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로 돌아가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그 도시에서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눅 24:49).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저 제자들처럼 우리도 역시 이 약속이 우리의 삶에서 경험될 때까지 머무를 필요가 있다. 그런 경험은 오순절에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그분의 보혈로 구속되고 그분의 사역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중인들이 된다.
성령의 창조 능력
우리는 통치의 성부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계시의 성자 하나님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서 활동하신다.
우리는 창세기 일장에서 성령을 소개받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성령은 우주를 탄생시킨 하나님의 에너지였다. 똑같은 권능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것을 지금도 붙드시고 있다(시 104:30 ; 사 40:12).
성령의 창조 기능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실 때에 각별한 관심을 받으신다(창 1:26). 우리는 하나님이 ■코에 그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을 듣는다(창 2:7).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생기■는 ■성령■이란 단어와 어근(語根)이 같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만드신 피조물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으며, 그 결과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그런 이유 때문에 용도 이렇게 증언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과 교제하면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죄로 인해 깨어졌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은 타락한 족속을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지만 (창 6:3 ; 시 139:7를 비교), 성령의 내적 임재는 상실되었다. 우리의 조상은 타락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도 잃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려면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성령으로 나야 한다■(요 3:3, 7-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요 3:5-6).
그뿐 아니라, 성령은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끊임없이 양육하게 건강하게 하신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의 역사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의 원천에 비유된다(요 7:38 ; 4:14). 성령은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신다(롬 8:14 ; 갈 4:6).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롬 8:26-27). 성령은 우리의 예배를 가능하게 하신다(요 4:24). 성령은 진리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주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가르치신다(요 14:26 ; 16:13; 요일 2:7).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된 성품을 들어내게 하신다(갈 5:22-23). 그리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점진적으로 ■점증적인 영광으로■ 예수님을 닮아간다(고후 3:18).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가 일구시는 구원의 삶에 참여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구약 성경에서 종들의 무장
여러분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길을 예비한 분도 역시 삼위 가운데 성령이시다. 구약성경에서 그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나, 시시때때로 성령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무장시켰고, 그 결과 그들이 구원의 계획을 펼쳐나가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이 애굽에 있는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창 41:38).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도록 모세를 권한을 주셨다; 성령은 모세를 돕도록 70명의 장로를 준비시키셨다(민 1137; 25-26, 29).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에게 성막을 지을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부여하셨다(출 313 ; 3531). 성령은 다른 사람들이 아론과 제사장 아들들을 위하여 복장을 만들 수 있게 하셨다(출 283-4).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거룩한 성령이 역사하면서 국가를 형성하여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학 2:5 ; 사 30:10). 성령은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사사들을 일으키셨으며(민 27:18 ; 신 34:19), 후에는 왕들을 일으키셨다(삼상 10:6 ; 11:6 ; 16:13 ; 삼하 23:1-2). 불행하게도, 이들 지도자들은 종종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망각했으며 성령은 그들을 떠났다(삼상 16:14 ; 삿 15:14; 16:20).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는 동안, 그들로 하여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거룩한 삼위 가운데 세 번째 분이시었다.
때때로 성령은 선지자들 위에 임하여서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그들을 감동하셨다(삼상 19:20, 23 ; 삼하 23:1-2 ; 에 11:5, 느 9:20 등). 그들이 한 말과 그들이 나중에 성경에 기록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벧후 1:21 ; 딤후 3:16).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계획이 메시아의 도래로 절정에 이룰 한날이 제시되었다. 처녀가 임신을 할 것이며, 그녀는 엄마뉴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이라고 불리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사 734; 마 1:23). 다윗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이 가지 위에 주님의 영이 무한정 머물 것이다. 그분을 통하여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며, 그 때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다(사 3:15 ; 욜 2:28-32).
예수님의 사역
이미 예언된 대로 때가 차매, 성령은 그 처녀의 태내에 아버지의 씨를 심으셨다. 그녀는 임신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다(마 1:18, 20 ; 녹 1:35). 그 이후 성령은 성육신 하신 그분의 삶을 인도하셨는데, 제한적이거나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무한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인도하셨다.3)
성령의 충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각별한 주의를 끌기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그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을 선언한다(마 3:11 ; 막 1:8 ; 녹 3:16). 요단강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주님에게 임하시는 것이 보였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했다(마 3:13-17 ; 막 1:9-11 ; 녹 3:21-23).
예수님은 나사렛에 있는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분은 일어나서 이사야로부터 다음을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그 말씀을 읽으신 후 예수님은 앉아서 놀라워하는 회중에게 이런 선언을 하셨다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권농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증거한다(마 12:27-28). 물론 그리스도의 주장을 거부한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반대를 선택하였고, 따라서 예수님이 마귀와 결탁했다고 비난했다. 그 말에 예수님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그들이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를 범하는 지경까지 가고 있다는 경고를 하셨다(마 12:31-32 ; 막 3:28-29).
분명히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상존(常存)하면서 그분의 삶이 거룩한 계시가 되게 하셨다. 그분의 말과 행위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분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홈 없는 자기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으며■(히 9:14), 그 후 같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롬 8:11).
그리스도의 사역은 계속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신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역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에 의하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제자들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보다 큰 일도■ 할 수 있도록 무장될 것이다(요 14:12). 그 약속은 오순절 이후 성취되기 시작한다.
제자들은 그 사역이 쉬우리라는 환상 가운데 있지 않는다. 진정으로, 그들은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미움을 각오하고 있었다(욥 14:18-27). 그러나 그들이 핍박을 받을 때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성령이 그들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10:16-23 ; 막 13:11 ; 녹 12:12). 성령은 아들을 높일 것이며, 사람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그들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을 것이다(요 16:8-11).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대단한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다. 어떤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며 설득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맡기기만 하면 된다.
성령이 메시지를 활용하셔서 마음이 깨어져서 상한 청중을 구세주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다른 보혜사
세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자,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들과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특별히 주의를 집중하셨다. 그 가르침은 유월절 만찬 후 그들이 다락방에 모였던 날 밤-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아주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곧 떠나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제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실 사실 때문이다. 그분이 하늘로 돌아가시면, 아버지에게 구하여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그분을 대신하게 하실 것이다(요 14:16-17).
예수님은 어떤 신학적 추상, 곧 어떤 이론을 말씀하시고 있지 않는다. 그분이 가리키는 분은 본인과 같은 진정한 인격이다; 그들 곁에 서 있을 ■다른 분,■ 곧 영적으로 그들과 향상 함께 하실 분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그들의 상담자이며 선생이시었으나, 이제는 성령이 그 기능을 감당하신다. 성령이 그들의 질문에 답하실 것이다(요 l6:13); 성령이 그들에게 미래를 보여주실 것이다(요 16:23); 성령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역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요 14:12).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요 16:14).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과거의 어떤 경험보다도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것이 될 판이었다. 육체로 거하신 예수님은 한 몸과 한 장소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런 육체적인 장애물들이 제거된 이상, 제자들은 끊임없이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그들에 게 이런 보장을 하신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들의 사역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사실 때문에 지상명령은 살아서 역사를 이룬다.
예수님이 세상에서의 역사를 마친 후 하나님의 오른 편으로 높이 들리실 때까지 그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요 7:39; 행 2:33). 그러나 하늘의 보좌에서 지고(至高)의 자리를 차지하신 후, 성령이 고대하는 교회에 능력으로 임재하실 터인데, 몇 년 동안이 아니라 한 세대 동안이며; 소수의 선택된 개인들 위에가 아니라, 그분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 위에 임하실 것이며;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받을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지금 누릴 수 있는 교제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이런 능력을 받을 때까지 머물라고 하신 이유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눅 24:49 ; 행 1:5, 8).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분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보좌에 앉으신 그들의 주님이 그들의 삶에서 살아있는 실제가 되지 않으시면 안되었다. 그들이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분의 사명은 결코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오순절 부으심
오순절날 바람과 불과 방언으로 입증된 기다리던 권능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날 부어주신 성령의 지속적인 영향은 그 사건을 극화(劇化)시킨 표적들에 있지 않았다. 능력은 저 기도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충만케 한 성령 안에 있었다(행 2:4). 그들의 경험은 그 이후의 사도 교회를 살펴볼 때 거듭거듭 반복된다. 그들과 육체적으로 함께 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마음에서 주권자로 통치하셨다; 그분은 그들 안에서 삶과 능력이 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부여(賦與)의 환전한 의미는 우리가 사도행전을 원어가면서 점증적(漸增的)으로 들어 난다. 기쁨에 찬 확신은 제자들의 증거를 담대하게 한다! 제자들은 의도의 순수성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두드려 맞고 돌에 맞을 때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무엇인가 달랐다.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 어떤 관찰자가 기록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충만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갈등과 사소한 골칫거리 같은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존재하는 한, 신약성경이 너무나 분명히 하고 있듯 육에 속한 성도들은 주님의 기대에 미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순절을 새로운 기원(紀元)으로 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중인들이 세상에서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계속적으로 전할 것이다. 물론 그 날 성령의 부어주신 역사적인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신 성령의 부여는 모든 세대에도 계속된다. 베드로가 선포한 대로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라
그렇다면 왜 모든 신자가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하는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예수님은 말씀하셨다(눅 11:10). 그리고 나서,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땅의 아버지가 악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충만한 성령을 받기 위하여 그런 충만을 방해하는 것을 마음에서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알려진 죄가 있다면 그 죄를 고백하고 또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장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분을 주님으로 모셔야 한다. 물론 그분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무한한 인격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남김없이 드릴 수 있다.
우리가 순종을 통하여 그분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분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의 범위는 넓어진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에서 중단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사역 때문에 보다 많은 감성과 능력을 필요로 할 때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 임무가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지상명령의 떠받치는 능력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물론 신학자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상존의 구주요 주님의 실제이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으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와 같이 마음을 살피면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인데, 거기에서 믿음의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성도들에게 부흥을 허락하신 그런 헌신이며, 때때로 그 부흥은 능력으로 퍼져나가서 민족들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부흥
교회사는 실제로 이와 같은 위대한 각성이라는 견지에서 기록될 수 있다. 한국의 교회는 아름다운 실례이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으로 탄생된 교회는 5년이란 짧은 기간에 교인수가 4배나 증가했다. 어느 존경을 받는 교회 지도자가 친구들 앞으로 나아가서 그의 교만과 굳은 마음을 고백했을 때 부흥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고뇌에 찬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당장에 죄에 대한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이 회중 전체로 퍼졌고, 마침내는 전국으로 퍼졌다.
평양에서 1907년 어느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했습니다.■묘사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느낌이.■모든 회중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성령으로 태어난 한 사람이 위에 계신 아버지에게 올려졌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평양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남자마다 일어나서 죄를 고백하고 깨어져서 울었습니다.■ 그 회중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서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루에 완전히 엎어졌습니다; 수 백 명이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펴고 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잊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넘침은 평양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함으로 마감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각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 오순절의 불길을 가지고 갔다.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마다 같은 성령이 흘러나와 퍼졌다. 실제로 그 반도에 있는 모든 교회가 축복을 나누어 받았고.■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이와 같은 부흥의 불결은 한국 교회를 통해 100년이나 흘러 내려오면서,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로 육성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영이 최근에 감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부터 새로운 능력의 부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
나는 몇 년 전 이런 부흥을 내가 가르치던 작은 대학에서 보았다. 그 때는 월남전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던 1970년이었다. 미국 전역에는 불안과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특히 대학교에서 그랬다. 그러나 어느 날 애즈베리 대학교 학생들이 이상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2월 3일 일상적인 예배 중에 시작되었다. 4학년 학생이 일어나더니 그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위선자였다는 고백을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위선적으로 신앙고백을 했다고 하면서, 급우들에게 그의 부정직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어느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가까이 계심을 느꼈다.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단에 학생들로 가득했으며, 복도와 앞자리도 학생들로 넘쳐났다. 회개의 눈물을 뿌리면서 진지한 간구가 쏟아져 나왔다. 예배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렸으나 아무도 강당을 떠나지 않았다. 수업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간구는 오후에도 계속되었다. 수업이 중단되었다. 농구시합도 연기되었다. 교내의 모든 일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순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학 내 어디에서나 기도의 소리가 들렸다.
인근 도시에 있는 뉴스 진행자가 그런 사건에 대해서 듣고 알아보기 위해 왔다. 그 날 저녁 중요한 시간대의 뉴스 시간에 그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신문도 내려놓고, 그들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가 그 날 영상에 담은 부흥의 광경을 보라고 하면서 그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나는 이런 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말했다, ■비록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지금도 믿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 능력의 임재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성령의 부으심은 밤새도록 계속 되었으며 사람들이 주님을 계속해서 기다리는 동안 다음날과 밤에도 계속되었다. 거기에는 고백과 자유도 있었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도 있었다.
성령에 충만한 학생들은 그들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들은 길가에서, 이발소에서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증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어난 것을 알고 싶어서 방방곡곡에서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그 대학교로 몰려오고 있었다.
8일 동안 밤낮으로 부흥은 계속되었다-한 번의 중단도 없이 185시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마침내 수업이 다시 시작된 후에도 매일 저녁 학생들은 교수들과 방문객들과 함께 대학 강당에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이 이루고 있는 일을 찬양하였다. 그런 집회는 흔히 자정이 훨씬 지나도록 계속되었으며, 6월에 있는 졸업식까지 4달이나 지속되었다.
그 부흥의 초기의 영향이 가라앉기 전에 실제적으로 그 대학의 모든 사람과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다. 그 이야기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증인들에 의하여 미국 전역의 수많은 곳으로 전해졌다. 믿음의 불길이 당겨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그 불길은 타고 있으며 아직도 끝에 이르지 않았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여러분의 삶과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부흥의 영향을 경험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부흥이 오는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실제이다.
이와 같은 능력의 개인적인 증거가 많은 교회에서 벌떼같이 일어나서 마음을 바로 잡은 다른 사람들과 합하여, 연합기도라는 큰 운동을 일으키고, 세계를 향한 열심과 전도를 통해 자라다, 마침내 하늘이 보내는 강력한 각성이 모든 하나님의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성령 충만한 중인들은 모든 언어와 족속과 민족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모으자.
이것은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한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 이상의 것이다-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주시는 약속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여러분은 이처럼 약속된 능력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개인적인 부흥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깨끗케 하는 오순절의 불이 여러분의 삶에 남아 있는 찌끼를 태워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라.
참고 도서
부흥에 관한 책
- 웨슬레 듀웰, 부흥의 불길, 안보현 역, 생명의 말씀사, 1996.
위 책의 내용 중 41장 대학가에 붙은 부흥의 불의 내용을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