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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묵상글 ( 연중 제11주일. - 작은 씨가 큰 나무 되게 하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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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씨가 큰 나무 되게 하려면
오늘 복음은 겨자씨 비유인데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게 하려면.
첫째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데
씨를 아예 뿌리지 않으면 애초에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인간의 행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것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도 유효해지겠지요.
이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곧 인간이 할 바를
다한 다음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과도 통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왜 뿌리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가능성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불신인데
이는 가능성 곧 희망에 대한 불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신망애 삼덕 중에 믿음과 희망과 관련 있고,
희망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애덕이 없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능성을 덜 믿고 포기도 빨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빵 다섯 개와 두 마리의 고기가 수천 명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을 우리가 하기 쉬운데
이것은 그것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주님과 너무도 다르지요.
주님은 이것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이것으로 수천, 수만 배 불려주실 하느님께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실 수 있는 아버지의 능력과 그렇게 해주실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신 겁니다.
이런 주님과 달리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능력도 사랑도 없다고 믿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불신도 믿는 것인데 다만 하느님도 우리와 같을 거라고
믿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이어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고,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불치병 자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낳을 것이라고 끝까지 믿는데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믿음과 희망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망애 삼덕이 우리에게 있어야 씨도 뿌리고 자라게 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지레 포기하지 말고 뿌려야 할 작은 씨는 실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작은 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의 좋은 생각이나 선의나 선행입니다.
세상의 거악에 비하면 우리의 좋은 생각이나 선의나 선행은 너무 보잘것없고,
그래서 그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동체를 바꾸려고 해도 우리 공동체는 꿈쩍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좋은 내 생각이나 선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포기합니다.
그런데 제 자랑 같지만 제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일을 벌이는 것은
제 생각이 나쁘지 않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
오병이어로 수천 명 먹이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평양에다 무료 급식소를 세워야겠다는 최초의 생각을 그래서 저는 접지 않았고,
그 최초의 작은 생각은 1, 500명을 먹이는 거대한 계획으로 자라났으며,
그것은 <평화 봉사소>라는 종합 복지관을 세우는 것으로 실현됐습니다.
이 복지관 마련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처음 계획했을 때
북한이 미사일을 쏴 음악회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처음 분위기는 냉랭했고 표가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어떻게 하면 표를 팔 수 있을까 궁리했는데
어느 날 저의 걱정을 하느님께서 한 자매님을 통해 깨주셨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니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비유 말씀처럼 우리는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다음엔 그것이 어떻게 싹이 트고 자라는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씨가 작다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땅이 나쁘다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자라게 해주실 것을 믿지 않으면,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아무것도 안 될 것이며,
아무리 하느님일지라도 아무것도 해주실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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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회 안에서 높은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들은 의사, 선생님, 운동선수, 정치인, 판사, 변호사 등 자기 분야에서 그래도 꽤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성공했다고 답변했을까요? 대부분이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성공은 아주 먼 미래에 있다’라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성공을 갈망하고 있고, 아직도 이 성공을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함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 관한 감사함이 있어야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셨습니다. 본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각종 성물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십자가의 길 등을 보시면서 계속 감탄하셨습니다. 1시간 정도만 머무르신다고 했는데, 2시간 넘게 머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곳 본당 신자들은 너무 좋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물이 있고, 또 멋진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니까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이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사 끝나기도 전에 성당 문을 나서며 돌아가시는 분들이 떠올려지면서, 누군가는 부러워하며 오래 머무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빨리 떠나고 싶은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내용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기보다는 불평불만의 마음으로 보기에 만족하지도 또 감사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는 마치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싹이 트고 줄기가 생기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습니다. 또 이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면서 풍요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새들이 그늘을 찾아올 정도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완벽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세히 보지 못하고 오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묻혀 바쁘게 사느라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만족과 감사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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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현자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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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오늘은 연중 11 주일입니다. 사랑이 불타오르는 6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 높은 곳으로 부터 품고 온 아버지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선사됩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1독서>는 유배지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고, 그 나무가 무성하게 하는 이가 당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17,22-24 참조)고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를 떠올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그들은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9)라고 하느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먼저, ‘씨’는 우리에게 선사됩니다. 선물로 주어집니다. 곧 주시는 분에 의해 건네 져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 혹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건네 ‘온’ 나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 있고, 스스로 줄기를 뻗고 싹을 틔우며, 이삭을 맺고 낟알을 영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곧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상호 침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곧 체험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들어오는’ 나라요, 동시에 ‘들어가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삭을 맺고 낱알을 영글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도록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와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작은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듯, 그 그늘에 짐 진 이들을 불러 안식을 주듯, 자라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작은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품고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작은이로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작은이로 계신 그 씨앗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썩기만 하면 말입니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게’ 그렇게 썩는다면 말입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고 낮아지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그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나라의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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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는 가짜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땅에서 하늘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군주처럼 남을 지배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철저히 섬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질서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잘 자라려면 씨 자체가 자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뿌려진 땅이 비옥해야 합니다. 비와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튼실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될 때 선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으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 투자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신앙생활, 편안한 방법으로 영적성장을 기대하거나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의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 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 씨앗이 아주 작다 하더라도 잘 가꾸어 그 말씀이 나를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 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나무 되어 모든이의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때를 기다리며 인내로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힘을 얻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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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쌀로 밥도 하고, 쌀로 떡도 하고, 쌀로 국수도 만들고, 쌀로 막걸리도 만듭니다. 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들의 땀과 눈물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 쌀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논에 물을 받습니다. 모판에 키운 어린 벼를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것이 ‘모내기’입니다. 벼를 너무 얕게 심으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물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런 벼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벼를 너무 깊게 심으면 숨이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벼를 ‘적당한’ 깊이에 심어야 합니다. 쌀을 나타내는 한자는 미(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을 수고해야 비로소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은 ‘밥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트에 가서 쌀을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때는 쌀가게에서만 쌀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과제를 주곤 했습니다. 쌀에 있는 작은 돌이나, 도정이 안 된 벼를 골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골라내면 아버지는 십 원을 주셨습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울타리가 되어서 신학생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는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양성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88번의 수고와 땀을 흘려 알곡을 생산하듯이, 신학교는 10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합니다. 2학년을 마치면 군에 입대합니다. 4학년이 되면 ‘독서직’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 사제의 복장인 ‘수단’을 입습니다. 5학년이 되면 ‘시종직’을 받습니다. 제단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시종직을 받으면 성체분배를 할 수 있습니다. 1989년에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종직을 받은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7학년이 되면 ‘부제품’을 받습니다. 부제가 되면 성직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아닌 ‘품’을 받습니다.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7학년을 마치면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가 되면 못자리인 신학교를 떠나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하듯이, 한 명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토, 국민, 정부’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자갈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큰 집과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지금 굶주린 사람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입니다. 지금 갇힌 사람입니다. 지금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물에 건져진 것 중에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양식이 되는 것만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밀밭에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은 모아 곳간에 넣어놓고, 가라지는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잘못한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는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밀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판별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지만 발효가 되면 커지는 누룩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비록 그 시작은 미소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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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주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스승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동전 한 잎씩을 줄 테니 이것으로 이 방을 가득 채울 물건을 사 오너라.
제자들은 각자 동전 한 잎을 건네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동전으로 방을 가득 채울 물건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물건을 사러 떠났습니다.
저녁쯤 제자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손에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손에 들려있는 물건으로는 방을 가득 채울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제자가 들어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동전 한 잎 가치의 초 한 자루가 들려있었습니다. 스승님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초 한 자루를 샀지?
제자는 대답하며 초에 불을 댕겼습니다.
스승님, 초 하나는 작지만, 이것에 불을 당겼을 때 나오는 빛은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승은 그 제자를 보고 미소를 지었답니다.
우리는 작은 초와 같습니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빛이 나기 시작하면 방 하나 혹은 그보다 더 넓은 곳을 빛으로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에 대한 비유도 같은 뜻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사랑을 품고 자라나기를 그래서 세상에 우리의 빛이 널리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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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카와 우리가 같은 점
트랙을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
누가 더 빠른지 경주하는 차.
이런 차를 ‘레이싱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레이싱 카에는 후진기어가 없다고 합니다.
한번 출발하면 후진할 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삶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나온 것을 회상할 수는 있겠지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그 안에는 후회라는 녀석이 늘 등장합니다.
돌아갈 수 없기에, 고칠 수 없기에 후회라는 단어는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후회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달려온 당신께 경의를 표합니다. 목표를 향해 지금도 열심히 걷고 있는 당신의 발걸음에 힘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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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마음과 공감의 눈
사랑은 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쁜 세상에 서로를 바라볼 여유도 없고, 서로 바라볼 수 없기에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사랑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두렵습니다. 경쟁에 뒤쳐질까 두렵습니다. 앞만 보며 내 갈 길만 열심히 가도 뒤쳐지고 있기에 주위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할 여유도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순간 스치는 눈빛에서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세히 보아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과 심장의 거리는 가깝고도 먼 거리입니다. 마음을 열면 수천 수만 배 넓은 마음이 되고, 마음을 닫아버리면 티끌조차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옹색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인간을 향해, 인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활짝 열려 있기에 소외되고 비참한 인간의 모습에 쉽게 자비의 마음을 느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공감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혼잡하고 거대한 도시에서 그저 이름없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붐비는 도시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나도 그 사람도 서로에게 무관심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학교에서 옆 사람의 눈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막히는 도로에서, 신호등에 서 있는 사람들의 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마음의 움직임을 느껴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가슴이 메어질 정도로 흐느껴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타인의 불행한 아픔에 함께 공감해 보십시오.
선교는 사랑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선교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시작은 반드시 주님의 사랑을 공감하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시작된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같은 공감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작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당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가족의 마음을 살펴보고 공감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힘들고 복잡한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2. 도움을 청하는 가족과 친구의 간절한 눈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합니까?
3. 이웃과 공감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녀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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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시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시편92,2)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후 2024년 6월16일 오늘까지 매일 써오는 강론이기에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날마다 산을 넘는 듯 매일 써도 처음 쓰는 듯 힘든 강론이지만 ‘살기 위해’, ‘더불어 살기 위해’ 씁니다. 한 밤중 일어나 맨먼저 하는 일은 만세칠창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는지 전무후무(前無後無),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도 않다.”
며칠전 이태리에서 열렸던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서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인공지능에 경각심을 촉구하는 지혜와 통찰로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일곱정상들 한가운데 위치한 교황님의 사진 모습을 보면서 명실공히 정신적 세계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세계 각처에서 바티칸의 교황님을 찾은 100여명의 코미디언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역시 어제 교황님을 방문한 사업체 지도자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은 물론이요, 환경, 가난한 이들,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폭넓은 시야와 관심과 도움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만나는 옛 어른의 말씀도 분발의 용기를 줍니다.
“거듭 천 번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이다.”<다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한다.”<중용;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책으로 논어, 대학, 맹자와 더불어 사서에 속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깨달은에 이를 수 있음을 일상의 삶은 물론 고전을 치열히 폭넓게 섭렵하면서 반추한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공부에 매진했던 다산같습니다.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87세 황동규 노시인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폭넓게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다양한 예를 통해 나눴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계신 ‘영원한 현재’의 하느님이십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현존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제 애송하는 자작시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교회는 단지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자 성사일뿐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를 뛰어 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로 이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소리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도 아니고 어디 밖에 있는 별세계같은 하느님의 나라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놔두고 밖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찾는 이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요 끝내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인데, 오늘 지금 여기 성지를 놔두고 성지순례를 떠날 필요가 어디 있겠는지요. 바로 제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함이 성지순례의 궁극적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겠는지요?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믿음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봅니다. 내 시각으로 볼 때 문제투성이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아 아는 것이요 기꺼히 받아드려 충실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미 그 예전에 믿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분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에 순을 따서 심으리라...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런 향백나무같은 개인이,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실천한다.”
참으로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매사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깊이 드려다 봐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몰라서 원망, 절망, 실망이지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 하시는 일에 감사, 감동, 감탄이 뒤따를 것이며, 매사 진실, 성실, 절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은 희망의 여정을 살아가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궁극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자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요 그의 고백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있는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믿음과 희망이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주님을 늘 그리워하고 바라보기에 희망이 샘솟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됩니다. 늘 희망의 주님께 시선을 두면서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셋째, 사랑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눈이 열릴 때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눈에 포착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잡고 소리없이 묵묵히 펼쳐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참으로 필요할 때 협조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 섭리의 손 안에 있음을 봅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순리이자 섭리입니다. 심는 분도 주님이요 거두는 분도 주님입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이요 이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섭리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전개과정을 상징합니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그 작았던 요셉 수도원이 이제는 큰 숲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의 쉼터, 치유의 쉼터가 되고 있으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사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뤄주는 성전에서의 사랑의 성사(聖事)요, 식당에서의 사랑의 식사(食事)요, 배밭 농장에서의 사랑의 농사(農事)이니, 바로 ‘사랑의 삼사(三事)’입니다.
배농사를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사람의 적절한 도움도 필수입니다. 배농사의 80%는 하느님 몫이고 나머지 가지치기, 잡초깎기, 거름주기, 농약치기, 적과하기, 봉지싸기 등 농부 수도자의 시기적절한 협조도 필수입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노력이 함께 가야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내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겸손하고 성실한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순리의 도구와 협조자가 되어 신망애의 참 좋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시편92,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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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님께서 나를 그리 내셨으니>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나
비록
가진 것 없으나
나는
모두에
아낌없이
내줄 수 있으니
나를
내 님께서
그리 내셨기 때문입니다
나
비록
보잘것없으나
나는
온 누리
따뜻하게
품을 수 있으니
나를
내 님께서
그리 내셨기 때문입니다
나
비록
아무것 아니나
나는
모든 이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으니
나를
내 님께서
그리 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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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늘 나라, 즉 천국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안에 있고 일상의 작은 체험에서 시작됨을 말하고 계십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순수성을 간직하는 것이며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지속적으로 사랑안에 함께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나온 좋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고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며 하느님 나라의 참 의미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의 사랑으로 부터 힘을 얻을 때에만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힘을 얻을때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삶은 높은 곳을 향한 삶이며 내면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며 세상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크고 위대한 일에 대해서는 부푼 꿈을 간직하면서도 작고 미소한 일 앞에서는 겸손하게 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세상을 살면서 벌써 하늘 나라를 사는 셈입니다.
불안속에서도 유지되는 마음의 평정, 평화롭지 못한 세계 앞에서도 변함없이 간직되고 있는 평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가슴을 채우고 있는 무한한 세상에 대한 꿈,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만족, 더 큰 완성을 떠올리며 살아있는 성실, 바로 이곳에서 하늘 나라는 시작됩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안에는 지상에서 이미 하늘 나라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관을 이 땅과 지상의 재물, 지상의 안락, 지상이 줄 수 있는 것에 두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환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사랑과 기쁨과 단순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 하늘 나라는 바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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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합을 모독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다
이탈리아 -1793년
프랑스 혁명이 얼어났을 때 프랑스에서는 갖가지 범죄가 무수히 행해졌다. 살인, 강도, 성당의 방화와 약탈, 신자의 박해 등 갖가지 범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적 행위로 여겨졌다. 더군다나 이러한 범죄는 프랑스 내에 뿐만 아니라 그 여파로 말미암아 주변 국가에서도 많이 일어났다.
1793년 폭풍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을 때 프랑스 군대는 어느 한 이탈리아의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나갔고 지붕은 그 거센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날라가버렸다. 폭풍우가 더욱 더 거세게 몰아치자 군인들은 비에 흠빽 젖어, 이 사납게 몰아치는 폭풍우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의 낡은 성당으로 들어 갔다.
욕설과 소리를 지르면서 그 혁명군들은 성스러운 성당 안으로 몰려들어와 무기와 짐꾸러미들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들은 이 성스러운 성당을 마치 술집과 똑같은 곳으로 생각했는지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그들이 성당에 들어와서 경건하게 행동했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들이 편안한 휴식을 취하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커다란 소리로 욕설을 지껄여댔다.
“야, 누구 술좀 가져와라!" 하고 누군가 명령했다. 곧이어 “그리고 잔도!" 하고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아 목이 마른 걸! "
누군가 포도주 한 통을 가져왔을 때, 잔을 가져오라고 외쳤던 자는 마치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제단 쪽으로 급히 갔다. 그는 감실을 부수고 성체가 가득히 보관되어 있는 성합을 꺼내 경외심도 없이 그 안에 들어 었던 성체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신앙심이 없는 자기 동료들에게 술을 따라 마시려고 생각한 성합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여 주었다.(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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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작은 씨가 어떻게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뿌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작은 실천을 떠올리게 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한 작은 실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작은 자선, 이웃을 위하여 실천하는 작은 선행,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참여하는 투표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크게 소용이 없어 보이지만,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씨앗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자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고 나무가 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들도 어떤 방식으로 자라나는지 모르지만, 그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작은 실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작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이 소용없다고 여기며, 소비 주의나 이기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무기력하게 살아갈지, 그러지 않으면 그 흐름에 맞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선택하고 살아갈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 흐름을 거스르는 실천 하나가, 작지만 위대한 선택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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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연중 제11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말씀하십니다.
작기 때문에
잘 보지 않으면
씨앗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향,
자신들이 생각하는 온갖 좋은 모습을
그것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것을 선택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꿈꿀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을 때
막상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사람,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을 것 같습니다.
작기 때문에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와
실제의 하느님 나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찾는다면
나의 기준이 나의 눈을 가려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하느님 나라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화려하지 않은 곳에도
하느님 나라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과 함께있는 곳이기에
단적으로 표현해서
화려하지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화려하지 않지만
고통이 끊이지 않고
어둠 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지금의 삶이 힘들기에
하느님 나라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딛고 일어날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 생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시각을 조금은 더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나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무조건 벗어나야 할 상황이 아니라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모습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동참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화려한 하느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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