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타작
이 미 화
엉겅퀴 꽃몽오리가 망울망울 보랏빛이 희끄무리 하게 바래졌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 고랑따라 뻐꾸기 우는소리가 고단한 소리로 들린다.
흙물이 찰랑찰랑 고인 논마다 짤쭉짤쭉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갓 심겨진 벼포기들이 논두렁이 있음에도 차별이 없다. 언제 심어 놓았는지 며칠 사이에 비어있는 논이 눈에 띄지 않는다.
놉을 하고, 품앗이를 하면서 모내기를 하던 우리네 어렸을 적 풍경은 어느새 어디로 갔는지. 공연히 논에 심겨진 모들이 예전에 느꼈던 정감이 와 닿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바라본다.
한쪽에서는 보리를 바쁘게 베어내고 있었고, 빈 논을 쟁기로 갈아엎고 물꼬를 대어 써래질을 하는 소 모는 소리가 한눈에 들어왔었다. 어미를 따라 나온 송아지가 비어가는 논빼미를 이리 뛰고 저리 뛰노는 새끼를 보며 대견한듯 어미소는 힘을 내고 있었는데..... 그뿐이랴, 논 감자를 캐내야 그 논에 모를 심고, 논 마늘도 서둘러 캐내야 모내기를 했었다.
동네에 들어서면 큰집 마당에서 들리는 탈곡기소리가 '위잉 윙윙'동구밖까지 요란 했다. 어느 집에서는 절구통을 엎어놓고 중이적삼에 다리를 걷어 부친 장정은 보리 단을 메었다 내리쳐서 보리알을 털어냈다. 손이 모자랄 지경이라는 말이 입에 따라다니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지깽이도 일을 거든다는 말이 있었나 보다. 일을 하는데 남녀노소가 어디 있는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어머니 고함소리에 투덜투덜 하면서도 일을 거들면 “우리 딸 강아지보다 낫구나” 어르기도 하셨지.
아시를 털어낸 보리단을 그 이튿날 하루쯤 이리저리 뒤집으며 햇볕에 바짝 말린다. 아직 붙어있는 낱알을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햇감자를 삶아 먹으며 미루나무 그늘에서 뜨거운 햇살을 피하듯 고단한 심신을 다랬다. 그 단맛의 시간은 잠시, 마른 보릿단은 이삭쪽을 마주보게 하여 도톰하게 마당하나 가득 쪼오옥 깔아 놓는다. 이제부터는 도리께의 몫이었다.
고르게 뻗은 닥나무 네 가닥이 긴 자루와 맞물린 길이로 잘 회전되게 꼭지에 붙임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놈을 휘불리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긴 자루를 번쩍 드는 순간 꼭지에 매단 도리께 날개가 지붕 끝보다 더 높이 올랐다 ‘휘이익’~ 소리를 내며 ‘착싹’ 번개같이 보릿단을 때린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치는 도리께질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장단에 신명이 붙는다. “어여차 여차” “으쌰 으차” 휘이익 휘익, 착, 찰싹, 착~ 찰싹, 하늘을 휘돌아 내려치는 도리께의 장단은 낱알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닌 것만 같았다. 한참을 소리하던 힘찬 장단이 슬그머니 까라지며 힘을 모으는 숨을 뱉어낸다. 뚝뚝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은 휙,휙,~ 휘파람처럼 나는 소리와 함께 보릿단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
여치 집을 만들 여지도 없이 보리 모가지는 흔적이 없이 문드러지고 있었다. 보릿단은 온데간데 없이 까라지고, 도리께 자루로 보릿짚을 걷어 한쪽으로 쌓여진다. 껄끄러운 보리터럭의 괴롭힘은 무서웠다. 고몰개로 끌어 모아진 보리알곡은 탑세기가 반이었다. 바람이 있는 날은 보리를 삼태미에 담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며 탑세기를 날려 보냈다. 그러고도 남은 일은 늦은 밤까지 어머니의 키질로 마무리를 했었다. 한줌의 보리알이 나올 때까지 밤이 이슥해 지는 것도 잊고 키질을 하시던 어머니,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 탑세기를 털어내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우물에 두레박 던지는 소리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우리네는 참으로 귀한 양식을 먹고 자랐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밥맛이 꿀맛이었는지, 떨어진 한 알의 밥알도 서슴없이 주워서 입에 넣었었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리타작은 힘겨워도 고루하게 느껴지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끼니 걱정을 해결할 수 있다는 뿌듯함 이었으리.
봄나물이 나기가 무섭게 으레 어느 집이랄 것도 없이 냉이죽이며 쑥죽, 아욱죽, 으로 저녁을 해결했었다. 나물이 거반이고 쌀알이라야 풀기만 있을 정도였으니 대접을 하나 가득 채워서 먹고 배가 불러도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말이 있었다. 양기가 없는 끼니는 배만 키웠다는 죽을 말했던 것이었으니 보리타작이 끝나면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지를 않은가. 고단함 쯤이야 하는 즐거움 이었으리. 때로는 보리가 익기 전에 밀때기를 해 먹기도 했는데 재미가 쏠쏠한 작업이었다. 노릇노릇해지는 밀모가지를 잘라다 삭쟁이를 땐 불을 끌어모아 그 위에 얹어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밀털이 그슬려 없어질 정도면 무른밀이 다 익어 있었다. 그놈을 키에다 놓고 두 손으로 박박 문질러 비빈다. 벗겨진 껍질을 까불러내면 반질잔질하고 푸르스름한 밀알이 말랑말랑하니 익어 고소하고 달큰한 맛이 별미 중에 별미였다. 보리타작이 시작되면 동네 고샅을 뛰어다니는 강아지도 신이나 있었다.
배고픔의 서러움쯤이야, 그 시절의 정겨움이 그립다. 그리운 고향, 정영 잊혀져 가야한단 말인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이유
이 미 화
문고리의 잠금을 풀고 창호지를 바른 문살에 부딪히는 햇살을 맞아 들였다. 며칠째 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맞는 아침이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지만 책을 읽다가 늦게 잠이 들어 못 일어난 것이다. 앞산 소나무 숲 위로 올라오는 해를 보며 왜 서쪽에서 해가 뜨는지를 알 수가 없어 머리를 흔들었다.
합천 가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청강사, 이곳에 시어머님을 수목장으로 모셨다. 집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서 훌쩍 뿔뿔이 다들 발길을 돌릴 수가 없어 며칠만이라도 절에 머물면서 뫼시겠다는 생각으로 오늘이 보름째 되는 날이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백중이라고 하는 날 제를 올리고 청주로 올라갈 양으로 묵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여전히 서쪽에서 해가 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던 날부터 그동안 어떻게 하면 방향 감각을 바로 잡을지를 고민하였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멋진 바위와 어우러지는 풍광을 자랑하는 산에도 올라 보았고, 옆 야산으로 내리막길에 심겨진 밤나무 숲길을 걸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치매로 고생하시다 가신 어머님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비교적 총기가 좋으셨던 어머니는 언제인가 부터 서서히 얼토당토않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 하셨다. 그 고집이 심해지면서 역정을 내거나 심한 속앓이를 하시더니 소지품을 감추거나 깊이 두고서 찾지를 못하여 혼란을 겪으셨다.
밤이면 잠을 잘 줄 모르고 집에 가야한다면서 짐을 쌓다 풀었다 반복하며 분주했다. 북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다고 북청이 오십리 길이며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삼팔선이 있지 않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하니 그 머릿속을 어이하랴. 끝내 정신은 돌아올 줄 모르고 다른 세계를 헤메다 가셨다.
며칠이 지나도 방향 감각은 오리무중인 것만 같이 답답했다. 그래도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는 들리고, 새 소리도 들린다. 나를 깨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어도 찔레꽃 향기는 달콤하고 진했다.
그래 그대로 두자, 라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머니를 모신 나무를 본다. 분명히 북쪽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좋은 잔디를 찾아 삽으로 떴다. 예쁘게 떼를 입혀 드리는데 하루가 걸렸다. 해 뜨는 방향이니까 자리를 잘 잡으셨어요. 라고 말씀 드린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아직도 어머니 나무는 북쪽을 향한 것만 같아 답답했다.
몇 백 년을 살고 있는 벚나무 밑에 계신 어머니는 올해에는 꽃이 지고 없어도 내년 봄에 벚꽃으로 환하게 피시겠지. 살아계셨을 때보다 외롭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혼백은 삼팔선이 가로막지 못하겠지. 화장을 해서 고향 이북이 가까운 산에 뿌려 달라 하셨지만, 큰 아이가 할머니를 흔적 없이 그렇게 보내드리는 건 싫다고 하였다. 고맙게 생각되어 여기 모셔진 것이다.
이튿날 집에서 아침 해를 확인한다. 편안하게 동쪽에서 뜨는 해를 본다.
이번에 경험한 방향감각의 착시현상을 감안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지어본다.
누구와 대하든지 내 고정된 것으로 판단하거나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로 삼아야겠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고집하는 착각현상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