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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 불립삼매 성취법!!!
다음의 행법대로 나무아미타불 염불 반주행법을 수행하면 현세에 바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고 극락왕생하여 성불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이 이 반주삼매를 닦지않고 오로지 전일하게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면, 끊을 수 없어 무량겁을 윤회의 고통속에 있었으나 반드시 굴레를 벗고 극락왕생하여 또한 일생보처보살로 속초성불하니 이처럼 희유한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곳 국토에서 아미타부처님을 염하면 전념한 까닭에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느니라.'
무량수경 선본에 이르길, 아난아, 그 어떤 중생이 지금 세상에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여야 하고 , 다시 극락세계를 전념해야 하며, 선근을 쌓고 모아서 지니고 회향해야 하느니라.이로 인해 부처님을 친견하고 저 국토에 태어나서 불퇴전을 얻고 나아가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이곳 국토에서 아미타부처님을 염하길 전념한 까닭에 친견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어떤 법을 수지하면 이 나라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나의 명호를 염할지니라.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이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념한 까닭에 왕생할 수 있느니라. 항상 염하라.
당신이 아미타부처님께 저는 어떤 법문을 닦아야 극락세계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여쭈어 본다면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와서 태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의 명호를 염할지라(當念我名)
이 부처님의 금구성언은 지명염불의 수행 근거가 됩니다.이 같은 수행법의 귀중함은 그것이 사바세계 중생이 삼계를 바로 뛰어넘는 묘법이라는데 있습니다.이 세계의 중생은 죄장이 깊고 무거워서 업력에 뒤엉켜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업을 청정히 하고 미혹을 제거하여 해탈을 얻는 것은 실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세존께서는 지명염불로 정토에 태어나길 구함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구경에 괴로움을 뽑아내고 즐거움을 주는 방법임을 자비심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셨습니다.이것은 용수보살께서 십주비바사론에서 말씀하신 이행도입니다.
십주비바사론 이행품에서 최초의 장행문구인 '아미타부처님 본원은 이와 같아서 만약 어떤 이가 나를 억념하며 칭명하여 자신을 귀의하면 모두 정에 들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32시성 게송의 총서로 이행도의 정수입니다. 그 중 염아란 마음속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억념함입니다.칭명이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칭념함입니다.자귀란 중생이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함입니다. 바로 중생의 안심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을 전일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은 삼매중에서 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으며 부처님과 문답할 수 있습니다.
이 염력은 즉 현호분에서 말씀하신 계심상속사유로 이른바 상속사유는 바로 전념불식專念不息입니다.그래서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마땅히 나의 명호를 염할지니라.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이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생심에 한계가 있는 까닭에 7일에 한정합니다.
어떻게 전념합니까? 반드시 부처님의 금구성언을 믿고 받아들이고 오직 이것을 의지삼아 머리에 불을 끄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온 마음을 귀명해야 합니다.기타 상념을 조금도 뒤섞지않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의 소연대상에 전념해야 합니다.
현호분에 이르길 무슨 까닭입니까? 삼매로 인연하여 여래를 친견할 수 있나니 저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음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느니라.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이 삼매를 인연한 까닭이요. 둘째는 저 부처님의 가지이고, 셋째는 자신의 선근이 무르익음이다.
현호분통의에서는 세가지 인연에 대해 상세히 주석하고 있습니다.첫째 염불삼매를 수습하는 것에 인연하는 까닭에 수습하는 날이 오래되면 삼매가 성취된다. 어떻게 삼매를 성취하는가? 염불삼매를 성취하면 일심불란에 이른다.둘째 부처님의 가지를 입는다. 어떻게 하면 가지를 입는가?부처님의 가지를 입는다는 것은 마음과 부처가 상응함을 말한다. 마음과 부처가 상응하면 비록 둘이라도 하나이다.셋째 자신의 선근이 무르익음이다. 자신의 선근이 무르익음이란 일심불란으로 믿음과 발원이 견고하고 탐진치로 인한 끊어짐과 뒤섞임이 없다.
불력과 삼매력은 이미 성취된 것이지만 다시 행자의 자기 공덕력을 덧붙이면 곧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
본래 공덕력을 증진하려면 곧 심념을 집중함으로부터 아미타부처님에 반연하여 생각하고 전일하게 그리워하도록 노력에 착수하여야 합니다.
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면 곧 친견하고 친견하면 곧 묻고 물으면 곧 답하시나니 경전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니라. 내가 염불한대로 보나니 마음이 부처를 지어서 마음이 스스로 마음을 본다.염불하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 염불하는 나의 몸이니 나의 마음이 부처님을 친견한다.
염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또렷하게 듣는 것입니다. 염불은 자기와 배합하여야 합니다.
고요함에 들 수 있을 때까지 염해야 자성이 염에 있고, 일하는 동안에도 염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염에 있는지 모르고 전일한 마음으로 일하고 다른 망상이 없어야 일심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마음이고 불도와 계합함입니다.정념이 있음으로 인해 행하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자비이고 보는 것은 저절로 정지정견으로 이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내가 비록 이런 설법을 들을지라도 일념의 순간에도 의심을 내지 않고 오직 내가 결정된 상상의 신심을 증장시켜 성취할 뿐이다. 어떠한 연고인가?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로 결정코 요의인 (일체종지로 철저히 조견한)연고이다. 부처님은 진실한 지知, 진실한 해解, 진실한 견見, 진실한 증證으로 의심을 말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체보살이 다른 견해로 파괴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진실로 보살이면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어겨서는 안 된다.(나아가 부처님의 뜻과 맞게 말하여야 한다)”
“또 이 일은 차치하고, 행자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설사 화신불,보신불들이 한 분, 여러분, 내지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 찬 시방 세계, 무수한 존불들이 각자 큰 광명을 발하고 광장설상을 내밀어 시방세계를 두루 덮어서 하나하나 자신이 증명하여 이룬 진실한 말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하신 일체 범부에게 전일한 믿음으로 염불하고 기타 선행을 닦아 그 공덕을 돌려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라고 찬탄하고 격려하는 말이 사실이 아닌 말이고 이런 일이 결정코 없을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나는 비록 이런 제불의 말씀을 들을지라도 끝끝내 일념의 순간에도 의심하고 퇴전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고 서방극락 불국토에 왕생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신심은 매우 깊어 동요시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단계적으로 증장시켜야 합니다.
네가지 일이 있어 빨리 이 삼매를 얻는다. 첫째 세간의 사상을 구하지 말라. 3개월은 손가락을 튀기는 짧은 순간과 같다. 둘째 3개월을 잠자지 말라. 3개월은 손가락을 튀기는 짧은 순간과 같다.
세째 식사할 때와 용변 볼 때를 제외하고 3개월간 쉬지 말고 경행하라. 넷째 다른 사람들을 위해 경을 설하되, 공양을 바라지 말라.
이 보살은 3개월간의 전수專修 인연이 있습니다.
이에 고래로 반주삼매를 닦아 이룬 매우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왕생집往生》에 이르길, “자운참주 송宋 나라 대주 임해현사람이다. 학행學行이 고고高古하고,명관名冠 양절兩浙로 오로지 안양安養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반주삼매를 행하였는데 90일간 고학으로 토혈하였고, 도량에 들어가 두 발이 곪아 터졌으며, 스스로 죽음으로 맹세하였다. 홀연히 꿈결에 관음보살께 이 손가락을 드리워 그의 입에서 약간의 벌레들을 꺼내고는 손가락끝에서 감로수를 내어 그의 입에 부어주자 신심이 청량해짐을 느끼고는 병이 곧 나았다.”하였습니다.
90일간 앉지도 눕지도 않고 오직 경행 염불만 하였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해가 떠오르며 시작하고 해가 떨어지면 쉬는 생활습관과는 격차가 상당히 큽니다. 이것은 환한 대낮과 깜깜한 밤을 막론하고 용맹하게 도에 힘쓰는(辦道) 모습으로 만약 단단하고 끈기 있는 도심이 없다면 완성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몸에 병고를 만남에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온몸을 내려놓고 일심으로 염불할 수 있다면 한층 더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수면이 덮는 것을 꾸짖고 덧없음을 경책해야 한다. 수면을 덜고 줄여서 혼침으로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염불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안정시키고 면밀하게 하여 점차로 심념을 청명하게 합니다. 부처님 명호가 심념과 합하여 동체가 되도록 염하여 염념이 부처님과 여의지 않고 법미가 가득 차 흘러 신심이 경안해지면 잠자려는 마음도 점차 사라집니다. 만약 염념이 청명하여 염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하고, 사대가 조화하여 늘 법희 광명이 있으면 저절로 잠자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는 마음에서 거칠고 무거운 것을 제거하여 마음에 경안을 얻게 합니다. 아래의 세 번째는 몸에서 거칠고 무거운 것을 제거시킵니다.
3개월 전수염불 하는 동안은 네 가지 위의威儀 중에서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지 경행經行하거나 버티고 서있을 뿐입니다. 또 식사 할 때와 대소변 볼 때를 제외하고 조금도 쉴 수 없습니다.
왜 경행을 선택하여 반주삼매를 수습합니까? 《지관보행전홍결》에 “잠을 깨우기 위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경행을 시작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또 경행시 주의해야 할 사항과 그 이익을 설명하길, '만일 경행할 때는 벌레가 있는 곳을 피하라. 십송十誦에 이르길, 경행할 때 응당 느리게도 빠르게도 걷지 말라고 하였다. 또 《삼천위의경三子威儀經》에 이르길, 경행하는 곳으로는 한가한 곳, 집 앞, 강당 앞, 탑 아래.누각 아래의 다섯 곳이 있다고 하였다. 4분율四分律에서는 경행에는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으니, 첫째는 멀리 다님을 감당할 수 있음이요.
둘째는 능히 할 수 있음이요, 셋째는 병이 적어짐이요, 넷째는 음식을 소화시킴이요, 다섯째는 선정을 얻으면 오래도록 머물 수 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반주삼매를 닦을 때 정토에 대한 지극히 큰 신요(信樂)가 생기고 왕생 구하길 발원합니다. 이 같은 경행으로 앉지도 눕지도 않고 서방에 대해 굳게 다짐하고 향해 감을 표시합니다. 옛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지 시절 불사弗沙부처님 때에 한쪽 발을 들고 서서 7일 동안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셨습니다.
정토법문은 만나기 매우 어려워서 적은 선근 ·복덕으로는 이 법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량수경(강승개 역본)에 이르길,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시길,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은 만나기도 어렵고 뵙기도 어려우며, 제불의 경전과 도법은 얻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우며,
보살의 수승한 법과 모든 바라밀을 듣는 것 또한 어렵고,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 수행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니라. 더구나 이 경전을 듣고 믿어서 즐겨 수지하기는 어려운 것 중에서 어려우니,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세상에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모든 큰 장애와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도저히 반주삼매를 듣기 어렵습니다.
용서정토문에 이르길 대자보살 권수서방게에 두사람에게 닦을 것을 권할 수 있으면 자신이 정진하는 공덕보다 뛰어날 수 있고, 십여 명에게 권하면 복덕이 이미 무량하다.
백천 명에게 권하면 진정한 보살이라 이름하고 또한 만여 명에게 권할 수 있으면 이 사람은 바로 아미타부처님이시다.” 하였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인지因地에서 5겁 동안 홍원弘願을 사유하시고 불가사의 조재영겁兆載永劫에 보살행을 쌓고 심어 불국토를 장엄함은 바로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염불하여 극락에 태어나길 권할 수 있음은 모두 고통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세계에 가는 대원의 배 한 척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바로 여래가업如來家業을 맡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사람들에게 정토를 수행할 것을 교화 인도하는 공덕은 무량합니다.
진정한 반주삼매는 90일 모두 요불하는 것으로 앉아서도 안 되고 누워서도 안 되며, 밤낮으로 중단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현재 누가 이런 능력이 있습니까? 누가 90일 동안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고덕께서는 주해에서 후인들이 이런 체력 · 정신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7일로 고쳤습니다. 그는 7일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것을 더 단축하여 하루로 만들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잠자지도 앉지도 드러눕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요불繞佛로 이 모두가 반주삼매의 수행방법입니다.
염불당에서 하루 동안 공부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힘듭니다. 측면에 의자가 있어 앉을 수도 있어 조금 휴식도 해보고, 걸어도 좋은 때라고 여기면 빨리 일어나서 돕니다. 몸에 병이 있어 앉을 수가 없으면 부처님께 휴가를 얻는 것이 이 방법입니다. 그래서 염불당에서 염불할 때 요불을 위주로 합니다. 요불은 소리를 내야 합니다. 염불기가 있으면 염불기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염불하면 매우 편리합니다. 법기가 인경만 있다면 한마디 부처님 명호 「아미타불」의 「타자에 인경을 칩니다.
현재 일반인은 「아阿·타陀」두 번 치지만, 실제로는 「타 자에만 치는 것이 확실히 매우 편리합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을 거두어들일 수 있고,
진실로 오로지 육근을 모두 거두어 들여 정념을 이어갈 갈 수 있습니다. 「정념淨念」은 의심을 품지 않고 뒤섞지 않음으로, 이렇게 염하면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상계」는 끊어지지 않음으로,
입으로 끊어짐 없이 염불하고 마음으로 끊어짐 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만약 장기간 훈련하고 또 삼보의 가지를 얻으면 당신의 몸은 염불할수록 좋아지고 염불할수록 건강하며, 정신은 염불할수록 행복하고 얼굴은 염불할 수록 장엄할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도리입니다. 학불의 효과가 여기서부터 보이고,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함은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이 생깁니다!
주야경행염불방법은 일반적인 산심염불散心念佛과 다릅니다. 그것은 정토종에서 가장 이른 수련방법입니다. 이전 조사 대덕들은 몇몇 관문을 빨리 돌파하는 폐관 비법으로 대용맹, 대정진·대행지의 원칙을 굳게 지키며 쉬지 않고 정진하면서 장시간 경행 중에 염불하고, 호흡과 신심을 결합하여 함께 염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장시간 수행으로 도달할 수 없는 효과, 즉 현생에 견불見佛하고 당생에 성취하여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며 불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이러한 목표에 매우 빨리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경행염불은 수학하는 동안 혼침(昏沈; 침울한 상태)과 도거(고양된 상태)에 빠지지 않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염불할 때 잠깐 염불하여도 졸리는데, 경행염불을 하면 졸리지 않습니다. 염불을 할 때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에 망념이 흩날려 그칠 수 없지만, 경행염불하면 마음이 매우 안정됩니다. 이것은 힘써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양생의 도이기도 합니다. 정종의 조사이신 혜원慧遠 대사, 선도善導대사, 승원承遠 대사, 법조法照 대사는 이 염불법문을 닦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반주삼매般舟三昧」라 불리며, 완전히 주야로 경행염불하는 것으로 앉지도 눕지도, 짚지도 기대지도, 무릎 꿇지도 절하지도, 기어가지도, 앉으며, 걸어가는 것을 제외하고 바로 선 채로 밤낮으로 24시간 중단하지 않고 요불統佛하며 염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주般舟라는 말은 본래 범어로 번역하면 불립佛立입니다. 그래서 반주삼매는 「불립삼매」라 불립니다. 또한 이 염불법문은 앉지도 눕지도, 잠자지
도 않으며, 쉬지 않고 늘 걷기 때문에 「상행삼매常行三昧」라고도 합니다.
이 수행법은 《반주삼매경에 나옵니다. 이 경은 현존하는 대승경전중에서 가장 이른 경전이자 정토경전의 선구입니다. 심지어 옛날에는 이 경을 《불설아미타경》의 가장 이른 문헌이라고 여기는 대덕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토경전에는 반주삼매경이 없을까요? 부처님께서 경(반주삼매경 3권 본중 수결품 제7>에서 “부처님께서 발타화에게 이르시길 내가 반열반에 든 후 이 삼매는 마땅히 40년 동안은 존재하나 그 후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라.
사라진 후에 난세에 불경이 잠시 단절될 때 모든 비구가 더 이상 불교를 이어 받지 않느니라. 그런
후 난세에 나라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키느니라.
이때에 이 삼매는 마땅히 다시 사바세계에 나타나느니라. 부처님의 위신력을 사용하는 까닭에 이 삼매경이 또한 출현하느니라.”
이 때문에 우리 불교도는 반드시 목숨을 걸고 '반주삼매경》을 호지할 것이고, 피땀으로 《반주삼매경 을 호지할 것이며, 의지와 원력으로 '반주삼매경》을 호지하여 《반주삼매경 이 영원히 세상에 머물게 하고, 발양시켜 한층 더 빛나게 해야 하며, 전 세계 방방곡곡까지 유통시키고 나아가 진허공盡虛空·변법계遍法界까지 유통시켜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멸진경法滅盡經)에서, 《반주삼매경》은 말법시대에 가장 일찍 마구니에 의해 사라지게 되는 경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반주염불행법은 단도직입적으로 수행하여 득력할 때 쉽게 윤회를 벗어나 극락에 왕생하기 때문입니다. 반주법문을 수습한 정토종 초조 및 그 당시 따르던 무리 123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생하여 모든 염불인에게 100% 왕생율을 바라도록 하였기에 학습할 만한 가치가 크며 염불인의 진정한 귀결점입니다.
반주수행의 특징은 단도직입적으로 수행해서 실제 증명하는 것으로 결코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접 정곡을 찌릅니다. 곳곳마다 조작성操作性을 갖추면서도, 곳곳마다. 모두 제일의제第一義諦입니다.
반주의 발걸음은 이와 같고, 반주의 호흡도 이와 같으며, 반주의 음성도 이와 같으며, 반주의 심법 또한 이와 같습니다.
반주의 걸음걸이는 반주행법의 기초와 근본이 있는 곳입니다. 일체의 수증修證이 다 반주의 걸음걸이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1) 발을 내딛으면서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발을 내딛으면서 명호를 부르면, 생명력이 있고 발을 내딛음을 따라 명호를 부르면 근이 생깁니다. 두 가지를 결합하면 공덕이 10배 이상 증가합니다.
2) 발을 내딛는 단계는 걷는 단계 이상을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발을 내딛는 것이 있어야 반주행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몰래 내딛는 것(暗踏)은 내딛는 걸음에 진정한 생명을 부여합니다.
드러내 내딛는 것(明踏)은 반드시 오래 지속해서는 안 됩니다. 드러내딛는 것은 내동으로 전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4) 발을 내딛는 것과 명호를 부르는 것의 유기적 결합은 전체 신체에 생명을 부여합니다. 전체 신심이 함께 융합되고, 신심이 함께 진동하는 것은 반주행법의 근본이 있는 곳입니다.
반주행법 중에 몇 가지 곤란과 관문을 만나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고통의 관문, 혼침의 관문, 경계상과 상마가 염을 빼앗는 상황 등이 있습니다. 수면은 사람마다 태어남과 동시에 모두 오는 것으로 입태入胎한 후부터 시작되므로 극복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행법은 한밤중이 되면 혼침이 언제나 생각지 못할 때 찾아옵니다. 대치하는 근본원칙은 같습니다. 즉 “큰 소리로 염불하고 힘차게 발을 내딛으십시오!” 통상 염불당에서 이 같은 행법으로 원을 절반 돌면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요점은 혼침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관건은 혼침 중에도 여전히 염불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완강히 “물러나지 않고, 염불하면 “물러남이 없는 과보에 대응합니다.
행법으로 이틀 밤낮을 보낸 후 몇 가지 경계상이 출현합니다. 거친 경계가 시작되는 경우 그 허상을 쉽게 볼 수 있어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법의 진행에 따라 경계상이 따라서 깊어지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변형되고, 진상眞相과 가상, 환각이 혼재되어 일어나면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염불당이 평탄한 붉은 카펫이 행법이 일정한 때에 이르면 물결이 연이어 일어나는 형상으로 보이고, 어느 때는 또 카펫 중간의 볼록한 부분이 매우 크게 일어나서 높이가 1m5 이상인 것도 보입니다. 벽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공원이나 해변 등등 기타 현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분별심에 기대면 경계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일체경계는 진상과 가상의 구분이 없고 단지 마음이 지은 것이 저절로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생생멸멸할 뿐입니다. 내가 닦은 것은 일체경계상에 여여부동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경假境도 이와 같고, 진경眞境 또한 이와 같습니다. 대상(境)에 물들지 않고, 계界에 집착하지 않으며, 경계에 관계없이 바로 닦아서 무위無爲·무주無住·무집無執·무분별無分別을 지녀야 합니다.
소리의 감각도 달라집니다. 부처님 명호의 음성과 절주(음의 흐름)는 시간의 추이와 통솔하는 대중의 변화에 따라 모두 변화가 있습니다.
행법이 이틀에 이른 후 언제나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제 마음속에 무엇을 둘까? 여전히 부처님 명호인가? 부처님을 이렇게 염해도
좋은가?'
여러 행법은 모두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염불의 음성에 매우 강렬한 분별상이 생깁니다. 특히 혼침 때나 매우 피곤할 때 이러한 분별상이 극도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심지어 자꾸 번뇌가 생기고 자꾸 의심 불안이 늘어나는 지경에 이릅니다.
염불로 염하는 것이 넉자 명호도 아니고, 어떤 곡조도 아니며, 이런 절주節奏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진정으로 이 점을 체득하여야 비로소 진정으로 법계가 함께 진동하는 염불의 법열을 직접 음미할 수 있습니다.
경계상 그 자체는 행법자에게 이미 매우 많은 곤란을 조성하고, 상마想魔는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이들 진상과 가상, 환각을 한 곳에 합쳐 이야기를 꾸며보면 이런 이야기는 논리가 엄밀합니다. 행법자 또한 비교적 집착하는 상태에 처해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유를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록 방관자의 눈에 더 바르게 보이지만, 왕왕 자신을 더 믿게 됩니다. 이 때 행법자의 스승에 대한 신심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승님의 지적을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상마가 염을 빼앗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각종 경계에 좌지우지 되지 않으며, 마구니에게 지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치 원칙은 여전히 일치합니다. 즉 “큰 소리로 염불하고 힘차게 발을 내딛으십시오!” 염불이 근본입니다. 염불은 일체 험난하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발을 내딛으면 전체 몸을 같이 사용하여 염불하면 역량이 더 강해집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행법자가 그 일을 자기식대로 행하는 것으로 즉 스승의 지도도 듣지 않고 동수들의 권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면 꾸며진 이야기 줄거리 속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경계상에 빠져서 스스로 떨치지 못합니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싶어 합니다. 과거 이병남노거사께서는 일만 명의 염불인 중에서 진정으로 왕생하는 사람은 단지 두 세 사람에 불과하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적습니까?
반주심매를 행하면 알게 됩니다. 염불을 매우 많이 아주 잘 하는 사람도 고통이 오면 부처님 명호를 내버립니다. 혼침이 오면 부처님 명호를 잊어버립니다. 경계가 오면 부처님 명호가 달아나버립니다. ……
어떤 사람은 반주삼매를 행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임종시에 살아있는 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고통이 일어나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임종 전에 반드시 더 큰 고통 · 혼침 ·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이르러 부처님 명호를 꺼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왕생하지 못하고 삼악도에 가는 것을 긍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래서 반주삼매를 행하는 것은 임종을 예행 연습하는 것입니다. 평상시 먼저 잘 연습해두면 임종시 어떻게 응대할지 압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단 한번의 기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도 여전히 체력이 가장 나쁘고, 심력이 가장 쇠약한 시간으로 진행되는데도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왕생할 성공률이 만분의 몇에 불과한 것은 합리적입니다.
만약 이미 “그것에 상관하지 말고 단지 염불만 하겠다(不管它 只管念)'를 실천하였다면 왕생할 성공율은 매우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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