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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구약을 살 것인가? 신약을 살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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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15 03:26
- 구약을 살 것인가? 신약을 살 것인가?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번 주 내내 주님 말씀 곧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말씀은 이런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여전히 구약을 살 것인가?
아니면 신약을 살 것인가? 선택을 요구받는 것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대인처럼 구약을 살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신약을 살 것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인답게 신약을 살아야겠지요.
문제는 신약을 살려면 구약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는 미워하되 이웃은 사랑하라는 구약의 법이 있는데
주님은 이웃 사랑에서 더 나아가 원수 사랑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신약을 살려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직 신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원수 사랑은 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원수 사랑의 완전한 실천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에서 애초부터 배제하지 말고 더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은 안주하지 않는 우리의 향상(向上) 의지를 촉구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완전에의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가짐은 물론,
아들답게 살겠다는 우리의 도전 정신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옛사람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 아들답게 늘 새롭게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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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과 1학년 때, 라틴어를 배웁니다. 솔직히 너무 어려웠고, 사어(어느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죽은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가 했습니다. 더군다나 매주 쪽지 시험을 보니 라틴어에 대한 압박은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를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라틴어를 1년 동안 배운다고 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없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사전을 펴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이다. 공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부는 배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어떤 강의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혀 얻을 수 없었어도, 배우는 법만 익힐 수 있으면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주님의 교육 방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어떻게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배우는 법을, 즉 세상에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과 달리 우리는 늘 새로운 것만을 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고, 자기가 잘못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없애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특별한 것만을,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율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또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우리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뛰어넘어,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상 안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을 무조건 달라는 식의 잘못된 모습이 아닌, 또한 주님께 헛된 맹세를 하면서 조건만을 계속 외치는 위선적인 모습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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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이 하는 일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어떤 변화를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제인 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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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오늘은 네 번째 새로운 의로움으로, ‘맹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에사오가 성급한 ‘맹세’로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넘긴 이야기(창세 25,33), 헤로데의 경솔한 ‘맹세’로 한갓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잃은 이야기(마르 6,17-19), 베드로가 추궁을 벗어나기 위해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모른다고 배신한 이야기(마르 14,71) 등을 압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맹세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계약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는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한편, 사람들끼리는 ‘맹세’하여 계약을 체결하고 약속이나 결심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가면서, 하찮은 일까지도 하느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이기적인 거짓 맹세’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피조물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맹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일 뿐,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정직함’(솔직함, 질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힐라리우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말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창세 12,5)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1-12).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 행세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 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시고,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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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모범 이십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 하기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흥정하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을 잊기도 하고 어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섣불리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할 때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히브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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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서품을 받으면 성사적으로 사제는 미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교구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교구장님으로부터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교회법 규정에 따라 교구장이 아닌 사제는 신자사목에 있어 교구장으로부터 위임 또는 허락을 받아야만 유효하고 합법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는데 교구사제 특별권한이란 교구장이 특정 사항에 관한 자기의 직권 중 일부를 자기 소속사제들에게 관례적으로 위임하거나 허락할 수도 있는 권한입니다. 한국과 같은 1일 생활권에서는 비록 소속 교구가 다를지라도 해당 교구의 교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지 않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2005년 캐나다 토론토에 연수 갔을 때입니다. 저는 토론토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Faculty)을 받았습니다.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저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교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텍사스 댈러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신청하지 않았지만 서울 대교구와 댈러스 교구의 협의에 따라서 댈러스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4월 26일에 저는 포트워스 교구에 속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저는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먼저 포트워스 교구로부터 혼인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 할 수 있는 것은 사제 본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도 비슷합니다. 저는 뉴욕의 운전면허증이 있지만 댈러스로 주소를 옮기면서 텍사스 운전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텍사스 주는 주소를 옮기면 반드시 운전면허증을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잘못하면 발을 잘라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은 행위로 인해서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 이전에 생각과 마음만으로도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된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어기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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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는 가끔 교우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다. 다른 세상 어떤 것도 하느님 이외에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이외의 것은 모두 가변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변적이란 말은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가변적입니다.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유한한 사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믿음의 균열이 생기고 상처와 아픔이 발생합니다. 아주 당연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배신으로 돌려받았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분노의 마음으로 복수를 다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었을 때 이미 그 아픔과 상처는 예견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서로가 믿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믿음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사람을 믿는 것은 같은 차원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느님 이외의 것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변하는 곳에 마음을 두지 말고 불변하는 곳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 신앙을 그곳에 두십시오.
‘예’와 ‘아니오’로 우리 하느님께 우리가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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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끼 짬뽕
얼마 전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을 소화하던 중 안내해 주시는 분께서 나가사끼 짬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요리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그림 한 장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저는 정사보다 야사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사끼 짬뽕은 일본으로 건너온 대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국땅에 와서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 고향을 생각하며 이국땅 것으로 모국을 그리며 만든 음식이 바로 나가사끼 짬뽕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짬뽕이라는 말 자체가 ‘혼합’, 혹은 ‘섞여 있다.’라는 뜻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섞이고 문화와 문화사 섞여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일 것입니다.
오늘은 짬뽕 한 그릇 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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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직하여라
“참 좋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시편16,8)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루하루 쌓여온 습관들이 내일을 결정하는 운명이 된다. 굳어진 습관은 갑옷이 될 수도, 벽이 될 수도 있다.”<다산>
“본성(本性)은 서로 가까우나 습성(習性)에 따라 멀어진다.”<논어>
새삼 늘 강조해온 좋은 덕목을 사랑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함이 얼마나 중요하며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하는데 좋은 습관이나 버릇은 평생 반듯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런 면에서 좋고 필요한 덕목들인 기도와 노동, 성독이 균형잡힌 수도원 일과표의 반복된 생활이 좋은 삶의 습관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의 제4 대당명제는 “정직하여라”입니다. 200주년 성서는 “맹세하지 마라”입니다. 맹세하지 말고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몰라 무지해서, 교만과 허영으로 맹세하지, 자기 삶의 실상을 잘 들여다 보는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결코 맹세하지 않습니다. 맹세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고 내 맹세가 확고부동하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찌 맹세할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정직하라, 진실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정직하면 떠오르는 예화가 있습니다. 여러번 예로 들었습니다만 예로 들 때마다 새롭습니다. 저를 가장 좋아했던 바로 고인이 된 윗형의 삼형제 아들들, 조카들이 있는데 셋 모두의 삶이 반듯하여 자랑스런 마음입니다. 첫째 조카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국어 선생님이 가훈을 알아 적어 오라 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셋을 써주셨습니다. ‘1.정직, 2.효도, 3.우애’였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버지 말씀이 더욱 생각이 납니다.”
이 가훈을 듣고 어찌 덕목의 첫째로 정직을 선택했는지 저는 형의 착상이 참 신선함에 감탄했습니다. 사회생활에 정직하고 진실한 삶이 상호신뢰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실로 지대합니다. 그래서 50살 전후의 삼형제 조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정직하고 효도하며 우애좋은 형제들로, 또 사회생활도 잘하며 살아갑니다.
한 예를 더 들면 세 조카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몇날 자리를 비울때는 셋이 나란히 ‘잘 다녀 오시라’고 큰절을 했고 다녀온 후에도 ‘잘 다녀오셨냐’ 인사하며 셋이 나란히 큰 절을 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아이들처럼 키워도 되나 속으로 웃으며 반신반의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음을 지금서야 깨닫습니다. 그대로 윗 형님인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이지요. 그래서 삼형제 조카들을 볼 때 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밑거름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좋은 덕목의 영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을 발함을 봅니다. 마리아 성모님께 효도로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능가할자 없을 것입니다. 로마를 떠나 사목방문차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반드시 성모경당에 들려 성모님께 인사드리는 교황님의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은 늘 강한 인상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주 단호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혀지는 지극히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저절로 개탄하는 마음이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 진실하고 정직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단호합니다. 삶은 지극히 단순소박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런 이를 일컬어 진국이라 합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실을 사실대로 참되이 말하면 충분한데 맹세 따위 군말을 붙이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문득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본의 아니게 과장된 말이나 뒷담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악마가 끼어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일치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5,12)
맹세는 물론이고 구구하게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요 저절로 침묵이 뒤따를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진실과 겸손한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얼마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며 순수하고 지혜로운 두 인물을 만납니다. 평생동안 주님이 주신 제 사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엘리야, 이제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정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엘리야를 따라나서기 전 단호하게 말끔히 뒷정리를 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참으로 진실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시중을 들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합니다. 뒤로 달아날 다리를 불살라 버림으로 퇴로를 차단하고 배수진을 친, 옥쇄(玉碎)까지 각오한 결연한 참된 순교적 삶의 자세로 흔쾌히 스승 엘리야를 따라 나선 제자 엘리사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진실하고 겸손한 참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119;36.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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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나는
이렇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이런 나
나는
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하는 나
나는
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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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3-34)
믿는 이에게는 맹세가 필요 없다
율법은 거짓 증언을 막기 위해 맹세 의식을 세워,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이 따르도록 규정했습니다 ... 그러나 믿음은 맹세가 아예 필요 없게 합니다. 믿음은 실제로 우리 삶의 태도를 확립합니다. 속이려는 마음 자체가 없을 때는, 말하고 듣는 것이 단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따라서 믿음의 단순함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맹세 의식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됩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우리가 하느님처람 되고, 영적 의식이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다. 설교 2에서, 엑카르트는 이분법적 의식을 소개하면서, 이분법은 결코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본 설교에서 그는 그러한 원리를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적용한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근본주의자들과 심령주의자들이 곧잘 이분법적으로 가르던 주제였다. 엑카르트는 신플라톤주의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유대인들의 전일론을 지지한다. “이 마음, 이 넋이 기쁘고 즐거워, 육신마저 걱정 없이 사오리다”라고 시편 저자는 노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영적인 것은 ‘육체가 아닌 어떤 것”이다. 영혼과 육체는 종과 주인의 관계와 같다. 엑카르트는 영혼이 몸의 모든 지체를 두루 여행하고 일치를 확립한다고 말한다. 치료하고, 온전케 하고, 우리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영혼의 일이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로 갈라지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에 맞서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는 한 실체다.(18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앞에서 딘편적으로나마 살핀 것처럼 이슬람의 신앙은 자연과 초자연, 현재의 삶과 내세의 삶, 시간과 영원이라는 두 차원을 날카롭게 구별하여 인식하지만, 분리되어 있거나 후자를 버려야 할 무기치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 두 차원은 통전되어 있는 하나의 실재인데,, 다만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초자연계, 내세, 영원을 지향하기 위해서 가변적인 것, 유한하고 현세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거나 메이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슬림의 금욕주의는 육체를 죄악시하거나 물질을 천대시하는 영지주의 (Gnosticism)와도 디르고 마니교와도 그 경향성이 다르다. 특히 이슬람교는 독신주의를 초창기부터 비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슬람교가 성립된 지 100년이 지난 후 그 세력 판도가 비잔틴 제국, 사산왕조(고대 이란 왕조), 북아프리카 등으로 확장되면서,, 이슬람 통치자들과 궁중 종교 지도자들은 권력과 부와 명예욕에 병들기 시작했다. 모든 종파에서 신비주의 운동이 자기 종단의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9세기 경부터 뚜렷하게 훨씬 더 내면적인 자기 성찰과 명상적 금욕을 통한 영적 정화 운동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초기 수피즘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는성자 라비아 알 아다위야(801.d), 알 무사하비(857.d), 알 쥬나이드(910.d), 압둘 질라니(1166.d), 알 가잘리(1126.d) 등이 유명하다.
수피즘은 12세기 이후부터 전체 이슬람권으로 확장되어 갔지만 특히 이란 지역에서 가장 성했다. 그렇게 된 데는 동방 신비주의의 오랜 전통과의 접촉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 신비 사상과의 접촉에 따른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등지에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수도원 운동 및 신비 사상과의 접촉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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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5,37)
삶에서 최소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꿀 마음을 먹어야 하고,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아니요’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무언가 부정하고 거부한 듯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부정이나 거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형의 손찌검처럼, 양성 초기엔 함께 사는 형제의 휘둘림으로 인해 저는 예전처럼 살아서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내적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은 「권력욕」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표현하기를, 아니요는 어떤 그 무엇이나 누군가와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강력한 단어이며, 아니요는 불일치를 표시하는 말로, 실제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권력 형태나 외부 압력 앞에서 아니요는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표현한, ‘생각하는 것은 네라고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살려고 다짐합니다. 알랭은 그래서 “잠든 자는 ‘네’라고 말하고, 깨어 있는 자는 ‘아니요’라며 고개를 내젓는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부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수도원 입회 후 어떤 사람 때문에 그리고 그가 저에게 한 폭력 때문에 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해 왔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맥락, 즉 참과 거짓 혹은 옳음과 그름의 관점에서 ‘예와 아니오’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겠지만, 아무튼 저는 이런 연유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 ‘예’라는 말보다 ‘아니요’란 말을 더 자주 빈번하게 표현하며 살아온 편입니다. 무척 자기방어 기제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저를 표현할 때 저는 똥개라고 말합니다. 왜 똥개는 자주 큰 소리로 짖어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면 진돗개는 아무 때나 짖지 않습니다. 저는 겉으로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입니다. 강한 척할 뿐이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그렇게 저를 방어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이젠 더 이상 저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기에 요즘은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회색 인간이 된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젊은 날에는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이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분이 바로 돌아가신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이십니다. 그런 신부님의 표현이 예전에 제 성격이나 성향에 맞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젠 받아들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처럼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침묵하며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흑백이 전부가 아니듯이, 흑백만이 진실이 아니더군요. 과거엔 남보다 피곤한 삶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5,37)하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아니오, 라고 말해 놓고서 예, 라고 변경하는 경우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진리나 정의 앞에서 우리 모두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욱 잘못한 권위자 앞에서는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아니요.’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진정으로 나이 든 사람의 자세와 삶이라 봅니다. 예, 라고 해야 할 때 예, 라고 응답할 수 있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이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제 삶 앞에 어떤 상황이라도 예할 것을 예하거나, 아니요할 것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시119,36.2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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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맹세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하십니다.
맹세 자체를 금지하시면서 거짓 맹세를 못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함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면, 맹세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진리에 대해서 하느님을 걸고 맹세할 만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한 말에 오류가 있다면, 내가 한 맹세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기억한다면, 내일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맹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26,34-35)라고 맹세합니다.
이 무책임한 맹세는 거짓 맹세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반대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맹세 대신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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