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70]하서河西의 훈몽재訓蒙齋를 아시나요?
16세기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선생을 아시겠지요? ‘겨레의 스승’ 열여덟 분의 한 분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필암서원筆巖書院에서 제향(춘향·추향제)을 지내는 큰 학자입니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소문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세자 인종仁宗의 선생님이 되었지요. 인종은 조선 12대 임금으로 재위기간이 불과 8개월, 가장 단명했으나 예술에 능했답니다. 스승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발제시를 쓰게 한 게, 유명한 <묵죽도墨竹圖>입니다. 인종이 승하하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3천여편의 한시를 짓고 <천명도>를 비롯해 <백련초해> 등을 저작했습니다. 학자임금인 정조는 “조선 개국이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극찬하며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추증벼슬을 많이 내려줬답니다. 우암 송시열은 “동방의 주자이자 호남의 공자”라고까지 평했답니다.
어쨌든, 하서가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이 현재 순창군(쌍치면)에서 운영하는 <훈몽재訓蒙齋>입니다. 훈몽은 어린아이나 초학자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말로만 듣던 그 곳을 그제 지인 3명과 가보았습니다. 낭랑한 글읽는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송강 정철도 훈몽재에서 공부했지요), 고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앞을 흐르는 냇물도 무척 좋았지만, 한자와 한문공부는 이제 배우려는 학생도 없고 가르치는 훈장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하서가 ‘소쇄원 33경’ 시을 남긴 걸 보면 담양의 소쇄원도 여러 번 갔던 것같습니다. 하늘, 물, 사람에 대한 한시를 3000여편 지은, 자연을 지극히 사랑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인종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는 곳에 비도 세워져 있습니다(북망통곡北望慟哭). ‘자연당自然堂’이란 큰 편액이 걸린 유래를 보니, ‘소하서小河西’로 불렸다는 하서의 5대손 김시서가 호를 자연당으로 짓고 선조 하서를 추모하며 훈몽재를 크게 중수했다는군요. 당시의 훈몽재는 소실돼 복원하였고 산천은 의구한데, 그 뒤를 이을 인재들이 없는 게 속상했습니다.
훈몽재를 찾은 이유는 몇 년 전 훈장으로 오셨다는 고당 김충호 선생님을 혹시나 뵐까 싶어서였습니다. 고당 선생에게 20년쯤인가 성균관 한림원에서 불멸의 고전인 <논어>를 2학기동안 배웠거든요. 양쪽 귀에 길고 검은 털이 밖으로까지 나와 있어 신기했습니다. 양학洋學을 안하신 선생님은 그 털이 '세상소식을 듣는 안테나'라고 농을 했지요. 그런데 최근 훈장이 바뀌었다고 해 뵙지 못했습니다.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에 하서가 지은 시를 감상해 볼까요?
根枝節葉盡精微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 *정미하다는 자세하고 치밀하다는 뜻
石友精神在範圍
바위를 친구 삼은 뜻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始覺聖神伴造化
비로소 성스러운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심을 깨닫노니
一團天地不能違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십니다
멋지지 않나요?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과 시를 주고받은, 조선의 훌륭한 임금과 신하를 보신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유일하지 않을까요? 역사가 꼬일려고 하니 임금이 단명短命한 것이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나요? 제법 잘 ‘나가던’ 대한민국의 역사가 꼬일려고 한 때문인지 대통령 한 명을 잘못 뽑지 않았는가요? 조선조 ‘찌질이 임금’은 또 무릇 기하였습니까? 폭군 연산군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저 한몸 살자고 맨먼저 도망을 가고 압록강을 건너자던, 충무공 이순신을 시기 질투하여 잡아 고문을 시킨 선조宣祖도 임금은 임금이었지요. 신문명을 도입하자는 큰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를 죽인 인조仁祖는 또 어떤가요?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이나 찧으며 절을 했으니까요(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그것 참’입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Ⅱ-75]인종대왕의 묵죽도墨竹圖와 하서 김인후 - Daum 카페
저는 <推句추구>에 나오는 대구對句의 문장들이, 하서가 중국의 7언고시 연구聯句 100수를 모아 엮은 <백련초해白聯抄解>에서 뽑은 것들인지 몰랐습니다. 대표적인 것 4개만 들고 졸문을 접겠습니다.
1. 花笑檻前聲未聽화소함전성미청 鳥啼林下淚難看조제임하누난간(꽃이 미소를 지으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없고/새가 울지만 그 눈물을 볼 수가 없네)
2. 花含春意無分別화함춘의무분별 物感人情有淺深물감인정유심천(꽃은 봄의 뜻을 나와 너의 분별없이 품고 있지만/사물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은 얕거나 깊은 차이가 있구나)
3. 風射破窓燈易滅풍사파창등이멸 月穿疎屋夢難成월천소옥몽난성(바람이 찢어진 창으로 쏟아지니 등불은 꺼지기 쉽고/달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니 잠을 이루기 어렵네)
*射는 바람이 찢어진 창문(破窓)으로 화살처럼 들어온다는 문학적 표현. 穿은 달빛이 창문(疎屋) 사이로 들어온다는 뜻이며, 夢難成은 잠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
4. 花衰必有重開日화쇠필유중개일 人老曾無更少年인로증무갱소년(꽃은 시들어도 다시 필 날이 있으나/사람은 늙어지면 다시 소년으로 돌아갈 수가 없네) *曾은 일찍이, 여태까지의 뜻.
이 시구에서 '花笑鳥啼화소조제' '花含物感화함물감' '風射月穿풍사월천' '花衰人老화쇠인로'라는 사자성어도 나오더군요.
<추구>를 배울 때, 1은 花笑聲未聽이요 鳥啼淚難看이라, 2는 春意無分別이나 人情有淺深이라, 3은 風窓燈易滅이요 月屋夢難成이라, 4는 花有重開日이요 人無更少年이라,라고 큰 소리로 외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흰머리에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가 돼버린 현실이 한없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부기: 하서 김인후가 화순에 귀양해 있던 기묘명현己卯名賢 신재新齋 崔山斗(1483-1536)에게 예학禮學을 잠시 배웠습니다. 성균관 유학시절 스승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자 ‘시마緦麻’(가는 삼베로 만든 상복을 뜻하나 여기에서는 조의를 표하려고 옷에 단 작은 리본)를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1년 후인지 귀향하여 스승의 묘를 찾고 조문을 쓴 게 <신재집>에 실려 있습니다. 신재 선생님은 광양 출신으로 ‘호남 예약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며, 동복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는 초계 최씨의 중시조이다. 참고로 제가 초계 최가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