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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4일(금)
* 시작 기도
(창 25:33-34)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주님...
이삭의 장자로 태어난 에서는 장자이면서도 그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히 12:23-24)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물론 이 땅에서의 장자권이 그대로 하늘에서도 장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비록 차자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그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팔아버렸기에 그는 그 나라에 대한 소망도 없이 들나귀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 종 역시 이 땅에서는 차자이지만 하늘에서는 장자의 모임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하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의 보혈로 지은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하소서.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7:14-24
제목 :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동생들에게는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으니 너희들 먼저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신 주님은 그 후에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 때는 초막절이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적의(敵意)를 가지고 예수를 찾고 있었고 많은 무리들은 예수가 좋은 사람이다 또는 아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고 하면서 편이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 무리들은 수군거렸지만 큰 소리로 하지 못하는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들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한편 명절의 절반이 지날 무렵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이를 보고 유대인들(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놀란 것은 이 사람이 학문적인 배경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글을 알고 잘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글을 아느냐?’는 말은 헬라어로 ‘그람마타 오이덴’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고등한 학문, 곧 전문적 식견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람마타’는 글자, 문서, 책 등을 뜻하는 ‘그람마’의 복수형으로 ‘기초적 지식’을 뜻하기도 하지만 본절처럼 ‘고등한 학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글을 배우지 않았는데 글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랍비들과 같이 성경의 학문적 내용에 대한 정통한 가르침에 놀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은 자기들보다 더 유명하고 고명한 랍비들의 가르침과 말들을 인용하여 가르쳤었다.
반면 예수님은 그 랍비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권위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로 그 말씀을 풀어서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의 깊이와 높이 그리고 가르침의 폭이 그 누구의 가르침과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랍비들조차 깨닫지 못한 것들까지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해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마치자 많은 무리들의 반응이 이랬다.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한편 오늘 본문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지만,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진실되므로 그 속에 결코 불의가 있을 수 없다.
모세가 너희들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 중에 모세가 준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가 없다.
만약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면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무리들은 예수님더러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아니, 도대체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 왈,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였을 때 너희가 다 그것으로 인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느냐?
여기서 ‘한 가지 일’이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은 안식일에 그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일을 말한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이나 그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한 그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이상한 자로 여겨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모세가 너희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지만,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부터 난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이 그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지 않느냐?
이처럼 그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한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율법을 위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냐?
하물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건강하게 고쳐준 것으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너희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여라.
유대 종교지도자들만 아니라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모로 판단하고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평가한다.
오늘 본문에서만 봐도 예수님은 분명 어느 유명한 랍비에게서 배운 적도 없고 학문적 배경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무식한 자여야 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글을 알고 잘 가르칠 수 있지?’ 판단했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고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논리를 반박하셨다.
오늘날 역시 교회를 섬길 목사들을 청빙하는 과정 역시 철저하게 외적인 스펙으로 결정하지 않는가?
더 많이 배우고 기왕이면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게다가 같은 박사학위라도 외국에서 받아온 학위를 더 인정해주고, 신학교에서는 공부를 남들보다 더 잘한 사람 그리고 큰 교회에서 섬겼던 사람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제출하라는 서류를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졸업증명서, 최종학위증명서, 성적증명서, 부부 건강진단서, 경력증명서, 추천서(교단이나 교계에 유명한 목사님이 추천해 주는 경우 더 많은 가산점이 붙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언젠가 부목사를 청빙하는 광고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큰 이력이 되며 큰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화려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가?
교회의 본질을 알고 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것은 정말 생각해 볼 일이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한다.
(16-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곧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말씀으로 태어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처럼 말씀으로 태어나신 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과 아들로부터 나오신 영, 곧 성령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신다.
오직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자 또한 아들의 영으로서 철저하게 혼자 스스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뜻대로 일하신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렇게 유기적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자기부인의 관계속에서 거하셨다.
이를 내재적 삼위일체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과 명령에 복종하셨다.
(요 15:10a)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거나 하는 일을 하셨다.
이처럼 사역은 당신이 하시지만 오직 영광은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맹인을 고쳐주신다.
(눅 18:42-43)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이처럼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지만 자신은 항상 아버지 품에 계시기 때문에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만 드러나신다.
그로 인하여 눈을 뜬 맹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를 본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셨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이런 복종을 받으시지만 그 복종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하신다.
그로 인하여 아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다(요 5:26).
이처럼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에 영광이 나타나는데 이를 가리켜 ‘본질의 계시 또는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한다.
성령 하나님은 아예 자신의 이름조차 없으시며 절대로 자기 스스로 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뜻대로 일하신다.
성령이라고 하는 이름은 번역하시는 분들이 지은 이름이고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이름은 원어로 그냥 ‘영’이다.
이는 헬라어로 ‘프뉴마’,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영, 숨,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 영은 그래서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 아들의 영으로 불린다.
삼위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서로 자기부인을 하시면서 창세전 약속인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 영생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일컬어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한다.
경륜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을 구원해 가시는 구원전략을 의미한다.
그 구원전략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보내신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죽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믿는 자, 곧 그와 연합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삼위 하나님도 이렇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시면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시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두 말 해 무엇하랴?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과 분리 되었다.
그 안에 있는 아담의 본성인 옛 사람의 궤계로 인하여 늘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 곧 자기의 義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는 곧 자기자신을 주장하는 자기 義이며 또한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중의 교만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치자.
하지만 오늘 나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기부인이 되지 않는다.
이는 이 땅 곧 만물 안에서 자기부인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로는 어떤 경우도 이런 자기부인이 될 수가 없다.
자기부인은 오직 삼위 하나님의 연합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안으로 들어가 나는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리가 곧 현재로 누리는 영생의 자리다.
비록 두 발을 이 땅에 딛고 살아가는 육신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삼위 하나님이 계시는 그 창세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말씀과 영으로 가능하다.
나는 오늘도 그 자리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한다.
나는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기를 바란다.
지금 나 자신을 드러낼 만한 그 무엇도 없다.
오직 나는 광야에 홀로 서 있는 헛됨이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붙드시고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셨으니 이것이 은혜요 주님의 가없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알아주시니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나 같이 쓸모없는 자를 당신의 자녀삼아주시고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심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다.
나는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행동하심에 복종하여 내게 주신 상황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오직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나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정말 헛됨이요 재와 티끌(아벨의 뜻) 같은 존재인 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셋이 낳은 아들 에노스의 뜻)인 나를 바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으나 그런 내가 나 자신을 믿고 나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고백하나이다.
그 자신감이 크면 클수록 나의 믿음이 크다고 오해하였던 자입니다.
무엇을 이루면 나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인 줄 알고 살아왔나이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진짜 에노스임을 알 때 비로소 주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 나 또한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은 죽고 오직 우리 주님만 드러나는 그 영광에, 주님은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오니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나는 주님의 소유(써굴라)입니다.
나를 주님의 뜻대로 써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