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을 조금 옮겨본다. 17~18세기, 신앙의 자유를 위해 위험천만한 미지의 땅 북아메리카를 향해 떠난 여인들의 이야기이다. 대륙의 개혁신앙에 고무되었던 영국의 신자들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국교회를 선포한 자국의 신앙적 행보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것이 헨리 8세의 개인적 욕망(재혼을 위해)이 주된 동기였음에 실망하고, 결국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개혁적이지 않음에 좌절하며 점차 ‘분리파’와 ‘독립파’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국가교회의 박해가 이어지자 결국 신앙 양심에 기초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세우겠다는 각오로 고향을 떠난 신자들이 미국 북동부 해안에 정착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청교도’라고 불리던 신자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온산 언덕에 신앙에 기초한 왕국과 성전을 건설했던 것처럼, 청교도들은 출영국하여 미국 땅에 ‘뉴잉글랜드(새영국)’를 건설하고자 했다. ‘언덕 위의 도시’라는 말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사에도 등장하는 미국의 오랜 이상이 아니던가.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In God We Trust)’! 미국 땅에 도착한 처음의 청교도들이 품었던 각오와 비전이 세대가 흐르고 다민족 국가의 상징이 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국의 ‘시민 종교심’으로 남아 있다.
그 첫 이주는 1620~30년대에 시작되었다. 단순히 탐험이나 무역을 위한 왕래가 아니라 일상을 살기 위한 이주였다. 그들에게 북아메리카는 빈터요 야만의 공간이었으니,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고 새로 일구어야 하는 곳! 그러나 ‘영국’이 이미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느꼈던 ‘분리파’와 ‘독립파’ 청교도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배에 올랐다. 천여 명의 경건한 청교도들이 탄 배 위에서 그들을 이끌었던 존 윈스럽(John Winthrop)의 연설 내용을 보면 그 비장함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과 언약에 들어간다. 우리는 임무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조항들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들으시고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조약을 체결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임무를 확인하여 인치시는 것이며 그 안에 있는 조항들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강조했던 목표인 이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이 세상을 포옹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르며 우리 자신과 우리 미래를 위하여 좋은 것들만 찾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노를 퍼부으실 것이고 패역한 백성들에게 복수하실 것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하실 것이다.”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173~174에서 재인용)
앤 허친슨(Anne Marbury Hutchinson,1591~1643)도 초기 이주자에 속해 있었다. 앤은 영국 땅에서 태어나 국교회 성직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목사 딸’이었다. 영국에서 꽤 성공한 상인이었던 윌리엄 허친슨(William Hutchinson)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들을 양육하며 안주하여 살다가 뉴잉글랜드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부부가 따르던 존 코튼(John Cotton) 목사의 행보가 큰 영향을 미쳤을 거다. 하지만 옆 동네도 옆 나라도 아니다. 더구나 앤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었다. 생애주기가 지금보다 짧았으니 뭔가 새로 시작할 나이는 아닌 즈음의 결단인 셈이다. 많은 자녀를 포함하여 전 가족이 이주했다. 영국에서 가져온 재산이 꽤 되었던 남편은 현재 보스턴 시내 한복판에 해당하는 지역에 생업과 거주를 위한 터를 샀다. 앤은 간호사요 산파로 일을 시작했고, 자연히 여성들의 일상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또한 앤은 여성들의 성경 공부 모임을 자신의 집에서 열었는데, 여러모로 초대교회 가정교회 분위기와 흡사했다.
그들의 삶이 절박한 만큼 신앙도 절실했다. 이미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였던 초기 정착민들은 상황이 주는 극적인 동기로 인해 더욱 신앙에 매달렸다. 그런 중에 앤의 성경공부 모임은 입소문을 타고 규모나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 점차 남성들도 참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중에는 저명한 목회자나 정치가, 상공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계가 있는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권위를 나누는 초대교회와 같은 모임이었다. 그 모임을 주도했던 앤은 ‘성경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맞느냐 틀리느냐 목사님께 물을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며 묵상하라! 성령께서 직접 교감하여 깨달음을 주신다. 주체적인 신앙을 가져라. 영적 깨달음은 너의 몫이다.’ 이것이 앤이 믿는 신자의 능력이요 권리였다.
이쯤 되면 벌써 우려가 될 것이다. 평신도가, 그것도 여자가 교회나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적 권위를 주장했다니! 우리의 예상대로 앤은 논쟁의 중심에 섰다. 1637~38년 사이에 벌어진 메사추세츠 교회 재판은 결국 앤을 법정에 세우게 된다. 아이러니다. 가톨릭의 교황-중심주의에 저항하고, 영국 국교회의 수장인 왕-중심주의에 한번 더 저항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죽을 각오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덧 교파-중심주의가 되어버린 주류 교회 지도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선포한 교리와 교회법에 다시 갇혀 버렸다. 심지어 신앙과 일상이 하나로 얽힌 새로운 사회이니 교회 규율은 신자들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억압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어찌 보면 유럽보다 더 열악하게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교회나 성직자가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개신교적인 주장,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오직 은혜로만’을 한 번 더 외친 여인이 앤이었다.
그런 그녀는 결국 교회분열을 야기한 죄목으로 법정에 섰고, 존 윈스럽은 그녀의 죄목으로 ‘성경적 여인의 본분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였다’고 비난했다. 도대체 ‘성경적 여인의 본분’은 무엇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 ‘뉴잉글랜드’의 건설자들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낡은 가부장제의 편견과 오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유럽처럼 귀족 사회가 견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력이 부족했던 처지였던 지라, 개별 가족 중심으로 유지되는 노동관계에서 여성의 주부 활동은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비전으로 건설되는 ‘언덕 위의 도시’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뒤로 물러난 셈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가족을 위해 손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기도와 양육에 게으름이 없는 지혜로운 여인, 그러면서도 남편과 남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며 조용히 뒤에서 돕는 여인이 ‘성경적’이라는 획일적 여성관을 강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앤은 공동체의 신앙 기조에 ‘부적절’하다고 평가되었고, 그런 앤을 지지한 남편과 가족들도 함께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당했다. 당시 ‘추방’은 사회적 고립만 의미하지 않았다. 도시들이 촘촘하게 세워지고 치안이 견고하던 시절이 아니지 않나. 매사추세츠 밖으로 내몰린다는 것은 곧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의미였다. 앤의 가족과 그들을 지지한 지인들은 조금 더 남쪽, 즉 로드 아일랜드로 이주해서 새로운 마을을 세웠다. 지금의 포츠머스가 그들의 정착지를 기반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었고 그 1년 뒤 1643년 원주민 습격으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앤도 죽임을 당했다. 물론 허친슨 집안의 비참한 말로를 ‘매사추세츠 주류 교인들’이 어찌 ‘해석’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존 윈스럽이 선상에서 설교했던 축복과 저주의 이원론이 여기에 적용되었다. 앤과 그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이라 평가되었다. 하지만 앤 가족의 죽음이 어찌 하나님의 저주였을까? 오히려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그들 탓이지.
앤의 가족을 죽인 이들이 원주민이라 하여 원주민만 탓하기도 부적절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에 의해 ‘인도사람(인디언)’으로 오해받은 채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원주민의 눈으로 보자면, 낯선 이들이 미국 북동부 해안가에 도착해서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인도’라고 감사하며 ‘자기들만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벌인 일들이었다.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포우하탄족 추장이 영국인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를 통해 살펴본다.
“나는 두 세대에 걸쳐서 내 종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 사랑으로 조용하게 가질 수도 있는 것을 왜 힘으로 얻으려 하는가? 왜 당신들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우리를 짓밟으려 하는가? 전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 내 부족 젊은이들은 종일 눈에 불을 켜고 앉아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면 “스미스 선장이 온다!”라고 외쳐 댄다. 그러면 나는 내 가련한 삶을 끝마쳐야 한다. 우리 모두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당신네 총과 칼을 거두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죽게 될 것이다.” (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1』 38쪽에서 재인용)
‘언덕 위의 도성’은 모두를 평등하게 포함하는 새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 자명했다. ‘인디언’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이상에 ‘부적절한’ 사람들은 같은 영국인이라도 축출하고 이루려는 ‘동질적 집단’이 ‘언덕 위의 도성’이었던 셈이다. 이후 뉴잉글랜드의 교회법과 생활규율은 더욱 엄격해졌다. 공교회 예배 불참 시의 교회와 사회의 처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국교회가 공적 제도의 힘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을 떠나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는 행보였다. ‘새로운 영국’(뉴잉글랜드)을 건설하려던 그들이 만든 광기 어린 규범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결국은 앤을 죽인 그 땅에서 깊고 크게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