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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러시아적인 한 사내의 생(生)
2011년 프랑스 <르노도상>, <문학상의 상> 수상작
2012년 네덜란드 <유럽문학상> 수상작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행동과 신념은 1989년 이후 소련 역사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혼란, 분노, 절망, <와일드웨스트>식 자본주의,
올리가르히에 의한 경제적 침탈, 보통 사람들이 가진 저축의 파탄,
매일매일 이어오던 평범한 상태의 상실 같은 것들…… 그 평범한 상태가
지루하고, 퇴색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을지라도. - 줄리언 반스
『리모노프』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삶을 추적한 전기다. 이 실존 인물의 삶을 풀어 가는 카레르의 방식이 아주 독특하다. 아름답든 추하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카레르 자신의 인생과 감상이 섞여 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 <기록 문학> 등으로 일컬어지는 카레르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작가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지고 얻어낸 문학적 성취>라고 말했다. 한 치의 소설적 허구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이 담긴 『리모노프』.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리모노프의 삶과 자연스럽게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카레르의 치밀한 문장들이 어떤 소설보다도 강하게 독자를 매료시킨다.
영웅과 인종지말, 문인과 깡패를 오가는 한 사내의 파란만장한 삶
그 삶은 러시아 현대사 전체와 무수히 교차한다
『리모노프』의 주인공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를 두고 카레르는 <역사에 몸을 던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카레르는 리모노프의 위험천만한 삶이 <그 자신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개인은 끊임없이 교차한다. 개인의 욕망, 사랑, 애정, 고뇌 같은 감정들은 시대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카레르는 리모노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 있다. 스스로는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남들 눈에는 인종지말로 비칠 수도 있다.>(본문 38쪽 인용)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삶, 쫓기듯 고향을 떠나 오른 미국 이민 길, 소련 해체, 러시아 공산주의 붕괴를 모두 겪은 사내. 여성 편력, 자기 연민, 자격지심, 일그러진 야망과 출세욕, 그러나 화려한 것들을 향한 조소, 자신은 배에 기름 낀 자들과 다르다는 자부심까지 가졌던 복잡한 인간 리모노프의 삶은 너무도 파란만장하고, 때로는 혐오감이 들 지경이며, 때로는 처연하기 그지없다. 리모노프의 삶은 소련 시절부터 현대 러시아까지의 시대와 무수히 많은 교차점을 지녔다. 맹렬히 몰아치는 시대의 폭풍 속에서 땅에 두 발 붙이고 서 있고자 이 악물고 버텨 온 그의 삶에는 모두 다 공평하게 가난했던 소련 시절의 추억, 소련 해체로 인해 소시민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혼란과 절망, 분노, 아수라장이 된 정치판까지 현대 러시아사가 모두 담겨 있다.
“나는 러시아의 유일한 지식인이다.”
러시아 정치계의 노장 록스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리모노프의 본명은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 사벤코다. 레몬을 뜻하는 러시아어 <리몬>, 수류탄을 뜻하는 <리몬카>에서 따온 리모노프라는 이름은 그 주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해 만들었다. 소련 시절 모스크바 언더그라운드 문학계에서 활동하면서 만든 이 예명을 그는 평생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러시아와 프랑스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다. 70~80년대 파리 문학계에서 데뷔작의 성공과 연이어 발표한 책의 호평으로 이미 유명 인사였으며,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두긴과 함께 <민족볼셰비키당>을 창당하고 강제 수용소를 거쳐 현재는 반(反)푸틴 운동의 주역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러시아 젊은이들에게는 록스타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존재다.
1943년 소련에서 하급 체카 요원의 아들로 태어난 리모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동경하며 자랐다. 아버지의 군화를 닦아 광내면서, 적군(赤軍) 거리를 걸으면서 전쟁 영웅이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러나 강인한 영웅인 줄 알았던 아버지는 일개 사병, 공장 앞에서 보초나 서는 인물이었고 결국 적군 거리에서 쫓겨나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의 시골 동네로 이주한다.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으리라 결심한 리모노프는 <아버지 같은 박봉의 조무래기 형사들뿐만 아니라 여자들과 깡패들, 진정한 사나이들까지 압도하는 사람이 되리라>(본문 59쪽 인용)는 목표를 세운다. 이후 소련 언더그라운드 문학계에서 시인으로 주목받다가 당시로서는 귀향을 보장받지 못하던 미국 이민 길에 오른다. 뉴욕에서 빈민으로, 노숙자로, 억만장자의 집사로 살면서 써낸 글이 파리의 전설적인 편집자 장자크 포베르의 눈에 띄면서 파리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러시아적인, 너무도 러시아적인 생(生)
태생적 기반으로부터 멀리멀리 뻗어나간 이 삶이
우리 삶도 한층 깊어지게 한다
뉴욕과 파리 문단의 총아로 자리매김했으니 안정된 문인의 삶을 이어 가도 됐을 텐데, 발칸 반도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리모노프는 세르비아로 날아간다. 1992년 BBC에서 제작한 <세르비아 서사시Serbian Epics>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에는 리모노프가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세르비아군이 주둔한 고지대를 둘러보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카라지치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리모노프는 병사의 권유에 기관총을 붙잡고 포위된 사라예보를 향해 탄창을 비운다. 소설 『리모노프』를 집필하던 카레르가 이 다큐멘터리를 본 뒤 1년 간 집필을 중단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러시아에서 함께 이민 온 아름다운 아내 엘레나로부터 버림받은 뒤 뉴욕에서 부랑자로 살던 시절은 또 어떤가. 극빈자 구호 기관으로부터 월 278달러를 받아 근근이 연명하면서도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공원 놀이터에서 흑인 청년과 관계를 맺고, 센트럴 파크에 드러누워 부유한 자들을 원망하며 공책에 글을 끼적이던 시절이었다.
리모노프가 마냥 선량하고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카레르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고 말한다. 리모노프는 호주머니에서 시작 노트를 꺼내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만드는 시인이었다. 자기 여자에게는 맹목적인 애정과 충심을 퍼붓는 사내, 수용소에서 잡범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고 그들의 굴곡진 인생을 글로 쓰는 사내, 양심수로 수용소를 나설 때 평생 수용소에 있어야 할 수감자들이 건넨 <행운을 빈다>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내다. 시대의 거센 흐름에 휩쓸려 때로는 휘청거렸을지언정, 꿋꿋하게 버텨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리모노프. 인간으로서의 그에게 호감이 가든 그렇지 않든, 그의 삶이 매력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2012년 10월 1일 기사 전문 번역
<나는 러시아의 유일한 지식인이다.>
리모노프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2011년 르노도상 수상작의 특별한 주인공일 뿐 아니라 현존하는 러시아 작가다. 그는 민족볼셰비키당을 창당해 블라디미르 푸틴과 대립각을 세우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 야당 인사이기도 하다.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눈에 블라디미르 푸틴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별 볼 일 없는 황제를 연상시키는, 거짓말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현대 러시아 특집>으로 11월 호를 준비 중인 에서 리모노프를 인터뷰했다.
Books: 당신을 소재로 쓴 책에서 엠마뉘엘 카레르는 <나는 푸틴이 그릇이 큰 국가 지도자라고 생각하며, 그의 인기가 단순히 관영 언론 매체를 통한 세뇌 덕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고 썼다. 카레르의 생각에 동의하나?
리모노프: 카레르의 견해는 외부 관찰자의 입장일 뿐이다. 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푸틴은 옐친의 후광을 업고 후계자의 자격으로 권력을 잡았다. 2000년 이전만 해도 그는 정치 경험도 당내 권력 투쟁 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었다. 한 마디로 정치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사람이 주먹구구식으로 정치를 배우는 사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봤다. 그가 인기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건 러시아의 국가 원수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이 신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옐친 집권 때 이미 무너진 국가가 푸틴 하에서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푸틴은 러시아라는 국가의 뼈대 자체를 와해시키고 있다. 그를 보면 로마 제국 말기의 별 볼 일 없는 황제가 떠오른다.
Books: 러시아인들은 정말 <관영 언론 매체에 세뇌>되었나?
리모노프: <러시아인들>은 상이한 여러 집단의 집합체이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는 구성원들이 모인 잔잔한 바다가 아니다. 코도르코프스키 사건 후에 부자들은 푸틴을 두려워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지식인 사회는 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자유를 억압하는 그를 증오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 층은 은퇴자들밖에 없다.
Books: FSB가 푸틴에 충성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푸틴이 FSB에 충성하고 있는 것인가?
리모노프: FSB 장교들에게 푸틴은 구세주 같은 존재다. 자신들의 집단을 모욕과 무기력으로부터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 푸틴은 FSB 조직의 고위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충성을 다하면 구세주가 잊지 않고 시혜를 베푸니 대부분의 FSB 장교들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Books: 당신은 현재의 러시아 정치 체제를 어떻게 규정하나? 전제적 민주주의? 민주주의적 군주제? 마피아 집단의 과두제? 아니면 무엇인가?
리모노프: 스탈린은 NKVD를 등에 업고 폭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고, 푸틴은 지금 거짓말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적 특수성을 지닌 특별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시늉만 할 뿐, 실상은 경찰 국가, 거짓말의 제국이다.
Books: 현재 러시아에서 지식인들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나?
리모노프: 엄밀히 말해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러시아에 나밖에 없다. 인텔리겐차 전체가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케케묵은 생각들을 우려먹고 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다.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Books: 당신은 지금도 스스로 민족볼셰비키주의자라고 생각하나?
리모노프: 나는 현재 <드루가야 러시아>의 집행 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족볼셰비키당은 2007년 4월 19일, 모스크바 법원의 판결로 활동이 금지됐다. 민족볼셰비키당의 당원이었다는 죄로 시민들이 체포돼 재판을 받았고, 지금까지 옥살이를 하고 있다.
세면대를 보며 그는 아련한 생각에 잠겼다. 동료 수감자들 중에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상한 뉴욕 호텔의 고상한 투숙객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들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 본문 37쪽
온전히 이런 시인의 삶을 살기 위해 그에게 필요했던 딱 한 가지, 우중충한 우크라이나 농사꾼의 성이 아닌 참신하고 그럴듯한 성이었다. 하룻저녁은, 안나의 집에 모인 패거리들이 재미삼아 각자 성을 하나씩 새로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로냐 이바노프는 아제야로프가, 사샤 멜레호프는 부한킨이, 에두아르드 사벤코는 에드 리모노프(<리몬>은 레몬을, <리몬카>는 수류탄을 뜻하는 만큼, 그의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한 작명이었다)로 재탄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의 재미로 끝냈지만 에두아르드는 이때 만든 필명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는 이름마저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 본문 91쪽
신바람 나는 삶의 방식은 아니지만, 괜찮았다. 다들 요령껏 살았다. 정말 어리석은 짓만 안 하면 크게 잘못될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시큰둥했고, 정치 얘기는 그저 술자리의 안줏거리에 그쳤다. 무기력이 존립 근거인 이 체제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은 건재하리라고, 솔제니친을 뺀 모두가 확신하던 시절이었다. - 본문 97쪽
내가 이미 앞에서 비슷한 장면을 한 번 쓴 것 같다. 픽션을 쓸 때는 선택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한 번은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다. 권장 사항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두 번은 과하다. 반복의 위험이 있다. 현실에서, 나는 리모노프가 여러 번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 넘어지고, 의지가지없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그토록 망가지고, 처절하게 외롭고 곤궁해도, 역정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필연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힘을 얻고, 언제나 털고 일어서고, 언제나 다시 전진한 것은 내가 리모노프를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다. - 본문 213~214쪽
우선,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모범적인 집사 에두아르드가 지붕 밑에 있는 그의 방에서 내려와 2층에 있는 <마스터 베드룸>을 차지했다는 사실. 주인의 실크 시트 위에서 뒹굴고, 주인의 욕조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주인의 옷을 걸쳐 보고, 주인의 폭신폭신한 카펫 위를 맨발로 걸어다녔다. 주인의 서랍을 뒤지고, 주인의 샤토 마르고 와인을 꺼내 마시고, 당연히, 여자들도 불러들였다. 거리에서 낚은 여자들, 그것도 더러는 두 명을 한꺼번에 데려와 섹스를 하면서 킹 사이즈 침대 위에 적당한 각도로 걸려 있는 베네치아산 대형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올려다보았고, 여자들 앞에서 집주인은 아니라도 집주인의 친구 정도는 되는, 동급의 사람인 양 행세했다. - 본문 216쪽
알리에의 집과 가깝다 보니 에두아르드는 정기적으로 편집 회의에 참석했고, 이따금은 나타샤도 데려갔다. 갈수록 편안하게 느껴졌다. 극좌와 극우가 어우렁더우렁 술에 취하고, 극히 상반되는 의견들도 논쟁이라는 상스러운 형식으로 귀결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환되었다. 사람들은 알리에한테서 원고료를 떼이지 않는 비법(<한 손으로 기사를 내밀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폐를 받아 쥔다>는 솔레르식 기술)을 공유하고, 알리에와 대판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고, 화해하고, 불면증 환자인 그에게서 새벽 다섯 시에 걸려 오는 전화를 자다가 일어나 받았다. 인쇄업자한테는 대금 결제를 못 하고, 변호사한테는 수임료 지급을 못 하고, 채권자들은 장사진을 치고, 명예 훼손 소송이 줄을 잇는 속에서 어느 누구도 다음 호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보주 광장의 풍경까지 한몫해 에두아르드는 청소년 시절에 열광했던 『삼총사』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 본문 275쪽
옛날에는 사는 게 고생스러웠어도, 구시렁구시렁 불평은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가가린,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강한 군대, 광활한 제국의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서양보다 공정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글라스노스트> 이후로 고삐가 풀린 표현의 자유 때문에 맞은편의 사내 같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1917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한 자들은 모두 사디스트고 살인자이며 작금의 참패를 불러 온 장본인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었다고 에두아르드는 판단했다. - 본문 301쪽
나는 어디서도 길을 헤매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타인들을 향해 가고, 타인들이 나를 향해 온다. 자연스럽게 맺어진다.
리모노프
1억5천만 명에게 그들이 살아온, 그들의 부모, 그들의 조부모가 살아온 60년의 세월, 그들이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해 왔던 것, 그들이 숨 쉬던 공기나 다름없던 것, 이게 전부 쓰레기라고 말할 권리는 우리한테 없다. 공산주의가 끔찍한 짓도 했다. 동의한다. 하지만 나치즘과는 달랐다. 서방 지식인들이 이제 아주 당연하게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것은 모욕이다. 공산주의는 위대하고 영웅적이며 아름다운 어떤 것,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에게 신뢰를 준 어떤 것이었다. 그 속에는 순결함이 있었다. 그래서 뒤를 이은 야멸찬 세상에서 누구나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어렴풋이 자신의 유년기를, 불현듯 가슴이 북받치며 눈물이 쏟아지는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블라디미르 푸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