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임창용(29)이 약이 바짝 올랐나 보다. “지난 겨울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는데 올해 어떻게 명예회복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돌아온 대답이 영 시원찮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사람답게 던지다 보면 좋은 대접 받겠죠. 뭐”
2005시즌의 프로야구에는 사연 있는 선수들이 많다. 특히 지난 시즌의 부진, 혹은 지난 겨울의 돌출 행동 때문에 구단으로부터 단단히 ‘찍힌’ 선수들이 절치부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정규시즌을 기다려왔다. 야구 선수가 명예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성적으로 보여주는 게 최고다.
임창용은 지난 겨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은 뒤 미국과 일본 등 해외무대 진출을 노렸지만 우여곡절만 겪었다.
사실 일련의 사태는 임창용의 기를 꺾기 위한 삼성 프런트와 선동열 감독의 치밀한 작전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과적으로 삼성 복귀가 이뤄지는 시기에 임창용은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돼있었고, 순순히 백기투항을 하면서 삼성의 시나리오가 정확하게 가동된 셈이다. 이후 임창용이 전지훈련을 통해 훈련에 전념하고 독기를 품게 된 계기가 됐으니 삼성으로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원하게 코를 푼 셈이다.
시범경기를 통해 임창용은 직구의 공 끝이 좋아졌고, 세 방향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물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발투수로서 다승왕에 도전하고 싶은 게 임창용의 뜻이지만, 애초 마무리 요원으로 거론되던 권오준이 청백전서 오른 정강이에 타구를 맞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그러나 선동열 감독은 지난 2일 롯데와의 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임창용을 선발로 돌리고, 권오준에게 마무리를 맡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임창용은 ‘창용불패’ ‘애니콜’의 별명이 왜 생겼는지 그 이유를 다시 입증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왼쪽부터) LG 진필중 선수, 기아 마해영 선수, 삼성 임창용 선수.
서른 즈음의 선수들에겐 본래 일이 많은 법인가. 두산 김동주(29)도 지난 5개월간 거센 풍파에 시달렸다. 부인과 이혼한 뒤 위자료 등의 문제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던 김동주는 지난해 말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했다. 두산 중심타선의 중심이 돼야 할 대형타자가 갑자기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베어스 프런트가 골머리를 앓았다.
한참을 숨어 다닌 끝에 결국 두 손 들고 팀에 복귀해 삭발까지 한 김동주는 선수단 상조회장까지 맡으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3월29일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선 10kg이나 감량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썽 많이 피워 죄송하다. 우승으로 보답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LG 진필중(33)은 점잖고 사생활에서도 별다른 잡음이 없는 선수. 그러나 지난해 사상 최대의 ‘먹튀 선수’로 취급받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2004시즌을 앞두고 LG와 4년간 총액 30억원의, 당시로선 투수 최대 몸값을 받고 쌍둥이 마운드에 섰지만 이렇다 할 활약 한번 펼치지 못하고 2군을 전전했다.
지난 스프링캠프에서도 이순철 감독은 진필중에게 어떤 보직을 맡겨야할지를 놓고 끙끙 앓았다. 그러나 진필중은 막상 시범경기가 시작되자 두 차례 선발등판서 7이닝 동안 3안타 8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선발 한 자리를 당당하게 꿰찼다. ‘먹튀’ 오명을 씻을 것인는 한달 후면 결론이 난다.
또 다른 FA 출신 강타자 기아 마해영(35)은 광주에 살게 된 지 1년이 지났건만 광주팬의 사랑을 듬뿍 받는 타이거즈맨이 되진 못한 것 같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삼성에서 3시즌 연속으로 30홈런 이상을 터뜨렸던 그가 4년간 28억원을 받고 기아로 옮긴 지난해에는 겨우 11홈런에 그쳤다. 타율 2할8푼1리는 최근 7시즌 만에 최저 기록이었다. “나를 믿고 대우해주는 팀으로 가겠다”며 호기롭게 삼성에서 기아로 옮겼지만 호언장담한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셈이다.
얼마 전 대구구장에서 만난 기아 유남호 감독은 “올해는 해영이가 괜찮겠어. 저 살 뺀 것 좀 봐. 1월 초에 합동훈련 시작할 때 벌써 군살을 쏙 빼고 나왔더라구”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5kg 정도 살을 뺀 마해영은 지난해와 비교하면 다소 마른 듯한 체형으로 바뀌었지만 대신 악과 깡이 더해진 듯 보였다.
한화 정민철 선수(왼쪽), 롯데 이용훈 선수.
롯데 양상문 감독이 올시즌 팀 전력을 예상하는 자리에서 “올해는 엎어져도 4강에 든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었다. 4년 연속 최하위팀 치고는 강도가 센 발언이었다. 그러나 양 감독은 믿는 구석이 있다. 6년차 오른손 정통파투수 이용훈(28)이 선발 마운드의 한 축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용훈은 2000시즌 삼성에서 데뷔할 때부터 ‘불펜 최강’이란 불명예스런 호칭을 달고 살았다. 불펜에서 연습 피칭을 할 때에는 시속 150km 가까운 직구를 절묘하게 펑펑 꽂는다. 하지만 일단 경기상황으로 접어들고 실전 등판을 위해 파울라인을 건너가는 순간부터 ‘새가슴’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용훈은 데뷔 첫해인 2000년에 삼성 선발진에 포함됐었다. 신인 연봉 2천만원 외에도 1승당 1천만원씩의 인센티브가 걸려 있었는데, 그는 희한하게도 4회까지는 무실점으로 잘 막다가도 승리투수의 요건인 5회에만 접어들면 순식간에 무너지며 승수를 날리곤 했다.
그러나 올해 이용훈은 이 같은 불안한 모습을 싹 지운 것 같다. 지난 시범경기에선 3경기에 나가 13이닝 동안 3자책점을 기록하며 2.08의 수준급 방어율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13이닝 동안 탈삼진을 13개나 기록했다는 점이 한때 ‘새가슴’이었던 성격 개조에 성공했다는 걸 보여준다.
한화 정민철(33)과 현대 송지만(32)은 나란히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활약 때문에 지난해 감독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선수들이다. 한때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정민철은 지난해 무승 6패에 방어율 7.67로 무너졌고, 송지만은 외견상 성적보다는 4번 타순에만 갖다 놓으면 영양가 없는 방망이로 전락해버리는 바람에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번! 정민철은 한화의 2선발, 송지만은 현대 4번 타자로 올시즌을 치를 전망이다. 김인식 감독과 김재박 감독은 그들에게 백조가 될 기회를 다시 한번 준 셈이다.
2003년 현대에서 기아로 트레이드된 뒤 2시즌 동안 박재홍이 느낀 건 타이거즈와 자신의 컬러가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2004년이 끝난 뒤 구단측에 트레이드를 강력하게 요청했고, 결국 SK 유니폼을 입었다. 박재홍은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30(도루) 클럽’을 연 인물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지만 구도 인천에서 제2의 전성기를 일궈내겠다는 각오가 어느 때보다도 다부지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