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소년의집 사업을 시작한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의 구호병원 같은 무료 병원이 서울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서울에 더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 소년의집 아이들이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아프게 되면 부산까지 가야하는 것도 문제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일반병원에 보냈다. 하지만 고아원 아이라 해서 무시와 푸대접을 받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알로이시오 신부는 더욱 무료 병원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고아들은 일반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해 주기는 했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돈벌이가 안 되다 보니 온갖 멸시와 차별을 했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계획을 안 뒤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 역시 도티 씨 부부였다. 그리하여 1982년 6월29일, 도티 씨 부부가 전액 기부한 돈으로 서울 소년의 집 안에 120개 병상 규모의 무료병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티 씨 부부의 후원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병원이름을 ‘도티기념 병원으로 정했다.
도티기념병원 개원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도티 씨 부부는 갓 졸업한 막내아들 빌을 데리고 왔다. 그때 도티 씨 부부는 자신들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 안의 고급 양복점 대신 이태원에 있는 보통 양복점에서 자신과 아들 빌의 양복을 맞춰 입었다.
개원식이 끝난 뒤 도티 씨 부부는 알로이시오 신부가 입고 있는 양복이 10년도 더 된 것 같다면서 이태원에 가서 양복을 한 벌 맞추자고 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은인 중에서도 최고의 은인인 도티 씨 부부의 호의를 마다하고 입고 있는 양복으로 만족한다면서 사양하고, 또 사양했다. 그러나 도티 씨 부부의 계속된 권유를 사양하기가 어려워 마지못해 이태원으로 갔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평생 구두나 양복을 맞춰 입지 않았다. 필요하면 기성화나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도티 씨 부부를 따라 양복점에 간 것은 알로이시오 신부에게 한 번으로 족했다.
도티 씨 부부와 아들 빌은 다음날 다시 가서 가봉까지 끝내고 양복은 우편으로 받기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가봉하러 오라는 양복점의 전화를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그냥 마무리 바느질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찾아오게 했다. 그리고 그 양복은 예의상 몇 번 입었을 뿐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도티 씨는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성배 시장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알로이시오 신부와 서울시장의 추천으로 받게 된 훈장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호텔 1층 휴게실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도티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미국은 물론 외국의 수많은 자선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자선 사업은 한 푼의 낭비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와주는 만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게다가 무척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도움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
도티 씨는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의 노고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오면 아이들을 위해 쓰지 말고 꼭 수녀들을 위한 소풍 비용으로 쓰라며 따로 특별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
출처- AL연구소
*박사님이 근무하던 병원이야기라 옮겨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