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461장(십자가를 질 수 있나)
성경 : 마태복음 20장 17절 – 28절
제목 :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
오늘도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빕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라도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 할지라도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바라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눈에 똑같이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물 주전자를 무심하게 쳐다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와트(Watt)는 끓고 있는 물 주전자에서 증기기관차를 보았습니다.
천둥 번개를 보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Franklin)은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힐 전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걷던 조각가 로댕(Rodin)은 바위 앞에 멈춰 섭니다.
화강암 바위 속에서 로댕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한 젊은이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바위는 얼마 후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명작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쥐를 보면, 누구나 징그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디즈니(Walt Disney)는 똑같은 쥐를 보면서,
만화영화의 주인공 곧 미키마우스를 떠올리고,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가지만,
눈에 보이는 평범한 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보는가?
똑같은 것을 보되, 그 속에서 미래를 보고 희망을 볼 줄 아는 비범한 눈과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같이 손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지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십자가, 죽음, 부활!
이 단어들을 떠올리면, 주님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은 예수님에게만 어울리는 단어일까요?
우리는 이 지점에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만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십자가는 예수님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은 제자들도 그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길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그 길을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감당하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갈라집니다.
세베대의 아들들 곧 요한과 야고보는 22절에 보면, 죽음의 잔을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높은 자리만 준다면, 죽음의 잔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제자들은, 세베대의 아들들 때문에 몹시 분노합니다.
그들 역시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같은 침대에 누워 한 이불을 덮고 지내는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생각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3년 동안이나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살았는데도,
품고 있는 생각이 이처럼 다릅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갈라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값(대가, 보상)’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예수님이 어떤 대가를 원하셨다는 기록이 있던가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대신 그 어떤 보상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조차도 값없이 주시는 선물, 곧 구원의 선물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철저히 대가와 보상을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의 잔을 마신다고 할지라도, 그냥 거저 마시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의 잔을 마시겠으니, 그 대신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12장 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높은 자리가 그들의 눈을 가려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김제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건은 고난의 쓴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가운데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요, 그리고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순간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죽음의 잔을 마시겠다는 각오가 있는 것인가?
평생 종처럼 섬기고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있는가?
혹여라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대가와 보상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보상을 바라는 생각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어주신 주님을 따라, 값없이 사랑할 줄 알고, 값없이 나누어줄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는 삶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을 바뀔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곧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김제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올 한해는 우리의 생각을 주님의 생각에 맞춰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감당하는 십자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값없이,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삶!!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무엇’ 때문에 감당하는 십자가가 아니길 바랍니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기에 감당하는 십자가요, 섬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올 한 해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나 혼자만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교회는 그래야 한다는 거지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어려우니 주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올 한 해,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길이, 동상이몽(同床異夢)!!
곧 주님과 함께 있음에도 다른 생각을 품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동행하며 살아갈 때, 올 한해도 행복하게 신앙의 삶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