지 일찍 여윈 두 남매를 재워놓고
품갚음 바느질 감 외오 밀어 던져두고
달 환한 창머리에서 몰래 울던 어머니
서울로 올라가던 어리든 가슴 안에
나도 남보란 듯이 모실 날을 믿었오만
세상일 속아 속아서 설흔 살이 넘다니
끼니마다 산나물죽 아무려면 어떠냐고
다만 믿어오기 이 몸 하나 뿐일러니
주름살 그늘진 오늘도 꾀죄죄한 그저 그 옷
보람도 헛된 날로 하여 넋은 반이 바스러져
간간이 망령의 말씀 꾸중보다 더 아픈데
서럽도 않은 눈물을 어이 자주 흘리시오
갈퀴 같은 손을 잡고 서글퍼 하는 나를
고생이 오직 하냐 되려 눈물 지우시니
갈수록 금 없는 사랑 하늘 땅이 넓어라
- 「어머니」전문
1949년 공주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었던 시조이다. 어머니만한 커다란 그리움이 세상 누군엔들 없을까만 어느날 불현듯 그 옛날의 어머니가 생각나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에서 제일 낮은 곳에서 일필휘지 이 시조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금당은 갑사 아래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나머지는 다 돌림병으로 죽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생후 6개월에 돌아가셨으니 님은 유복자나 다름없다. 이후 당신 혼자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이었다.
금당 선생의 유년, 중· 고 ·대 시절은 형언할 수 없는, 맹모 삼천지교, 어머니의 힘든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러한 삶을 형상화 했으니 명편의 탄생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어릴 적 부텀
불행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뭇 모른다
해마다
돌아오는
오늘 제삿날
향불도
가난한
제상머리에
꿇어 엎딘
내 마흔의 나이는
상기 서러운 고아인데
아아
어둔 바윗 속 고이는
맑음이랄까
긴 수염
흰 옷자락
꿈엔 듯
뵈여
삼가로이
눈을 들면
촛불 한 자루
-「정사록초(靜思錄抄) 49·제사날」전문
「어머니」는 32살에 쓰고「아버지」는 40살에 썼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운 화답시랄까. 같은 어버이인데 아버지인들 왜들 어머니 못지 않았겠는가.
아버지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속죄일까.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형상은 어두운 바위 속 고인 맑은 물이었다가, 긴 수염 차림에 하얀 옷자락이었다가 얼굴을 들면 결국 촛불 한 자루로 깊은 밤 고즈녘 타고 있는 아버지였다. 우리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고 우리의 가슴을 멍멍하게 만든다. 향불도 가난한 제상머리에 끓어엎딘 내 마흔의 나이는 상기 서러운 고아인데, 아니다. 한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한 시인 자신이 한자루 촛불이 되어 아버지 대신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그리운 눈 내리는 밤이었다. 시인은 들창을 열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깊은 사념에 잠겼을 시인,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천천히 읊어내렸다.
고쳐 누워 보아도 캄캄한 그 벽일레라
삶은 또 헝클어진 설음의 실마린가
올올이 풀리는 밤에 자욱한 벌레소리
스스로 초랑초랑 내 영혼이 지켜 듣는
어느 깊이에서랴 끊일 듯 끊일 듯이
아름풋 메아리져오는 절규보다 겨운 것
어둠일레 세상은 오히려 빈 것만 같고
고요도 사무칠 양이면 나마저 허망한 것을
인생을 어쩌란 말이냐 울어쌓는 그 사연
-「벌레소리2」전문
님은 40, 50대 때 많은 일들을 하셨다. 충남 국어교육회장, 충남 교육 회장, 대한교육연합회 부회장 등에 선출되었으며,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대전불교연수원을 창설하고 중고등학교 불교 교본 간행, 한국문협지부장, 불교종립학원연합회 부회장,법륜사 대륜무도회 회장 등 그 외 열거 할 수 없을 정도의 문학,불교,교육의 수 많은 일들을 소화해 내셨다.
47세 때의 작품이다. 불혹도 만년이면 인생의 깨달음이 절로 오는 것인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조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고쳐 보아도 캄캄한 그 벽이다. 삶은 또 헝클어진 설움의 실마리란다. 자욱히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올올이 풀려가는 밤이다. 영혼이 듣고있는 그 풀벌레 소리. 어느 깊이에서 끊일 듯 끊일 듯 메아리져 오는 절규보다 더한 것. 세상은 어둠이란다. 설움도 비어있고 고요도 사무쳐 나마져 허망하단다. 인생을 어쩌란 말인가. 어쩌란 말인가, 울어쌓는 그 사연을. 님의 그리움이 어찌 이 만큼까지 왔는가.
정완영의 시조「아내」를 읽는 듯 유치환의「그리움」읽는 듯 눈시울이 뜨겁다. 시·시조는 소리내어 읽어야한다. 온몸으로 읽어야 비로소 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시인들이 내용에만 치우치다 흔히 놓치기 쉬운 것이 시 읽기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시를 묵독하는 버릇이 생겼다. 낭송하기 좋은 시가 가장 좋은 시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의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선비의 시 읽는 소리에 반한 조선의 남자, 여자들이 아니던가. 시조를 소리내어 읽어보라.
어느 거룩함의
소리 없는 애무이뇨
미움도 사랑도
함께 하얀 길 위에서
회한의 발자국마다
쌓여가는 그 말씀
이 외론 영혼에마져
축복을 보내는가
주시는 그 꽃잎이랴
가비얍게 흩날리고
빈 손을 들어 흔들면
아쉰 것은 인생일레
하늘도 땅도 모두
아슬하여 없음만 같고
빛도 향기도 끊여
종교처럼 소슬한데
잊었던 맑은 이름들
엇갈려도 오는가.
-「눈 내리는 밤에」
어느 거룩함의 소리 없는 애무인가. 미움도 사랑도 함께 하얀 길 위, 회한의 발자국마다 쌓여가는 그 말씀, 이 외로운 영혼마져 축복을 보내는가. 꽃잎은 가비얍게 흩날리고 빈 손을 들어 흔들면 인생은 늘 아쉬운데 하늘도 땅도 모두 아슬하여 없음만 같고 빛도 향기도 끊겨 종교처럼 소슬하다. ‘잊었던 맑은 이름들이 엇갈려도 오는가’에서 아, 여기에서 가슴이 철커덕 닫힌다. 41세 때의 작품인, 김광균의「설야」한편 같은, 그리움의 「눈내리는 밤」은 절창 중의 절창이다.
시란 읽고 또 읽어서 좋고, 읽고 또 읽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무엇을 더하고 뺄 수 있으리오. 님의 고결하고 하얀 눈길 위에 흠이 될까 펜의 발자국이라도 남기고 싶지 않다. 그저 상상하고 또 상상할 뿐, 그저 읽고 또 읽을 뿐이다.
이 시 한편 읽어보자. 글이 그 사람이고 글씨가 그 사람이라 했다.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얼굴을 그릴 수 있고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시인의 말씨까지 생각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맑고 순수한 동화 같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 한편 올린다.
산마루 위에서 도란거리던 별은 한밤이면 마을 우물 속에 들어와 잔다.스미어 초랑초랑 맑게 고 인, 깊게 잠기인 별을 새이른 아침부터 집집 아낙네가 별을 길어 나른다. 이웃 아이들은 별을 마 시면서 자라는 줄을 저도 모른다.
-「정사록초(靜思錄抄)4」일부
님에게는 유난히 금강산 기행시조가 많다. 여기에 덧붙일 수 없음이 유감이다. 다음에 읽을 거리를 남겨두어야 할 듯 싶다.
어제는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아침 햇살이 하늘에서 쉴새없이 쏟아진다. 저 햇살을 받아 밥을 해서 부처님께 공양하면 밥이 찰지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꽃이 우수수 다 졌다. 온통 연두빛 거리이다. 바람에 살랑살랑 아니 찰랑찰랑 어린 잎새들을 보아라. 바람에 온몸을 맡겨 자신을 걸러내고 자신을 뒤집는 어린 잎새들을 보아라. 별 것이 아니다. 이런 바람, 이런 잎새, 이런 움직이는 숨죽이는 세상 만사가 다 시 ·시조가 아니겠는가.
단시조 한편을 부친다.
오히려 목이 타던 작열한 그 격정도
지긋이 견디고 보면 한나절 소나기에
서늘한 생각이 돌 듯 벌써 가을이고나
-「초추(初秋)」
- 출처 : 시조문학,2018,여름호,104-116쪽.
[출처] 시인 금당 이재복 편|작성자 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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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인연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피서 잘 하신 가운데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