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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성적 순례-현진건
분야: 어문 > 수필 > 경수필/수필
저작자: 현진건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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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 ‘단군성적순례기’는 고우(故友) 빙허가 동아일보에서 조고(操觚)의 붓을 잡았을 때 억울한 일인(日人)정치 밑에서나마 뭉그러지려는 민족의 양심을 만분의 하나라도 구원해 내기 위해서 스스로 집필의 여가를 타서 험산 준령을 넘으며 장림(長霖) 탕수(蕩水)를 건너서 그 성적(聖跡)과 전설을 두루 밟아서 만천하 독자에게 호소했던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아득한 17년전 옛일이다.
이제는 일인도 가고 빙허도 없다.
이 글이 떳떳이 거리낌 없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을 빙허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와 나는 어려서부터 작란하던 글 동무였다. 그대는 가고 나만 살아서 이 세상에 영영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그대의 글이 다시 나옴을 보니 내 가슴은 사뭇 미어지는 듯하구나!
그대는 갔으나 그대의 문명(文名)은 이미 높다.
예문각에서 그대의 이글을 발간하는 뜻은 그대의 아름다운 문장을 전하려 함이 아니라 다만 혼돈된 이 세상에 그대의 정신을 전하려는 때문이라 한다.
빙허 사후에 이 글을 고이 보존했다가 해방 뒤에 그의 유족에게 원고를 넘겨준 남창 손진태 형의 고마운 우정을 친우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다.
단기 4281년 1월 7일
월탄 박 종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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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성적 순례]
- 발정(發程) 제일야
단기 4265년 7월 8일 단군 성적 순례의 길에 오르다.
경의선에 몸을 실리니 밤 10시 40분
묘막(渺邈)한 상하 반만년 동방 문화의 연원이시며, 생생화육(生生化育), 2천 3백만, 단족(檀族)의 영과 육의 모태이시며, 혹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5천여 리에 개지척지(開之拓之)하신 신공성적(神功聖蹟)을 남기셨으니, 이 광범한 문화권을 소고(溯考)하고 이 방대한 지역원을 봉심(奉審)하자면, 정말 까마득한 노릇이다. 1년은커녕, 10년은커녕, 일생을 두고 성과 열과 역을 경주하더래도 이 원념(願念)의 만분지일이나 아니 만만지일이나 달할까 말까.
그러하거늘, 공무와 속루(俗累)의 틈을 비기어 수주의 시일로, 분망한 여정에 몰려 할 수 있는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덮어놓고 발정하고 말았으니, 대담하다면 대담도 하려니와 경솔하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 믿는 바 있으니 그것은 성조께 대한 대작(大爵)과 신념이다. 한배님이 두호하시거니 단애에 수(手)를 철할 대용(大勇)도 기(起)치 말란 법 없으며, 왕검님이 받드시리니 절벽에 족(足) 인(印)할 영능(靈能)인들 생치 않으랴. 반체(胖體)와 둔족(鈍足)을 의구(疑懼)할 필요도 없거니와 불학과 무지에 주저할 연유도 없다.
현식(衒飾)과 사념을 버리자,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억측과 모색을 함부로 말자, 해심(孩心)으로 돌아가리라, 백지 같은 적자(赤子)의 마음으로 님의 앞에 서리라, 끼치신 일괴석(一塊石)과 일부토(一抔土)를 뵈올 적마다, 고동하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경건과 감격으로 묵시와 수교(垂敎)를 터득해 보리라, 촌맹야로(村氓野老)의 구비심서(口碑心書)로 옮겨 나려오는 소박하고 홍몽(鴻濛)한 전설이나마 그대로 새겨 유칙과 성훈과 또는 신앙심과 의지성(依支性)의 편린을 찾아보리라.
이렇게 마음을 정하니,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새벽녘에야 어느 결엔지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태양은 높이 솟아 우의(雨意) 실은 멍울멍울한 구름 사이에 숨바꼭질하면서 뜨거운 광선을 이따금 차창으로 들이친다. 좌우에 푸른 벌판이 훤하게 열림은 벌써 안주(安州) 평야에 들어선 모양이다.
이 백겁(百劫) 산하에 감회를 돋을 겨를도 없이 기차는 벌써 신안주(新安州)에 닿고 말았다.
9일 오전 8시
- 백겁산하(百劫山河) 밀성(密城)
차에서 나리매 지국장 김병량(金秉亮) 씨가 반가이 맞아준다. 향산(香山)행 자동차 편을 물으니 12시경에나 있다기로 지국에서 소게(小憩)하던 차에 사(社)로부터 전보가 나려왔다. 그것은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떠난 여구(旅具)를 부쳤으니 찾아 가란 전문이다.
즉시 역으로 알아보매 짐은 금일이나 명조에 도착할 듯.
1일 연기를 천추같이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에라, 이 기회에 안주읍이나 구경하리라 하여 지국장의 인도로 구안주읍으로 향하였다.
신안주역에서 경철을 타니 약 15리 거리에 30분이 걸린다.
안주의 고호는 식주(息州), 밀성(密城) 등으로 서방의 대읍이요, 변방의 요지다. 대륙의 풍운이 조선을 거치자면 먼저 압수(鴨水)를 지나고 의주(義州)를 넘어서면 수륙 병진으로 이 밀성을 지나치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엔 목사(牧使) 외에 대도호부를 두었고 공청(公廳)으로도 내아(內衙), 동헌(東軒) 등 각 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청(將士廳)이 따로 있으며 군기고(軍器庫), 쇄마고(刷馬庫)와 팔방(八防) 등, 군비가 자못 충실하여, 읍지에 의하면 군총장군(軍總壯軍) 4,996명, 납포군(納布軍) 4,475명, 방군(防軍) 575명 등 1만여 명이 상비해 있었다 한다. 성곽으로도 내성 외성이 위요(圍繞)되어 요새의 면목을 갖추었는데, 지금도 성지가 역연히 남아 있다.
남으로 백학산(白鶴山), 서로 기산(岐山), 동남으로 발본(鉢本) 등이 있으나 읍에서 50리 혹은 60리 멀리 떨어져 아득하게 운하(雲霞)에 잠기었고, 북으로 청천강을 밀면서 일망무제의 평원광야를 이루었으니, 백전산하(百戰山河)의 지리가 약여하다 할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백만 수병(隋兵)을 무찔러 세계전사상에 그 유례를 보지 못한 살수대첩을 얻은 지역이 저 아름인가 하니 감회가 자못 깊다.
역에서 읍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 허술한 고사(古寺)가 칠불사(七佛寺)라 한다. 배후로 급추(急追)하는 여군(麗軍)에 몰리어, 주저할 판에 난데없는 칠승(七僧)이 나타나 옷자락을 걷는 둥 마는 둥, 물 위를 사뿐사뿐 짓쳐 가매, 수병도 그 뒤를 따라 건너다가, 모조리 빠져 죽어 표시(漂屍)가 강에 가득히 차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던가. 이 영이(靈異)의 적(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칠불사를 세우고 칠석(七石)으로 칠승의 상(像)을 새겼다는 것이 이 칠불사의 유래다.
절 안으로 들어서니 법당도 거의 무너질 지경이요, 승당은 지붕 마루가 반 넘게 벗겨져 풍우를 며칠이나 폐(蔽)할지 말지. 법당 문을 열어 보니 탑상(榻床)에 일위 불(佛)만 쓸쓸히 앉으셨고, 정작 칠불은 간 곳 없다. 중을 보고 칠불의 유적을 물으니, 그런 것 다 없다고 고개를 흔들 뿐. 천년 옛일을 묻는 내가 부질없다. 사명(寺名) 남은 것만 다행이라 할까. 나는 다음과 같은 찬하 거사(餐霞居士) 최기남(崔基南)의 시를 읊으며 속절없이 발길을 돌렸다.
칠불건의섭수심(七佛褰衣涉水深)
수군수후위전침(隋軍隨後爲全沈)
구려원수금안개(句麗元帥今安在)
천재고암원객심(千載孤庵遠客尋)
- 백상루(百祥樓)
칠불사에서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광야가 우뚝한 소구(小丘)를 지은 지점에 익연(翼然)히 솟은 정자를 백상루(百祥樓)라 한다. 몇 층 돌층층대를 더듬어 누상에 오르니 난데없는 일진천풍(一陳淸風)이 옷소매를 스치며 축축히 땀 밴 흉금으로 상연(爽然)히 기어든다. 안계(眼界)는 끝없이 넓어지는데 한창 무성한 전곡(田穀)들이 벽파(碧波)인 양 굼실거리며 멀리멀리 운산의 기슭으로 사라진다.
옛날에는 청천강이 바루 이 누(樓) 발부리를 씻으며 흘러갔다 하나 이금(而今)엔 아득하게 서편으로 물러나, 점점의 청산을 널며 만폭(萬幅) 백련(白練)을 널어 놓은 듯 은색으로 번쩍인다. "금일양진처 석시위대하(今日揚塵處昔時爲大河)"는 글로만 보았더니 문자 그대로 실현된 곳이 이 곳이다. 산하도 변하거든 인사(人事)야 물어서 무엇 하리.
이 누에 오른 이로 창상번복(滄桑飜覆)에 일국루(一掬淚)를 아낄 이 그 몇몇이뇨?
이 누의 창건 연대는 미상하나 이 누의 경을 읊은 고려 충숙왕 시가 가장 유명하다.
淸川江上百上樓 _청천강상백상루
萬象森羅難易收 _만상삼라난이수
草偃長堤靑一面 _초언장제청일면
天低列峀碧千頭 _천저열수벽천두
錦屛影裏飛孤鶩 _금병영이비고목
玉鏡光中點小舟 _옥경광중점소주
未聞人間仙境在 _미문인간선경재
密城今日下瀛州 _밀성금일하영주
과연 절창이다. 이득한 운산의 금병(金甁) 속에 이 누는 정말 외로운 따오기처럼 나는 듯하다. 옛날의 ‘옥경(玉鏡)’이 시방은 푸른 들로 변하였을 망정 소주(小舟)를 점친 듯한 이 누의 형상만은 의구하다 하리라.
- 오도탄(誤渡灘)·골적도(骨積島)
누상에 소창(消暢)하고 있던 고로(古老)들이 원래(遠來)의 객을 위하여 고적(古蹟)을 설명해 준다. 저기 저 곳이 오도탄(誤渡灘)이요, 비루 그 위에 청천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류되며, 펀펀한 백사가 삼각형 섬을 지은 곳이 골적도(骨積島)라 한다. 오도탄은 수병(隋兵)이 멋모르고 칠불의 뒤를 따라 건너다가 전몰한 유역이요, 골적도라 함은 그 때 죽은 적병의 백골을 쌓아 두었다고 이름을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이따금 그 곳에서 작란하던 아이들이 도기류의 파편과 송곳 같은 시촉(矢鏃) 등을 얻어 기뻐한다는데, 속칭 ‘당장(唐葬)’이라 하여 무수한 무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던가. 그러면 그 무덤을 어느 편에서 묻었을까 하는 것이 고로들의 갑론을박하는 초점이요, 또 최대 관심처다. 추병(追兵)을 배후에 두고 전우를 묻어주고 갈 여유가 있었을까? 그러면 고구려 측에서 합장(合葬)의 노(勞)를 취하지나 않았을까? 아니다, 기구까지 넣어서 구수(仇讎)의 적병을 안장할 까닭이 없으리라, 물론(物論)은 이렇게 분분하다. 얼른 들으니 하일(夏日)이 장장하니 무용(無用)의 논의로 소일거리나 삼는 듯하지마는 기실은 거기 중대한 의의가 없지 않은 듯도 싶었다. 당시 고구려군의 기풍의 편린을 이 점에서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기록에 의지하면 당시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 등이 인솔한 구군(九軍) 만 30만 5천여 명이었는데 실수에서 참몰을 당하고, 혼불부체(魂不附體)로 안주에서 압강까지 450리를 일일야(一日夜)에 줄달음질하여 만사(萬死)에 일생(一生)을 얻은 자가 불과 3천이라 하였으니 하룻밤 사이에 450리를 달음박질할 급한 형세이거늘 어느 틈에 전우의 시체를 수습할 생의(生意)인들 할 것이냐. 그 때의 무덤이 지금도 남았다면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고구려 측에서 묻어준 것이 명약관화다. 전시엔 구적(仇敵)이로되 한 번 전투력을 잃고 거꾸러지면 다 같은 가련한 인류가 아니냐. 만리 이역에서 백일하에 시골(屍骨)을 폭(暴)하는 것을 볼 제 동정의 열루(熱漏)로 묻어 준 것이다.
의류와 소지품과 무기를 그대로 넣고, 튼튼하게 편안하게 묻어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 천년을 지난 오늘날까지 그 중총(衆塚)의 영자(影子)인들 남았겠으며, 기물의 일편인들 얻어볼 수 있으랴. 얼마나 고양된 기사도이며 관대한 금도(襟度)이냐. 나는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 을지공 석상(乙支公石像)
백상루에서 고로들의 지점(指點)하는 손가락을 따라. 을지공의 전적 남긴 유역(流域)과 지대를 안력(眼力) 닿는 대로 바라보고 보살피고 새삼스럽게 그 풍공위열(豐功偉烈)에 감격하며, 그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승리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도연(陶然)히 취해 버렸다.
아득한 천고에 상(想)이 치(馳)하고 흥(興)이 비(飛)하매, 새로운 용과 기가 유연(油然)히 용솟음함을 깨달았다. 과거의 위대하고 찬란한 광영 속에 심신이 현황(炫煌)하게 쌓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 번 누하(樓下)로 발음 옮겨 정문 들어오는 좌편에 을지공의 깨어진 석상과 석비를 보고, 무참한 현실에 나의 채홍(彩虹) 같은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석상은 현존한 대로 전체를 합하면 5척이 될까 말까, 투구와 머리를 새긴 듯한 돌은 두 조각으로 깨어져 동체 위에 올려 놓였고, 그 동체 밑 아랫두리는 끊어져 달아났다. 석면은 음각으로 갑주(甲胄)를 새긴 것이 지금도 완연하다. 그리고 바루 그 옆에 석비(石碑)의 파편이 있는데 너비(廣)는 2척, 높이(高)는 3척이나 남았을까.
발이 잠기는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석상과 석비 가까이 들어서서 그 비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문자를 줏어 보았다. 정면에 "高句麗大臣 乙[고구려대신 을]"하고, 그 밑은 떨어졌으며 우측면엔 "士林崔宗宅高鎭化金[사림최종댁고진화금]" 뿐이요, 좌측면엔 두 줄로 "山辰康益裕都有可李信[산장강익유도유사이신]─ . 翕別執事白楚伯康再賢養[흡별집사백초백강재현양]─."이라고 하였으며 후면은 그 사적을 기록한 모양으로 14행을 적었는데 역시 밑은 떨어져 없고 윗머리에 글자 남은 것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公箕城人諱文德乙支基氏高句麗嬰 _공기성인휘문덕을지기씨고구려영]□□□□
煬帝伐高公麗徵天下兵水陸俱盡 _양제벌고공려징천하병수륙구진]□□□□□
浪道拔遼東陷鴨綠軍聲大振建莫 _랑도발요동함압록군성대진건막]□□□□□
外設機變見隋軍有飢色欲疲之每戰 _외설기변견수군유기색욕피지매전]□□□□
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云止若 _궁지리전승공기고지족운지약]□□□□□□
半渡而縱兵急擊殺右屯將辛世雄 _반도이종병급격살우둔장신세웅]□□□□□
還至遼東惟二千七百人噫煬帝東伐 _환지요동유이천칠백인희양제동벌]□□□□
公殆無子遺其豊功偉烈可以亘字宙 _공태무자유기풍공위열가이긍자주]□□□□
東至今俎豆之薩之南岸有一片石 _동지금조두지살지남안유일편석]□□□□□
久風雨磨洗石己□矣一州土民莫不 _구풍우마세석기 의일주토민막부]□□□□
之意略記其實因爲之銘 _지의략기기실인위지명]
曰[왈]
薩水浮浮功冠大東石依依 _살수부부공관대동석의의]□□□□□□□□
崇禎紀元二百二十年乙未上澣 _숭정기원이백이십년을미상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해 보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냉정해 보았다. 그러나 연필 쥔 손이 떨리어 초(抄)하는 자(字)와 행(行)이 바루 잡히지 않음을 어찌하랴, 점점 비문은 흐리어 희미해지고 안광은 갈수록 몽롱해진다. 손바닥으로 비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주먹으로 눈을 닦기 그 몇 번이었던고. 끝끝내 열루 한 방울은 수첩에 떨어지고 말아, 흐린 글자가 더욱 흐리게 번진다.
이 석상은 본래 청천강 남안에 있던 것으로 이조에 들어와, 청천강 사우(祠宇)를 짓고 모셨던 것인데 중수를 게을리한 까닭으로 사우가 전복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이 석상마저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필경엔 파쇄(破碎)의 겁운(劫運)을 당하게 된 것이니, 몇 년 전에 서문 밖 용현리에서 매몰된 것을 파내어, 농업학교 교정 등으로 전전하다가 재작년에 다시 현재 백상루 아래로 이전된 것이라 한다.
- 곡(哭)! 을지 장군(乙支將軍)
석양은 기운다. 위인의 최후 모양으로 태양은 거룩한 숨을 모으며 뉘엿뉘엿 서천으로 그 광명체를 숨기고 만다. 시포(屍布)처럼 떠돌던 몇 조각 백운은 해 떨어진 자리로 슬금슬금 모여들어, 생채를 잃어버리고, 암연히 눈물을 지우는 듯. 문득 숭엄한 후광이 일어나며 그 붉은 광파(光波)가 용용(溶溶)히 흘러 일순간에 왼 우주를 적신다. 구름이란 구름은 모조리 산호처럼 타오르며 산하도 혈색이요, 초목도 혈색이다.
우리 을지 장군의 석상도 혈루에 젖은 듯!
나는 세 동강이로 무참하게 부서진 석상을 또 다시 어루만지며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열화와 같은 적기(積氣)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다가, 비애와 참괴에 지질린다. 웃어도 시원찮고 울어도 시원찮다 함은 이런 감정을 두고 이름이리라.
당시, 수 양제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의 세로 남정북벌에 소향무적(所向無敵)으로 지나(支那) 전토를 철환(鐵腕)하에 집어넣고 대고구려국과 자웅을 결하고자 천하의 병마를 모아, 에누리 없는 백만 대병을 들어 입구(入寇)하지 않았느냐. 승승장구한 그 맹장과 정병은 파죽의 세로 요동을 발(拔)하고 물밀 듯 짓쳐들어오니, 압수와 향산이 벌써 여국(麗國)의 유(有)가 아니었으며, 국도 평양의 위(危)함이 누란과 같았으니 만일 을지 장군이 없었던들, 당년 대고구려국이 멸망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조선 민족이 그때 벌써 어육(魚肉)이 되고 도탄에 빠져, 이 지구상에서 형(形)을 절(絶)하고, 영(影)을 잠(潛)하였을는지 모르리라. 사멸에서 흥륭으로 치욕에서 광영으로! 역사의 추축(樞軸)을 전환시킨 민족적 대은인이 그 누구이뇨!
빈말이라도 그에게 상관있는 것이면 일괴석, 일편목인들 어찌 소홀히 할 것이며 범연시할 것이냐. 금궤옥함(金櫃玉函)으로 귀중하게 간수하고 호각수사(護閣守祠)로 숭엄하게 모시어 후예 된 자 성의의 만분의 일이나마 표할 것이 아니냐.
와전(訛傳)이라 하더라도 공의 존상을 새겼다는 것이 파편으로 전전하는데 이르러서야 다시 무슨 말을 하랴!
그나 그뿐인가, 이 곳이 어디냐, 장군이 공전절후의 대승리를 얻어 천추에 병연(炳然)한 위공대훈을 세운 지역이 아니냐.
우리 단족(檀族)을 위(危)에서 안(安)하게 하고 망에서 흥하게 한 이 산, 이 강, 이 장소에서 장군의 석상은 안주의 곳을 잊지 못하고 구르고 구르다가 필경엔 수(首), 신(身) 지(肢)가 삼분되어 즐풍목우(櫛風沐雨)하고 있단 말이냐! 그 대조의 참(慘)이여, 기구한 겁운(劫運)이여!
낙조에 혈염(血染)된 석상은 안개 가린 누안(淚眼)에 셋도 되고 넷도 되고 다시 하나가 되어 어마어마하게 커지며 나를 꾸짖는 듯이 대지르기도 하고, 또는 산산이 부서져 가물가물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호통(號慟)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석양 속으로 발을 옮겼다.
- 충우(衝雨) 이백리(二百里)
10일, 조래(朝來)로 대우(大雨) 폭주(暴注), 폭풍까지 일어나 앉아 있는 방이 노도(怒濤)에 엽주(葉舟)처럼 흔들린다. 반자가 바람을 머금고 거대한 양서동물의 배때기처럼 불룩거리며, 이따금 처장(凄壯)한 함성을 지른다.
신안주에서 월림(月林)까지 자동차길로 2백리, 월림에서 묘향산 보현사까지 도보로 15리. 이 바람, 이 비에 어찌 발정을 하겠느냐고 여러 사람이 굳이 말린다. 초행에 위구(危懼)가 없지 않은데, 더구나 월림이란 곳은 인가 없는 강변이요, 그분들의 말짝으로 ‘무인절도’란 위협에 또 일일(一日)
연기.
창밖의 풍우성에 고달픈 객몽도 맺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새우니 7월 11일. 오후 12시 40분 모우(冒雨)하고 자동차에 몸을 맡기다.
여객 자동차란 몸뚱이는 턱없이 크면서 채신도 없이 까부는 물건이다. 더구나 수 주야의 호우로 군데군데 길이 괘인지라 마치 미친년 모양으로 춤까지 추어 제치니 배겨내는 장사가 없다. 머리는 천장에 대지르고 등어리는 안석에 미어진다.
떠날 임물에 흐지부지하던 비는 안주읍을 지나면서 억수로 또 따르기 시작한다. 운전대 앞창에 방울방울 구슬이 맺히며 줄줄이 흘러나리매, 운전수는 창 위에 장치한 쇠꼬챙이로 쥘부채를 펴듯이 물을 떨어뜨리기에 바쁘다. 나그네의 마음도 그 창경의 흐림을 따라 흐려진다. ‘초행’, ‘강변, ‘무인절도’! 아득한 앞길에 불안이 적지 않다. 간난(艱難)한 여정의 제일보를 내디딘 모양이다.
신작로 양평으로 사이 좋게 늘어선 ‘아카시아’ 나무가 그 줄기차게 뺃은 뿌리를 빼어들고 턱턱 가루 누웠으니 야래(夜來)의 풍우가 얼마나 사나웠던가를 짐작하겠다.
개천(价川)을 넘어서니 길은 청천강을 끼고 돈다. 강물은 흠씬 불었으되 이수(泥水)가 나지 않고 검푸른 수면이 때때로 흉용한 파도를 치며, 백만 수병(隋兵)을 통으로 삼킨 살수(薩水)의 옛 면목을 잃지 않은 듯. 강 가로 내친 잔 돌, 굵은 돌도 흉물스러운 암갈색을 띠었는데, 거뭇거뭇 흑점이 박히어, 마치 그 때의 혈흔이 새로운 것 같다. 음산하게 나리는 궂은비 소리 사이로, 추추(啾啾)한 귀곡성을 들은 상싶었다.
풍우는 조금 뜸해졌다. 수멸수멸하는 물결에 가는 빗발은 돈짝만한 무늬를 그리다가 잔잔한 거품을 지어 흰 꽃잎처럼 동실동실 떠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스러지고 만다.
곤곤장강동서수(滾滾長江東逝水)
낭화도진영웅(浪花淘盡英雄)
이런 시구가 불쑥 머리에 떠오르며 유구한 자연 앞에 인사의 무상함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구장(球場)에 이르매 나를 찾아 향산까지 들어갔다가,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영변지국장 차남두(車南斗) 씨를 만났다. 이떻게 반가운지! 인생 사희(四喜) 중에 ‘타향봉고인(他鄕逢故人)’을 넣은 것은 이런 해후를 두고 이름이리라.
오후 5시경, 월림에 도착. 청천강을 배로 건너, 15리 장정에 세우와 폭우를 번갈아 맞으며 우리는 걸었다. 향산 입구다. 청천강 상류, 향천강을 우편으로 끼고 들어간다. 외사항(外獅項), 내사항(內獅項)으로 들어서니 물은 더욱 맑아지고 돌은 더욱 희어지며 물가에 병풍같이 늘어진 층암(層巖)이 발채로 잡목이 울창한 군만(群巒)은 더욱 높고도 빼어난다.
나는 서투른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層岩[층암]이 屛風[병풍]이면
叢木[총목]은 丹靑[단청]인저
淸江[청강]은 明靑[명청]인제
白石[백석]은 玉膚[옥부]로다
方丈[방장]이 여긴 줄이야
더듬은들 모르리.
빈객(賓客)을 송영한다는 심진당(尋眞堂)으로 돌아드니 계곡은 더욱 심수(深秀)하고 유장해진다. 향천강 물은 백옥(白玉) 벽옥(碧玉)을 바수어 나리는 듯. 운해에 헤엄치듯이, 혹은 머리를 잃고 혹은 허리를 잃은 층층첩첩의 군봉들이 그 변화 자재(變化自在)의 위용을 홀현홀몰(忽顯忽沒)하니, 내 몸이 벌써 신역선경(神域仙境)에 들어선 줄 저절로 깨달았다. 배산(背山) 금강(襟江), 한 데로 활연히 열린 곳에 대소 범우(梵宇)가 즐비한 것은 물을 것 없이 묘향산의 주찰 대본산 보현사다.
향산 여관에 여장을 끄르니 11일 오후 6시 반.
- 묘향산(妙香山)의 윤곽(輪廓)
묘향산은 본명 태백산으로 백두산의 직계 정맥(正脈)이 동으로 침침(駸駸)히 달려와서 거대무비한 천간지비(天慳地秘)를 이룩하였으니 그 구역은 실로 압록강의 남에서 평양의 북까지 4백여 리에 방박웅반(磅礡雄盤)하여 그 위대한 흉금에 서부 조선을 완전히 포옹하고 말았다.
영변, 희천, 덕천, 개천, 순천, 강동, 자산, 안주, 숙천, 순안, 영유, 평양, 강서, 용강, 삼화, 함종, 증산 등 17읍이 계(界)를 여기서 분하였으며, 관서에 횡류하는 살수와 폐수의 양대 하류도 원(源)을 여기서 발하였다.
패수청천협류수백리(浿水淸川夾流數百理)
분작동서강(分作東西江)
이란 이공(李公) 시환(時桓)의 사(詞)와,
산재청천살수원(山在淸川薩水源)
웅반서색접천문(雄蟠西塞接天門)
이란 설암 대사(雪巖大師)의 시도 결코 과장이 아니요, 그 실(實)을 영(詠)한 것이다.
층만(層巒)과 중장(重嶂)이 부용의 화관 모양으로 차곡차곡이 맺히고 겹겹이 쌓이어 그야말로 운소(雲霄)에 ‘삭출(削出)’한 듯한 위관(偉觀)! 숭엄웅혼, 호장한 대로 수경(秀景)과 기취(奇趣)까지 묵철(默綴)하였으니 청허(淸虛 : 西山[서산]) 대사의 4명산 평에,
"금강수이부장(金剛秀而不壯),
지리장이불수(智異壯而不秀),
구월부장불수(九月不壯不秀),
묘향역장역수(妙香亦壯亦秀).“
란 절찬도 과예(過譽)가 아님을 알 것이다.
외산(外山)을 지나 한 번 내산(內山)으로 들어서면, 더욱 유현신비(幽玄神秘)한 경(境)이 열린다. 잡초와 잡목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초벽(峭壁)과 현애(懸崖)가 백설과 빛을 다투는데 무수한 향목이 밑으로 밑으로 취색(翠色)이 돋는 가지를 뺃은 양은, 일점 진(塵)도 허하지 않는다. 청허 대사로 하여금 "아미색계정여은(峨嵋色界正如銀)"이라 하였고, 운암 대사(雲岩大師)로 하여금,
경착황락천림후(更着黃落千林後)
향목청청설리흔(香木靑靑雪裡痕)
이라 함이 이 유리정토(琉璃淨土)의 색상을 만분지일에나 방불케 하였다. 할까,
이 산의 비로봉(최고봉의 뜻)은 해발 6천여 척으로 백두산 다음 가는 고봉의 옥좌를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의 수봉(秀峰)인 향로봉에 오르면, 동해와 가장 가까운 탓으로 새벽에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다.
홍 상서(洪尙書) 양호(良浩) 시에 "창해오경선견일(滄海五更先見日)"과, 임 장군(林將軍) 경업(慶業) 시에 "동림양곡운간일(東臨暘谷雲看日)"은 다 이 봉에 올라 장엄한 동해의 일출 광경을 읊은 것이다. 태산과 숭악(崇岳) 이 눈두렁으로 발아래 깔리고는 남명(南溟)과 북발(北渤)이 실개천처럼 눈밑에 기는데 망망한 청해에서 떠오로는 최초의 일광! 상상만 해도 장쾌하지 않으냐.
이 소기(小記)는 6분은 ‘향산이적(香山異蹟)’에서, 1분은 구전에서, 3분은 나의 실감에서 독자와 같이 향산의 개념이나 얻고자 적어본 것이다.
- 국진굴(國盡窟)과 천주석(天柱石)
12일 조조(早朝), 단군굴 근참(覲參)의 길에 오르다.
중봉(衆峰)은 구름 바다에 잠기고 계류(溪流)조차 안개자락에 흐리었음은 임우(霖雨)가 아직 쾌청을 않은 모양이다. 언제 호우가 천지를 뒤집을는지 모를 일이요, 앞길은 인적조차 끊어진 심산절벽이라, 우리의 준비도 대단하다. 폭우와 노영(露營)을 위한 캠프와 침구며, 솥, 냄비, 2일 양식과 의류 등 짐이 자못 부풀다. 인생이란 언제든지 중하(重荷)를 벗지 못하는가 하니 탄성이 절로 난다. 첫째 인도자가 문제다. 금일 행정(行程)은 단군굴, 만폭동, 금강굴인데 1년치고도 순례자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탓에 그 소삽한 길 ─ 의젓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용(山容)과 수태(水態)를 보아 그 방향을 더듬어 길을 만들어 가는 길 ─ 을 혼자 아노라고 장담하고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 1년 전에 혹은 수년 전에 한 번 다녀온 이로, 모르는 길과 아는 길을 서로 절장보단(折長補短)하기로 하고 인도승(引導僧) 두 분을 얻었다. 짐꾼이 셋이요, 나와 차 군을 합하면 일행 7인이다. 성지와 영역(靈域)에 제일보를 내디디는 위구(危懼)와 경건에 옷깃도 저절로 여며진다.
보현사를 뒤에 둔 지 2,3마장이 되었을까 말까, 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4,5인이 용신(容身)할 만한 입을 벌린 것을 국진굴이라 한다. 『영변읍진』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행인(荇人)이 태백 산하에 국(國)을 창하니 신라시조 혁거세와 병립이라. 고구려 동명왕 6년 기축(한 성제 홍가(鴻嘉) 3년)에 여장(麗將) 오이(烏伊)와 부분로(扶芬奴)가 내공(來攻)하니 행인왕(荇人王)이 대패하여 이 석굴 속에 은신하였다가 필경 생금(生擒)되었다는 곳이다.
여기도 흥망의 자최가 있구나, 하매 비 젖은 석면에 누흔(淚痕)애 새로운 듯하였다.
개울을 한 번 넘어 빈발암(賓鉢庵)에 (암자는 흔적도 없다) 오르니 천주석(天柱石)이 전용(全容)을 나타낸다. 탁기봉(卓旗峰) 중복에 그 이름과 같이 하늘을 고인 듯이 직립한 거암이 돌올(突兀)하게 2백여 척을 솟았다. 인도승 하나가 설명하기를,
"저 천주석은 단군굴에 올라서면 바루 정면으로 보이는데 그 때 단군님께옵서 굴에서 활을 쏘시면 그 화살은 10리 허(許)에 날라 저 바위를 맞히고, 여력으로 그 화살은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단군님께 날아왔답니다. 그러기에 단군님께서는 화살 하나로 무예를 강습하셨지요."
하고 자기가 눈으로 본 듯이 역력히 지점하며 자못 흥분한 태도다. 나는 그의 엄숙한 얼굴찌에서 이지(理智)를 초월한 불멸의 신앙광을 본 듯싶었다.
- 가(假) 단군굴(檀君窟)
빈봉(賓峰)에서부터 길다운 것은 끊어지고 밭 바닥으로 들어서서 무성한 콩과 조 이삭을 헤치며 한참 가노라면, 다시 개울가로 내닫는다. 너덜너덜한 돌과 모래와 군데군데 고인 물을 뛰고 건너고 발을 적시고 잠그고 하다가, 윗머리가 엇비슷하게 내밀은 바위를 만나니 그 석면에 "단군굴 입구"라고 묵흔(墨痕) 뚜렷한 5글자가 우리를 맞아준다. 얼마나 반가운지. 이것은 재작년 신안주지국장 김병량(金秉亮) 씨 일행이 순례하는 길에 뒤에 오는 이를 위하여 표지(標誌)로 남긴 것임을 미리 들어 알았다. 소삽한 이 길녘에 얼마나 유의 유조(有意有助)한가.
잡목 숲에 가린 급경사의 앞길을 바라보며 우리는 암상에서 소게(小憩)하였는데 그 때 인도승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빈봉의 동편으로 얼마쯤 꺾어 들어가면 직립한 큰 바위가 있고 그리 크지 않은 석굴이 있어, 속칭 가단군굴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 평안 감사나 영변 부사가 도임을 하면, 으레 체면치레로 단군굴을 근참하는 법인데 발과 손으로 기어 올라도 위험한 길을 남여(藍輿)를 타고 행차하는 바람에 죽어나는 이는 승려들이었다. 고지식하게 혈한(血汗)을 흘리다가 못하여 가깝고 편한 거기를 단군굴이라고 속여 배례를 시킨 까닭에 ‘가’자가 붙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당시 감사 모모들의 각자(刻字)가 뚜렷이 남아 있다던가. 학정 앞에는 허위와 휼사(譎詐)가 도리어 공도요 정의다. 근참의 기념 각자가 그 글자의 사라지기까지 후인의 조소와 후매(詬罵)를 입을 줄이야 그인들 뜻하였으랴.
실지로 답사를 해 보고도 싶었으나 여기에서 가자면 또 딴 일이요, 더구나 성스러운 이 길에 그런 것을 보는 것이 도리어 불결하다는 생각이 나서 앞길을 재촉하였다.
- 열철(熱鐵)에 냉수(冷水)
산록으로 들어서니 인제부터 오르막이다. 한 걸음마다 급해지고 한 자욱마다 촉해지는데, 길이란 형용도 없다. 초로(樵路)도 길이요 석경(石經)도 길이련만 이야말로 그대로 산을 타는 것이다. 인적부도처(人迹不到處)는 아니겠으되, 인적을 찾을 수는 없는 곳이다.
교목(喬木)과 거수(巨樹)는 볼 수 없고, 4,5년 혹은 6,7년생의 참나무, 전나무, 낙엽송 들이 땅이 비옥한 대로, 쭉쭉 곧게 올라가서 천일(天日)을 덮었는데 여러 해를 두고 떨어지고 썩고 한, 잎사귀가 작금의 장마에 젖을 대로 젖어서 미끄럽기가 완연히 빙판이다. 흙이란 별로 구경을 할 수가 없고 엽해(葉海)를 허위적거리고 발음 옮기는데, 한 자욱을 올려 놓으면 두 자욱씩 미끄러질 지경이다.
그나 그뿐인가 풀이 길을 넘는가. 한창 자란 억새풀 사리 떼가 얼굴을 할퀴고 잔등을 벗기고, 팔을 물고 늘어진다. 풀은 헤칠 수나 있지마는 더욱 질색할 것은 칡넝쿨, 머루넝쿨, 다래넝쿨이 허리를 휘감고 발목을 잡아 다리는 것이다. 이 나무, 이 풀, 이 넝쿨이 모조리 비를 흠씬 먹은 탓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빗발이 우수수 떨어진다. 옷은 물에나 빠진 듯.
이따금 계곡이 열리며 반공(半空)에 걸린 폭포가 군데군데 승경을 어루었으되 발을 올려 들이기에 전정신과 전신경을 집중한 탓으로 어느 결에 한눈을 팔 여가조차 없다. 중턱에나 왔을까 말았을 때 문득 우렁찬 뇌성이 천지를 뒤흔들며 번쩍이는 자전(紫電)이 안개에 흐린 봉만(峰巒)에 연련한 섬광을 던진다. 앞이 캄캄해지자 비는 은죽(銀竹)을 곤두세운 듯이 나리지른다.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산상에서 비 맞는 맛이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이 상연(爽然)한 맛, 통쾌한 맛을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턱에 닿던 마른 숨길도 축축이 젖고, 땀에 목욕한 불덩이 같은 몸도 시원하게 식는다. 내 몸에 김이 무럭무럭 난다. 열철에 냉수를 끼얹은 듯. 살과 뼈가 통으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르는 듯하다. 제발 안개나 되어 다오! 임 나신 자리로 날아오르리라.
- 을묘년(乙卯年) 대홍수
중턱을 넘어갈수록 수해(樹海)는 더욱 깊고 초림(草林)은 더욱 우거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미 쳇바퀴 돌 듯 산허리에 매달려 죽을 판 살판 기어오른 것인데, 인제부터 중복(中腹)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가는 양하여 천야만야한 현애(懸崖)가 눈 아래 아슬아슬하게 깔린다. 취우(驟雨)는 벌써 걷히고 하계의 무해(霧海)도 그 짙은 회색이 스르르 풀어지며 백색으로 옮겨 가는 듯하더니 어느 결에 올올이 경라(輕羅)로 나부끼며 슬금슬금 우리 발부리로 날아오른다. 우리는 운하(雲霞)를 밟는다. 능운보(凌雲步)의 선자(仙子)의 영능(靈能)도 이 신역에 들어서면 그리 어려운 노릇이 아닌 모양이다.
군데군데, 타원형의 동글갸름한 취엽(翠葉)과 청수(淸秀)한 간지(幹枝)를 가진 단목(檀木)을 발견하고 임의 편영을 뵈옵는 듯, 경건한 가운데로, 그 줄기를 쓰다듬으며 그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린 어린애 모양으로 나는 기뻐하였다. 여기저기 고목 등걸이 쓰러지고 동량의 재(材)가 훌륭한 만한 거수(巨樹)가 턱턱 넘어졌는데 가장 늙은 인도승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것이 모두 단목이요, 옛날에는 이 창울한 단목이 하늘을 덮었다 하오. 단목뿐이겠소? 이 거궁한 산에 백년, 천년 묵은 고목이 들어 쌓이지를 않았겠소? 그런데 을묘년 탕수(蕩水)에 이 결단이 났구려. 을묘년이면 18년 전이 되겠소 을묘년 탕수야말로 신이 진노한 탓이지요. 갑오년 난리에 이 근읍 백성들이 전부 이 산으로 피란을 했소. 호수로 천 호, 인수로는 만 명이 넘었겠소. 이 군정들이 산림에 불을 함부로 처지르고 논을 푼다 밭을 간다, 마구 벗겨 먹었구려. 단군봉이 여기인데, 닭을 삶는다, 개를 퇴한다, 갖은 부정한 짓을 다 했구려. 그래 천벌이 없겠소? 옛날에는 이 태백산에 오르자면 미리 기구를 준비했다가 대소변을 받아가지고, 멀리 나려가서 내버린 것이오. 그런 성지를 몰라보다니 글쎄 될 말이오? 갑오년에서 을묘년까지 한 20년 잘 해먹은 것도 하느님의 후덕이요 부처님의 자비지요. 산을 발가숭이를 맨들어 놓았으니 어찌 사태가 나지 않소. 집채만큼씩한 바위가 그대로 구을러 떨어지고, 폭포로 나리 지르는 물이 골마다 바다를 이루어, 순식간에 절이고 집이고, 다 떠나려 가고 말았소 사람도 수백 명 죽었지요. 에 ─ 참 천벌이란 무섭습디다."
우리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송연(悚然)하였다. 그 때 이 산을 주관하는 보현사와 백성들 사이에 20년 동안이나 분쟁이 그치지 않아, 여러 번 소요와 참극을 연출하였다 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