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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흔들림없이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의인들!
안타깝게도 우리네 인류 역사 안에 참혹한 사건들은 거듭 반복됩니다. 폭력적이고 교활한 악인의 등장과 승승장구,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의인들과 선인들의 등장과 무고한 죽음이 그렇습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공평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그리 끔찍한 현실을-의인의 고통과 죽음-허락하시는지, 정말이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토록 무례하고, 저토록 사악한 악의 무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작당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데, 정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어찌 이리 여전히 침묵하고 계시는지, 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고 싶은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을 장식하는 세례자 요한 케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 주님의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구원의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최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무고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 묘하게도 한 사악한 여인의 모략과 간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의 비리와 악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공연하게 경고한 세례자 요한에 대해 강한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의 증오와 복수심이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찌 이리도 오늘 우리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지 오싹한 느낌마저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희망해야 마땅합니다. 지금은 비록 악이 활개를 치고 악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느님의 선은 언젠가 반드시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다가 박해를 받고 무고하게 고통받고 죽어간 의인들의 생애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오랜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이토록 참혹한 야만의 시대, 단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진리를 증언하고 계시는 의인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그분들 고난의 여정에 끝까지 동반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루빨리 짙은 안개가 활짝 걷혀 세상만물의 형체가 제 빛깔을 발하듯이, 어서 빨리 진위가 가려져,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날뛰는 무리들이 무대 뒤로 조속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6,14-29
죄는 핑계 대지 않는다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말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죄책감은 그것을 죄로 고백하고 합당한 보속을 하여 공적인 용서를 받을 때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는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고해성사’란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고 보속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서 행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헤로데는 그 다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들 가운데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번 죽였던 요한을 두 번 못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핑계’를 대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그것은 죄야!”라고 말해주는 양심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항상 적당한 핑계를 먼저 찾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상대가 먼저 잘못한 거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랬겠어?”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해성사 때도 부쩍 ‘상담’을 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사제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러다가는 고해성사까지도 죄의 합리화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헤로데와 같은 상황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구원을 받으려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죄는 죄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고해성사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그 눈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6,14-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였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참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연인이 데이트 중이었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우리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자 친구는 “나는 파스타 정말 싫어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가 싫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싫은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묘해서 자기가 이야기한 것을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싫어지는 법입니다. 저 역시 싫은 것은 곧바로 말하는 스타일임을 반성합니다. 사실 더 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남자 친구의 경우를 볼 때, “우리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갈까?”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일식은 어때?”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말을 쓰게 되면서,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부정적 감정은 전투할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가 많습니다. 그에 반해서 긍정적 감정은 평화로울 때의 감정이라 에너지 소비도 거의 들지 않고 부담도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도 부정적 감정을 내려놓고 긍정적 감정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싫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싫어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고, ‘좋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좋아할 사람을 불러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과 행동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또 자기가 보고 싶은 행동만을 원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말과 행동을 너무 쉽게 합니다. 이 결과는 상대로부터 똑같이 부정적인 감정과 담긴 말과 행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수용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겸손의 마음이 긍정적 감정을 만들어 행복의 삶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본부인과 이혼하고,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그 결과는 본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태아 임금이 분노하여 전쟁이 일어납니다. 유다 전 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 한 사람의 잘못이 많은 이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서 혼인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줍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말은 듣기 싫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나바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임금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과 보고 싶은 행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긍정적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최고의 기회, 지혜가 숨겨져 있다. 실패란 없다. 다만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일 뿐이다(앤서리 라빈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13,2)
하루라는
시간의 문이 열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
어떤 날에는
천사들을 접대하는
영광이 될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날에는
의인의 목을 치는
죄가 될 수도 있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하느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행동과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행동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권력과 독재를 사랑하는 사람과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도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그 점을 헤로데를 통해서 다시금 보게 됩니다.
최고 권력을 누리는 헤로데는
평생을 사람의 시선을,
이 세상을 두려워 한 인물로 비쳐집니다.
결국 그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반면 세례자 요한은 오직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느님만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세상또한
죽습니다.
사람이
있고나서야
헤로데 임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은
생명존중입니다.
이 기본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은
아주 순식간에
허물어져버립니다.
우리가 우리를
찾는 유일한 길은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에 가장
위험한 존재는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깨어지면
그 어떤 것도
안전한 곳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참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6,14-2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라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 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 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 임금에게도 들어가자, 헤로데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합니다.
'죄 짓고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으면 불안과 가책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말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이미 지은 죄는 뉘우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불의를 지적하면서 정의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요즘도 헤로데 임금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처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를 외쳐야 하고, 특히 성직자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13,5)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돈과 권력과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죽음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덤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공정과 정의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노력해 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3,1-8
형제 여러분, 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존중되어야 하고,
부부의 잠자리는 더럽혀지지 말아야 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5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분께서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7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