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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2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인간은 선물을 참 좋아합니다.
이 선물이 과하다 보면 뇌물이 되기도 합니다.
선물이든 뇌물이든 무엇이라도 받기를 원하는 자들 안에 나의 일그러진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진정한 선물은 하나님이 주기 원하시는 선물임을 나는 어찌 그리 잘 잊어버리는지요?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영생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토록 주기 원하시는 선물 중에 선물임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영위하며 누리는 영생을 오늘도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옵소서.
나의 옛 사람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주장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 하루도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6:60-71
제목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사릌스)은 무익하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1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갸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나의 묵상
예수께서는 26절부터 58절에 이르기까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음이 필요하며 그 믿음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임을 천명하셨다.
주님의 살과 피는 주님 자신이며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이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를 완전히 영생의 사람으로 살리실 것이다.
따라서 영생은 항상 현재성과 미래성이 공존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세도 조상들에게 만나를 준 것이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먹은 모든 조상들도 다 죽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을 위한 썩을 양식이며 참된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하시자 거기에 모여 있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투덜대는 것이다(60절).
예수께서 그들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대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말이 너희들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하셨다.
만약 그렇다면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 곧 창세전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너희가 어떻게 하겠느냐?(62절).
사실 62절의 말씀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완전한 문장이 아니다.
만일이라는 단어로 사용한 조건문만 있을 뿐 그에 따른 종속절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종속절을 유추하여 한글성경에서는 작은 글씨로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적어놓은 것이다.
(62절) 만일 인자가 이전에 있던 창세전의 세계 곧 아버지가 계시는 그 만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마도 이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올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면, 믿으면서 이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반응은 그 마음이 얼음장과 같아서 전혀 열리지 않고 지금까지 본 어떤 표적보다도 더 큰 표적인 창세전의 세계로 올라가는 표적을 보는데도 믿어지지 않으며 불신과 불평만 가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63절 말씀이다.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서 ‘살리는 것은 영’이란 말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란 말이다.
그리고 ‘육은 무익하다’는 말의 의미는 육은 세상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51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살(사릌스)이다.
따라서 육은 예수님의 살이며 이는 곧 말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익하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으로 깨달아지지 않는 말씀은 무익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영을 통해서 이 말씀이 깨달아질 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열두 제자들 역시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천방지축 자기들 뜻과 맘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면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파수꾼이 된 것이다.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시니까 들리지 않아서 어렵다고 한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 즉 아파트 이야기, 자식 이야기, 남편들 직장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을 하면 솔깃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듣는다.
그리고 설교가 재미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 영생, 아들의 생명, 삼위 하나님,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머리 아파한다.
그리고 반드시 나오는 반응이 우리 목사님 설교가 너무 어렵단다.
이는 그들의 관심사가 영원한 생명에 있지 않고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하늘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안 들리고 만물 안에 속한 이야기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 위의 이야기 곧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숫자가 늘어날 수가 없다.
오늘 예수님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어렵다고 다들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66절).
이들은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놓치고 만 안타까운 인생들이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유한한 인생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 중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신다.
누가 주님을 떠날 자인지, 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팔 자인지 말이다(64절).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한 말이 바로 그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하였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남은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간단 말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임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마귀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가룟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며 그가 열두 제자 중에서 예수님을 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신도로 교회를 섬기다가 늦깎이로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고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회를 하였다.
그런데 평신도일 때 내가 좋아하고 귀에 쏙쏙 들어왔던 설교는 세상의 예화를 적절하게 섞어서 재미있고 구수하게 하는 설교였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하고 나면 그날 예배는 대만족이었다.
은혜도 충만히 받은 것 같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은혜 충만할 때 목사가 되고자 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였다.
목사가 되고 개척을 하여 담임이 되고 난 후에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짜깁기 하여 설교를 하곤 하였다.
성도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우리 목사님 설교 아주 잘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거기에 고무되어서 더 많은 예화를 준비하고 더 많이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베껴가면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
복음을 들은 나는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이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런 행동임을 알았다.
말씀을 전할 때 전혀 성령에 조명을 받지도 않고 성령을 의지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니 내가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나니 내가 전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땅의 것이나,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하늘의 것, 만물 위의 말씀 곧 영생을 주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참 복음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설교 때마다 십자가 이야기는 들어갔지만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이제 복음을 알고 이 복음만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임을 알았기에 땅에 속한 것들을 배제하고 이제는 이 복음만 전하리라 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주구장창 오직 십자가복음, 장사복음, 부활복음을 전하였고 이 복음을 통해서만 아들의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어렵다고들 난리였다.
그러면서 교회가 사분오열되기 시작하였다.
많지도 않은 숫자인데 나는 바울파 나는 게바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그리스도파 하면서 나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자 나는 목회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목회를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나였다면 원사도로서 그 사명을 골백번도 더 포기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떠나갈 것을 아셨고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줄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계셨기에 그런 것에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임을 아셨기에...
그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나와 같은 연약한 죄인들, 온갖 죄로 얼룩진 죄인 중에 괴수들을 구원하고자 걸으셔야만 했던 십자가의 길임을 아셨던 것이다.
나는 말로는 그런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하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내가 왜 그런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해?” 하면서 “나는 꽃길만 걸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완강히 거부했던 것이다.
고통스럽고 답답할 때 하나님은 어찌 그리도 침묵하시는지...
하나님만 아니라 예수님 역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비난 앞에서 침묵하시고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유대인들에게도 전혀 반응하시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사형 언도를 내리는 빌라도 앞에서조차 침묵하셨던 우리 주님이 나는 그저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의 속마음을 다 쏟아냈는데, 우리 주님은 그저 묵묵히 십자가 위로 오르셨던 것이다.
도대체 왜?, 왜 우리 주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신 채 그저 붉은 피를 쏟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는가?
골고다 정상에서는 세상에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할 가장 높은 자리요 고통의 자리인 그 십자가를 말없이 오르셨단 말인가?
그것은 그 자리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는 자리요, 그것이 바로 복음을 성취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었음을 나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그저 지식과 관념으로만 알았을 뿐.....
이런 나를 주님의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는다.
그리고 이제 나도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하여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여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소유이다.
왕과 제사장으로서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을 전하고자 지금 먼 타국에 와 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인 줄 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나를 태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불에 뛰어들리라.
내가 갇혀 있는 상황적 무덤에 굴하지 않고 이는 나를 연단시켜 정결한 신부로 쓰고자 하시는 생명의 과정이기에 이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무덤을 경험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때에 주께서 당신의 생명으로 나를 일으키실 것이고 그런 나를 복음의 사도로 사용하실 것이다.
그 때를 위하여 지금 나는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훈련을 받는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 이 광야를 지난다.
홀로 걷는 것 같지만 결코 혼자가 아님은 내 곁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지쳐 쓰러질 때 나를 주님의 두 팔로 안기도 하시고 등에 업기도 하신다.
그런 내게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신다.
오직 주의 영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생의 말씀이 있는 자리에 주의 영도 함께 있어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은 분명한 진리임을 나는 믿는다.
나를 살려주신 주님께 이제 나를 드려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살아나 영생을 얻은 그들을 주님의 가슴에 아름다운 영혼의 꽃으로 달아드리길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목사가 되었어도 설교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여 남의 설교를 베끼기도 하고 사람들이 들어 은혜와 감동이 될 만한 예화를 찾아 헤매기도 하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설교 마치고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그 한 마디 듣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백만 번, 천만 번 한들 생명으로 나아가지 않나이다.
그저 나의 의만 높아갈 뿐, 나의 교만만 높이 쌓여갈 뿐, 자기주장의지로 나 자신이 죽는 것은 몰랐나이다.
이런 나에게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셨고 그 심판과 함께 은총의 빛을 주셨나이다.
심판은 의를 세우고 그 의를 통하여 생명이라는 은총이 임하였사오니 이제 내게 있는 이 생명, 아들의 생명을 놓칠 수가 없나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말씀에 비추어진 주의 영으로 가능하오니 언제나 나에게 그 영을 허락하시어 주의 말씀과 함께 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복음의 파수꾼이 되게 하소서.
내가 구할 것은 오직 주님의 얼굴이오니 마르고 황폐한 광야의 나라 베트남 땅을 성소삼아 내 영혼이 오직 주를 바라보나이다.
주의 얼굴만 구하오니 나를 외면하지 마소서.
나를 정결한 주의 신부로 삼아 날마다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시고 주님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