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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6 : 7 -8 넷째 생물 청황색 말 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둘째,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의 주의 말씀과 일치한다.
이것은 주의 재림 직전의 대 환난 시대의 징조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치신 바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시대가 혹시 그 시대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셋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대 환난에 대비하는 굳건한 믿음과 충성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들과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신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참된 믿음과 충성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마태복음 16: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청황색 말과 그 탄 자 ( 박 조준 목사)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세 마리의 말이 요한의 환상 속으로 뛰어들었고 심판의 기수들을 태운 채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린양은 하나님의 크신 명령을 담은 네 번째 인을 떼시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직전에 하나님께 임명받은 사자 중의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네 번째 말과 그 탄 자를 보여주는 페이지가 펼쳐졌습니다.
본문 8절에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했습니다. “청황색”이란 헬라어는 ‘클로로스(ϰλωρός)’인데 이것은 풀이 병들어 누렇게 된, 그러니까 노란 초록색입니다. 어떤 이는 ‘클로로스(ϰλωρός)’를 ‘잿빛’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바클레이는 그것을 ‘공포로 창백해진 얼굴의 빛깔’로 부릅니다. 마펫은 그 말을 ‘시체의 핏기 없는 검푸른 색’으로 말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요한은 너무너무 무서운 광경을 마주 보았습니다. 청황색 말탄 자는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하였습니다.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는 말은 수세기 동안 학자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청황색 말 위에 죽음과 함께 탄 제 2의 사람이 있는가, 아니면 계시록에 제 5의 말을 탄 자가 등장하는 것일까?”하는 것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음부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죽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으로 죽은 자의 임시 처소입니다. 그 곳은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영혼들을 얼마 동안 수용하는 곳입니다.
죽음과 음부에 대해서 말할 때 요한은 “저희가 권세를 얻어”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의 네 번째 말탄 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말과 그 탄 자가 잠깐 걸음을 멈춘 순간 하나님과 죽음 사이에서 생긴 어떤 일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4분의 1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말탄 자에게 준 것입니다.
200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60억을 넘을 것인데 4분의 1이라면 15억이란 숫자입니다. 현재 유럽과 남미 그리고 북미주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처참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글래스고우 대학의 위대한 스코틀랜드 교수였던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나라도 자신의 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The Interpreter’s Bible」 제 12권 414페이지에 보면 워드 휴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여기에서의 사망은 무의미한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목적을 수행하는 파괴임을 의미합니다. 지상의 4분의 1이 그의 진노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들여보냈던 잔인 무도한 일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을까요? 그의 백성이 무참히 죽어갈 때 그의 가슴은 찢어질 대로 찢어졌을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었는데 고의로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람은 그 불순종의 결과로 사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이 사랑의 증거를 통해 그리고 넷째 말탄 자의 경고를 통해 모든 인류가 죄의 삯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 음부의 사나운 갈퀴로부터 구조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인류가 영원히 산다면 이 세상은 벌써 지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본성이 악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기까지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둘째 사망 또는 영원한 사망을 말합니다. 그것은 지옥을 말합니다. 이 말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아니라 사망을 택한 수억의 인간들을 깨우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제시한 사랑이 받아들여지고 그가 주시는 경고가 효력을 나타낸다면 그 수억의 인류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사망의 무기들이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검, 흉년, 사망 그리고 땅의 짐승들입니다. 바클레이는 이 환난은 레위기 26장 21~26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불순종하는 까닭에 내리셨던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땅의 짐승들은 백성들에게서 그 자식들을 빼앗고 가축들을 죽여 거의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검은 언약을 어긴 백성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들이 성에 모여 있을 때 온역이 퍼질 것입니다. 그는 식량의 원천을 치실 것이며 백성들은 먹으나 배를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살인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은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말씀했고 같은 구절에 살인을 즐기는 마귀의 욕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하였습니다. 본문 6장 8절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을 검으로 죽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청황색 말에 관한 계시록 6장의 이 구절은 아마도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문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입니다. 아모스서 8장 11절에 보면 말세에 하나님의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영적인 기근에 이어 영적인 죽음이 올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육체적인 사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5~28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 몸에 염병이…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나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사나운 짐승들이 동물원이나 곡마단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개한 나라에서는 맹수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본문에서도 “땅의 짐승으로써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동물과 곤충에서 생긴 전염병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인을 떼실 때 우리는 에스겔서 14장 21절에 열거된 네 가지 심판-검, 기근, 염병 그리고 사나운 짐승-으로 땅의 4분의 1을 죽일 권세를 받은 사망과 음부를 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풍요와 편리 그리고 장수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염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강의 왕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영구적인 평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겨왔습니다. 그래서 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청황색 말에 탄 넷째 사람은 칼, 기근, 염병 그리고 사나운 짐승들로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를 막을 만한 사람이 누굽니까? 넷째 말탄 자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인을 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세상에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이지만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앞서 생각한 계시록 1장 18절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했습니다. 사단이 욥의 가족을 죽일 때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 그의 모든 속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의 영리함과 궤계와 권세가 포함됩니다. 더구나 인간이 사단에게 굴복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죄가 어떻게 대대로 유전되는가 하는 것도 포괄합니다.
이 세상의 지적인 불신자들은 그 삶이 무의미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고, 또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우주의 암흑 속에서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은 우리가 향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잘 압니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큰 위로를 주기 위해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아니한다면 영원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인 자살을 기도할 수는 있지만 그의 영혼을 스스로 파괴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면 사망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첫째 사망이란 육체적인 죽음, 즉 육신과 영혼이 갈라서는 것이고, 둘째 사망이란 영적인 죽음, 즉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영영히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네 번째 청황색 말을 탄 자는 죽음을 가져오며 음부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내려질 때, 가까워지는 말굽 소리를 듣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믿음으로 구원받으라고 주님께서 거듭거듭 경고하고 있습니다. 옛날 세례 요한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백성들을 경고했던 것처럼 청황색 말탄 자의 손에 들리워진 칼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둘째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각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세계 복음화의 성공과 연관지어 말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넷째 말을 탄 자는 죽음을 가져오는 자입니다. 그는 칼과 기근과 온역과 사나운 짐승 같은 네 가지 치명적인 무기로 무장합니다.
첫째 무기인 칼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넷째 말탄 자는 우리를 향하여 검을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무기의 힘을 빌어서 스스로를 구하려 하면 우리는 죽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경고하였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사 31:1)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20편 7절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항상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 무기는 기근입니다.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세상의 굶주린 자와 병든 자들을 위해 무슨 일인가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실 권세와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단의 시험의 하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사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셨다면 그는 세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육체적인 욕구의 만족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필요성을 멀리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그 영원한 구속의 권능이 첫째 목표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우리는 세상의 굶주린 자들과 병든 자를 도움으로써 그를 순종하고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셋째 무기는 염병과 괴질로 인한 죽음입니다.
이 비참한 질병들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넷째 무기인 사나운 짐승도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나운 짐승들은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터지고 피흘리는 세상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부자 청년이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 청년이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성실하고, 열심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 큰 대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심히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눅 18:18~23). 이 청년은 평생에 한 번뿐인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는 영생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생활 수준에, 자신의 안정에 집착했고 그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富)를 포기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시기를 바라시며 사람에게 재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의 문제는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일보다 부를 더 중히 여겼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주님께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밧줄을 끊어버려야 주님을 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금전의 가치에 집착한 그 청년은 너무도 귀한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일 뿐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 믿고 집착했으며 그 집착으로 인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주었더라면 그리고 만약 그가 자기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겼더라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넷째 말탄 자가 달려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넷째 말탄 자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나이가 많았을 때 자녀들에게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창 27:2)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의 죽을 날을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남기고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합니다.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존재임을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청황색 말과 그 뒤를 따르는 음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대적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지옥을 친히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죽음은 두렵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입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죽음은 전혀 쏘는 것이 아니며 공포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시인하고,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피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 마음의 평화와 구원에 대한 개인적인 영원한 확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큰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 확신이 생길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변화한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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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