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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17년간 정혼했었던 영찬과 율의 파혼은 두 가문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내인 영찬과는 달리 율은 이후로 그 어떤 가문에서도 받아주질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영찬이기에, 설사 율이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준 것을 알고 있더라도 이 혼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둘러 자리를 뜨는 영찬을 보며 이 도 역시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영찬은 그녀가 갈만한 곳, 아니 그녀가 간 곳으로 말머리를 잡았다. 그리움이 어떤 것이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그녀를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하루에도 무수히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되뇌이는 자신처럼, 그녀 역시 하루빨리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영찬이 주술의 숲 입구에 다달았을 때는 희미하게 먼 동이 트고 있었다. 숲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가 이제 막 밝아오는 여명 아래 흩어져 조금씩 사물의 형체를 뱉어내고 있었다. 영찬은 안개를 헤집으며 천천히 말을 몰아 숲 안 깊숙이로 들어갔다. 이전에 부장을 잃어버렸을 때도 영찬은 그녀를 찾아 이 숲으로 왔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또 다시 부장을 찾으려 이 곳으로 달려왔다. 처음 부장이 바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아이를 태우고 부장을 찾기위해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왔던 그 때가 떠올랐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눈도 못 뜬 채 말갈기를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러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서툴기만 한 그녀의 손에 고삐를 쥐어주며 보냈었던 그 마지막 모습도 떠오른다.
"그때 그렇게 보내는게 아니었는데......"
영찬은 아직도 그때 율을 보낸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아마도 그는 평생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 할 것이다. 그때, 그녀를 그렇게 보내버린 자신을 원망하면서......
영찬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곧 날이 밝아올 것이고, 그럼 식이 시작 될 것이다. 그 전에 부장을 찾아 돌아가야만 한다. 영찬은 그 전에 율과 함께 부장을 찾아왔던 곳을 찾아냈다. 휘어진 나무그루터기를 발견했지만 부장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혹, 부장이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주위를 살피던 영찬의 귀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역시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이런 시각에 이 주술의 숲에 있을 사람은 부장뿐이라는 생각에 말에서 내린 영찬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않아 영찬의 귀에 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뚜렷하게 들려왔다.
"야아~ 너 나 알잖아. 나 기억 안나? 부탁인데 나 한번만 태워줘라. 응?"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따라 온 영찬은 말의 고삐를 쥐고 실갱이를 벌이는 그녀를 찾아냈다. 율의 모습을 확인한 영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결국 이곳에서 그녀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영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영찬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말고삐를 쥐고 실갱이를 벌이는 율은 그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그 사이 감이 많이 떨어졌구나. 이처럼 가까이 다가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말고삐를 쥐고 말과 실갱이를 벌이는 율의 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3살때부터 말을 타 온 부장인데, 게다가 저 말은 항상 부장과 함께 움직이던 그녀의 애마인데, 말고삐를 쥐고 쩔쩔매는 모양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야아~ 한번만 봐 줘라. 내가 돌아가면 맛있는 당근 줄께. 아니다! 너 각설탕 좋아하지? 내가 각설탕.......아니다. 여긴 각설탕이 없지. 야!! 너 내 말 안들으면 확 된장 발라버린다!!"
자꾸만 뒷걸음질 치며 등에 태우기를 거부하는 말을 향해 어르고 달래던 그녀가 결국엔 꽥 소리지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찬의 표정이 멍하니 굳어져 있다. 고삐를 잡고선 고함을 질렀다, 애원을 했다, 쩔쩔매고 있는 저 모습은.......부장이 아니다!!
'그 아이다!'
영찬은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너무도 그리운 나머지 허상을 보는 것은 아닌지, 혹은 숲의 주술로 인해 헛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해 본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도, 머리를 흔들고도 그대로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그다.
"유....율아...."
영찬은 소리내어 그녀를 부르면 허상이 되어 사라져버릴것만 같아 겁이 났다. 용기내어 나즈막이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하지만 말을 타기위해 실갱이를 벌이고 있던 율은 그의 잠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말고삐를 붙잡고 말과 실갱이를 벌이는 그녀는 말에 올라타기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영찬은 한발자국 다가섰다.
"율....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조금 목소리를 높여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어떡하든 말을 타 보려고 고삐를 쥔채 실갱이를 벌이고 있던 율이 휙하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그의 목소리를 들었나보다. 율은 자욱히 깔린 안개 속에 서 있는 영찬을 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그 모습 그대로, 꿈 속에서조차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모습 그대로, 그가 서 있었다.
"대장....대장!!!!"
영찬을 확인한 율은 말고삐를 팽개치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덥썩 그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그리웠던 그의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땀냄새, 가죽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정말 보고 싶었다. 친구에게 미친년이란 소리도 들으면서까지도 보고 싶었던 그, 저쪽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만큼 그리웠던 그다. 무덤을 향해 차를 몰았던 지난 밤, 이 곳에 도착해서 어두운 숲길을 홀로 헤매어 찾아야만 했던 그 무덤 앞에서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 율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절망에 휩싸여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을때 느꼈던 반가움이란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자신을 향해 달려와 껴안는 율을 보면서도, 자신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그녀를 보면서도 영찬은 믿기지 않는 얼굴이다. 환영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그녀가 달려와 자신의 허리를 부둥켜 안을 때도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냄새를 맡는 그녀를 보며,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음짓는 그녀를 보며 영찬은 몇번이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의 눈빛을 확인해야만 했다. 혹여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너무도 보고픈 부장의 모습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던 그였지만 이렇듯 앞,뒤 가리지 않고 사내의 품에 뛰어들수있는 여인은 상나라 전체를 통틀어 오직 이 아이 뿐일 것이다. 영찬은 그제서야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율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겨지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된 것이냐? 정말 돌아온 것이더냐?"
"응!! 나 돌아 왔어요."
기쁜 듯 환하게 웃음 띈 얼굴, 버릇없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영찬은 율을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그 때, 그렇게 그녀를 놓쳐버린 후, 평생 가슴에 후회를 담아두고 살아 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처럼 두 팔로 다시 그녀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나, 잘 돌아왔죠?"
"그래.......잘 돌아왔다. 돌아와줘서......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보고 싶었어요. 많이."
"그래, 나도 보고싶었다. 눈이 짓무러질만큼 보고 싶었다."
"걔도 잘 갔어요."
"응?"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며 의아했던 영찬은 곧 그녀가 말하는 이가 부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곳으로 율을 보내며 그녀 역시 마음을 두고 온 그 곳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부장이 떠났다는 말에 영찬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마지막 인사도 전하지 못하였는데, 이 곳으로 돌아온 뒤에도 내내 고생만 시키고, 잘해주지도 못하였는데, 더구나 그 마음에 상처만 준 것같아 그것이 영찬은 마음에 걸렸다. 표정이 굳어지는 그를 보자 율은 혹시 하는 마음에 덩달아 표정이 굳어졌다.
"왜요? 걔 가면 안돼요?"
"아...........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구나. 행복하라는 말도 해주고 싶었는데, 마지막 인사조차 전하지 못한 채로 떠났다니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아~ 그거라면 내가 전해줄께요."
"전할 방법이 있느냐? 혹여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얼마나 힘들게 여기 온 건데. 그래도 대장의 말은 내가 다 전해줄거예요. 걔가 그 곳에서 잘 살 수 있도록, 다신 이 곳으로 돌아 올 생각 따위는 하지 않도록!!"
영찬은 어찌 전해준다는 것인지 생글거리며 웃는 그녀가 영 미덥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지금은 그 말을 믿어보려한다. 그리고 여전히 웃고 있는 율의 얼굴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쓰다듬고서는 끌어안았다.
"이렇게 다시 너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를 다시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질 않는구나. 다시는....다시는 그리 허망하게 너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나도 그렇게 마음 아픈 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율은 그의 품에 안겼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그의 냄새를 맡으며......정말 보고 싶었었는데, 다른 여자와 결혼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었는데.........
"참!!!! 결혼 했어요?"
"응?"
"그러니깐 혼례.......혼례식 치뤘어요?"
"아니, 아직.........혼례날이 오늘이기는 한데, 아직 식을 치루진 않았다."
"됐어요. 그럼 빨리 가요."
"어딜 말이냐?"
"어디긴 어디에요? 혼례식에 늦으면 안되잖아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가도 된다."
"안되요. 신부 화장하려면 빨리 가야되요. 평생 한 번 뿐인 결혼식인데, 예쁘게 보여야지. 빨리 가요."
율은 영찬의 팔을 잡아당기며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율을 보던 영찬이 번쩍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아 말등 위에 올려놓는다. 각자 말을 타면 편하겠지만, 지금은 그녀를 혼자 태워보내고 싶지가 않다. 영찬은 율의 말고삐를 말 안장에 묶었다. 그리고 몸을 날려 율의 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율을 감싸안은 영찬은 고삐를 당겨 말을 몰았다. 고개를 돌려 말이 잘 따라오는지를 확인하던 영찬이 문득 생각난 듯 율에게 물었다
"헌데 율아, 아까 그게 무슨 말이더냐?"
"뭐요?"
"아까 저 말에게 된장을 바른다 하지 않았더냐? 그게 무슨 말이냐?"
"아~ 그건......그냥 한 말이에요. 대장은 말해줘도 몰라요."
"그 전에도 그러더니.....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을 해다오.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뭐든 다 알고 싶고 배우고 싶구나."
"정말이예요? 내가 시키는데로 다 배울거예요?"
"그러마."
"그럼........우선 I LOVE YOU!"
"응?"
"따라 해봐요. I LOVE YOU!"
"아이.......무슨 뜻이냐?"
"무슨 뜻이냐면.......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 사랑."
" I WANT YOU!"
"응? 그건 또 무슨 뜻이냐?"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이렇게.......이젠 내꺼야."
율은 덥썩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싫지가 않다. 율은 슬며시 미소짓는 영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턱선을 따라 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그리워했었는데........다시는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율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영찬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선 입을 맞추었다. 결코 다시는 자신의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 맹세하며.......
정환이 무덤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땐 동이 트고 있었다. 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동네는 이른 새벽 축축한 물 안개가 자욱하니 퍼져 있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던 정환은 서둘러 율을 찾았다. 안개가 품은 습기로 인해 축축하니 옷이 젖어왔지만 게의치 않는다. 정환은 지난번과는 달리 등산로를 가로막고 있던 출입금지 팻말이 치워지고 없는 것을 보았다. 다만 무덤이 있는 쪽으로 난 숲은 여전히 노란 띠가 매어진채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다. 새벽 이른 시간인지라 붙잡고 물어볼 사람조차 찾을수 없었던 정환은 그저 무덤 입구를 향해 뛰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쯤이었던거 같은데....."
무덤의 입구쯤이라 생각되는 곳에 다달았지만 정환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무덤까지 연결되어 있던 빨간 줄을 찾지못했다. 여기저기 근처를 헤매보았지만, 무덤의 입구로 보이는 곳은 역시 처음의 그 장소였다. 얼마 전, 지은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만해도 빨간 줄은 나무에 매여져 무덤까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 지금은 묶어 놓은 빨간줄이 보이지 않는건지 알 수가 없다. 자칫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쉽상이란 동네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떡하지? 왜 줄을 걷어버린 거지? 며칠 전에 왔을 때만 해도 분명히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무덤과 연결된 빨간줄을 찾지못한 정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은 노란 줄을 넘어가려 하였다. 그때 정환의 귀에 '키릉, 키릉.....' 잔뜩 습기 먹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소리? 혹시 율인가?"
'키릉, 키릉.....'
여전히 시동이 걸리지 않는지 몇번이고 반복되는 소리는 정환이 차를 발견하고 가까이 갈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정환은 등산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공터 근처에 서 있는 율의 차를 발견했다. 산장 근처 주차장에 세워놓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어두워 주차장을 찾지 못하고 근처 공터에 아무렇게나 세웠나보다 생각한 정환은 운전석에 앉아 열심히 시동을 걸려 애를 쓰는 율의 모습을 보았다.
"휴우~ 결국.....가지 못했구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율을 보며 실망스러움을 감출수 없었던 정환은 깊은 한숨과 함께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말도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내심 희망을 품었었나보다. 정환은 실망하는 자신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이러는 자신이 율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운전석쪽으로 다가간 정환은 차 안에서 중얼거리는 율의 목소리에 창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열쇠를 꽂은후, 왼쪽발로 브....리크를 밟고......열쇠를 돌리면....헉!!!"
키릉거리는 엔진 소리에 놀라며 얼른 핸들에서 손을 떼는 율을 정환은 한동안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핸들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보던 정환의 얼굴엔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젖으며 서 있던 정환은 조심스럽게 차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율과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그녀의 얼굴........그리고 이내 안심했다는듯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입술.......천천히 차 문을 열고 내리는 그녀의 모습.........그녀가 돌아왔다.
"내가.........지금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어? 그.........그럼........."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어떻게..........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미소를 본 정환은 그제서야 그녀가 돌아온 것을 실감이라도 한듯 덥썩 율을 끌어안았다. 율은 갑작스런 정환의 행동에 놀라 흠짓했지만 이내 그가 하는데로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온기 느껴지며 그동안의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 하다. 율은 조용히 그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다시는..........다시는 못 볼줄 알았어. 다시는 니 얼굴을 못 보고 죽을 줄 알았어."
"그 분 역시 저와 같은 모습인데 어찌 얼굴을 못보신다 하십니까?"
"달라. 율이와는 달라. 같은 얼굴, 같은 모습의 율이 옆에 있어도 나는......니가 보고 싶었어."
"......."
수줍은 듯 고개 숙이는 그녀를 보던 정환은 조용히 그녀의 눈을 찾아 시선을 맞추었다. 다시는, 살아서는 다시 못 볼 줄 알았었는데 이렇게 눈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이렇게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정환은 수줍은듯 미소짓는 눈을 보며 입을 맞추었다. 너무도 반갑고, 너무도 놀라워서 성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흠짓 했지만 율은 놀라지 않았다. 일전에......그에게서 반지를 받던 그 날, 그는 지금처럼 똑같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와 달리 성급함이 묻어나긴 하지만 그녀는 그의 입맞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죄송합니다. 폐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왔습니다."
"그런 말 하지마. 너 가버리고 난 후에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이 곳에서 사고만 치고, 쓸모 없는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그곳에 가서야 깨달았습니다. 이곳에 마음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아니야. 니가 마음을 두고 간 게 아니라, 네 마음을 가지고 가버린거야."
"정환님........"
"거긴 참 이상한 곳인가 봐. 사람 마음을 다 훔쳐가 버리는게, 내 마음도 너 따라 그곳으로 가버렸는데, 율이도......... 그 얘도 그 쪽에 마음을 두고 온 것 같았어."
"그 분........그 분께서는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율이 말야? 율이가 그 곳으로 갔어?"
"네."
"그래.......... 아마 마음을 찾으려 갔나보다. 잘 찾았으면 좋겠는데........."
"네. 헌데 이것은 어찌해야하는지....."
율이 낡은 자동차 열쇠를 정환의 손에 건네주었다. 정환은 율이 건네준 차 열쇠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율에게 사준 차 열쇠가 분명한 듯 한데, 어찌된 것인지 열쇠의 손잡이 부분이 다 낡아 떨어지고 없었다. 열쇠 부분 역시 몹시 삭아있었다.
"차 키가 왜 이 모양이 됐지? 이거 이 차 키 맞아?"
"그 분이 제게 남기셨습니다."
"남기다니, 차 키를 남겼단 말야?"
어리둥절해하는 정환을 보던 율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놓여진 가방을 꺼내보였다. 가방을 받아든 정환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않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그녀가 건넨 가방을 찬찬히 살피던 정환은 왠지 눈에 익은 가방에 문득 율이 떠올랐다.
"이거.......이거 어디서 났어?"
"그 분이 제게 남기신 것입니다. 이 속에 이 곳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율이를 만났던 거야?"
"그 무덤, 두 분이 잠드신 곳입니다."
"응?"
"두 분, 오래도록 함께 하셨고, 그 곳에 함께 잠들어 계십니다."
"무덤.....하지만 거기 비석에 니 이름이 있었는데.......붓 율( 韓 聿)이 아니라 법 율(律)이 적혀 있는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제게 남기신 것이라니깐요. 이 곳에서 상나라 글자를 아는 이는 저 뿐 입니다. 해서 그 비석을 읽을 수 있는 이 역시 저뿐 입니다."
"하지만......."
정환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비문에 적힌 글이 율에게 남긴 글이라니, 그녀에게 그 글이 전해질 걸 어떻게 알고 그런 글을 남겼단 말인지, 지금에야 그 비문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율이뿐이지만, 그때는 얼마든지.........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도 이 곳은 사람들이 출입을 꺼리는 곳이었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것을 전해주기 위해 그 곳을 두 분의 안식처로 정하신 듯 합니다."
"그럼 이 물건들을 전해주려고 여기에......"
"그리 적어놓았습니다. 비석 밑에 이 곳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관해 놓았다고, 찾아가라고."
정환은 놀란 표정으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의 지퍼며 끈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며 부식되고 색이 바랬다. 하지만 아직 그 형태는 고스란히 남아 분명 율의 가방이라는 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정환은 부식이 된 낡은 청바지와 검은 후드티에 싸여있는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것 같은 옷들을 걷어내자 비닐로 만들어진 지퍼백이 나왔다. 그때 치솔이며 율의 소지품을 넣어두었던 그것이었다. 정환은 지퍼백 속에서 그녀의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찾아냈다. 이어 핸드폰과 다이어리, 그리고 두 권의 서책이 모습을 들어냈다.
"비석 밑에 함이 묻혀져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열쇠도 함께...."
"신분증이.....신분증이 필요하다는 걸 율이가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이 핸드폰도.......하긴 상나라 유물에 핸드폰이 웬말이니. 게다가 청바지와 후드티라니........근데 이건 뭐지?"
정환은 비닐에 꽁꽁 싸여있던 가죽으로 묶어진 두 권의 책을 펼쳐들었다. 그 곳에 상나라를 배경으로 한 율의 소설이 들어있었다. 아니 상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옮겨 적은 것이었다.
"자식.......계약도 잊지 않았네."
"계약이라면........"
"아니, 그 일은 해결됐어. 그거 말고 율이 우리 출판사와 계약한 게 있는데, 그걸 잊지않고 있었어."
"그럼, 더이상 저로 인해 곤란해지는 일은 없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럴거 같아. 그리고 대장이라는 사람이 너한테 전해달래. 미안했다고, 그 곳에서 행복하라고......"
"대장이....."
잠시 머뭇거리던 율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행복했다고 했다. 그 비문에 두 분은 행복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함께 그 곳에 잠들었다 했다. 그러니 그녀 역시 이곳에서 행복해도 될 것이다. 멀고 먼 하늘 끝자락과 땅의 모퉁이에서 돌고 돌아 이곳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을 만났으니 이젠 행복할 것이다. 정환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잡은 손을 놓지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근데, 목걸이 어떻게 했어? 아까보니깐 없는 거 같던데....."
"그 곳에 두었습니다. 그 함 속에."
"그러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발견하면 어쩌려구?"
"그 곳으로 가는 길, 다시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빙그레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정환은 자신이 그 빨간줄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수 있었다. 그 곳에서 나오기 전 율은 세상과 연결되어있던 붉은 줄을 걷어냈다. 이제 그들이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야만하는 이유는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서 행복을 찾은 것과 같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정환의 얼굴을 보며 율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율의 미소에 덩달아 미소로 답을 한 정환은 그녀 몰래 한숨을 내뱉는다. 달리는 차속에서 편안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정환은 망설이고 있었다.
'어쩌지? 얘는 끝까지 고민거리를 남겨주네. 갈려면 그냥 갈것이지......아! 망설여지네.'
정환이 다이어리에 남겨진 율의 메시지에 갈등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율이 찍힌 동영상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남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줄 것과, 그 주인공을 그녀에게 맡겨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더이상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그녀의 재능을 충분히 살려줄 것을 부탁했다. 눈이 마주칠때면 빙그레 미소짓는 그녀를 보며 같이 미소짓는 정환이지만 머리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에잇!!! 나중에 생각해!! 나중에!!"
"네? 무엇을 말입니까?"
"아..아니, 너한테 한 말이 아니라.....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너랑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깐."
율은 정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수 없지만, 어쨌든 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 곳에서 대장과 함께 행복했었던 그 분처럼, 자신 역시 이 곳에서 그와 함께 한다면 뭐든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보며..
- 끝 -
첫댓글 지금 이소설 끝내신거 아니죠?? ㅠㅠ 가슴조이면서 읽엇습니다~넘 재미잇고 조마조마해서리~~ㅎㅎ
근데 저만 그런가요?? 글이 옆부분이 왜 짤려서 보이지를 않는거죠?ㅎㅎ 그래도 내용은 연결해서 읽으면 되긴하는데~ㅠ
미루님!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몇번이고 다시 올렸는데 똑같네요.ㅠㅠㅠㅠ
그동안 수고 많으셧어요 ~ 작가님 넘 재미잇어서 마냥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네요~ㅎ 처음부터 쭈욱 정독을 할 거여요~ 에필 한편 올려 주시면 안될까요?? 작가님 다음 작품도 기대 만땅하고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미루님!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해 주세요.^^
오랜시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사람다 행복해서 정말 정말 다행이예요~~~
2초동안님! 긴 글 끝까지 즐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름 되세요.^^
너무감사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덕분에 전....너무행복했답니다..ㅎㅎ
부탁이있다면..ㅠㅠ 제발~~~~~번외한번만 ㅠㅠ
수기님! 끝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 기대해주세요.^^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해피엔딩이라 더 좋아요~ 그간고생 많으셨어요^^
경민바이러스님! 더운 날씨 끝까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해 주세요.^^
첫회부터 마지막회까지 그냥 한번에 정주행했어요.. 필력도 좋고 새롭고 매우 좋았어요..,번외도 있었음 하는 바램.. 작가님 멋지십니다.
쥐포귀신님! 끝까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해 주세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1편부터 논스톱으로 밤새워 읽었네요..혼자 읽으면서 웃었다가,,또 가슴 졸였다가,, 안타까워 했다가,,,
오랜만에 좋은 작품 읽은것 같네요..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멋지시네요..
마미님! 처음 뵙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