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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 어허! 단군굴
몇 모퉁이를 돌아 오르니, 문득 외연(巍然)한 거암 ─ 거암이라느니보담 영이(靈異)한 일좌(一座)의 석산이 우리 앞을 막아 선다.
인도승 하나가 가쁜 숨길을 내쉬며,
"인제 다 왔소“
하는 바람에, 우리는 환성을 올리려다가, 인도승 또 하나가,
"인제 정말 난관이오.“
하는 말을 듣고, 멈칫하는 사이에 그는 정말 장여(丈餘)의 위초(危峭)한 바위에 잔나비 모양으로 기어오르며,
"그 전엔 여기 더위잡을 나무도 있고, 사다리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나도, 활(滑)하기 빙판 같은 그 거대한 석신(石身)에 파충처럼 배를 깔고 달라붙었다. 이야말로 유진무퇴(有進無退)! 상승이 아니면 추락이 있을 뿐인데 족하(足下)는 천인단애다. 생과 사의 관념이 번갈아 명멸하는 찰나,
무서운 원력(願力)이 선풍과 같이 전신을 뒤흔들며 수십보를 줄달음으로 기다가 일어서니, 몸은 표표연(飄飄然) 반공에 뜬 듯한데, 발은 광활신이(廣闊神異)한 일대 석굴의 최종단의 일부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졌다.
이 석굴은 ‘굴’이라느니보담 창궁(蒼穹)의 ‘궁(穹)’자나 우주의 ‘우(宇)’자나 띄어 ‘석궁’또는 ‘석우’라고 부름이 그 실감을 방불케 할 만큼 거궁하다. 높이는 4길이 넘을 듯, 전면의 넓이는 50척, 깊이는 35척 가량이니 굉걸(宏傑)한 전각(殿閣) 한둘을 넉넉히 들여앉힐 만하다. 석질은 아름다운 화강석으로 녹색 백색 무늬(文儀)가 각양각색의 선을 둘렀다.
우리는 시근벌떡거리는 숨을 죽이고 옷깃을 여미며, 엄연숙연(嚴然肅然)히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서니, 습습(習習)한 청풍이 옷소매를 날리며, 이 세상 것 아닌 이상야릇한 습기가 끊는 가슴을 헤치고 선선하게 엄습한다.
물이끼가 파랗게 덮인, 동편 석벼랑으로부터 한 줄기의 옥류가, 광선과 같이 번쩍이며 흘러나린다. 타는 듯한 갈증에 나는 위선 그 수정 같은 물 한 바가지를 떴다. 한 모금! 두 모금! 빙수도 이보담 더 찰까. 감로도 이보담 더 달까. 냉기와 이향(異香)이 심신에 스미는 듯하며 열화와 같은 육신이 냉회처럼 식어버리자 이는 쓰리고 몸은 떨린다. 손끝 발끝이 저리다. 나는 분명히 홍로(烘爐)의 진세(塵世)를 떠나, 임 계신 광한궁(廣寒宮)에 귀명(歸命)한 모양이다.
일행은 어느 결엔지 나무를 찍어다가 화톳불을 피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였다. 화씨 100도를 상하하는 요즈음의 혹서에 불을 쪼인다는 것부터 정말 기경(奇景)이다.
- 단군천신지위(檀君天神之位)
화톳불에 얼마쯤 몸을 녹인 우리는 다시 굴 안으로 순력(巡歷)하다가, 서편 그윽한 석벼랑 위에 정면 남향으로 세 분 위패(位牌)를 모신 것을 발견하였다. 좌편 조금 작은 위패는 "나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썼고, 중앙은 "나무단군천신지위(南無檀君天神之位)"라 하였고, 우편은 또 다시 "나무환웅천왕지위"라 쓰여 있다. 중앙과 우편은 위패의 크기와 솜씨가 같고, 좌편의 것은 조금 작을 뿐만 아니라 수법이 졸렬한 것으로 보아, 덧붙이기로 뒤에 모신 것을 잠작하겠다.
우리는 의론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낮추낮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만감이 전신에 소용돌이를 치며 고개를 다시 쳐들 수가 없었다. 약자(弱子)로 잔손(殘孫)으로 어버이 앞에 엎드린 것이다. 무안하고, 얼 없고, 부끄럽고, 무섭고……해서, 숙인 이 고개를 감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물적 유산은 고만두자.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 ─ 고구려와 신라에 와서 찬란한 탈목(奪目)의 색과 복욱(馥郁)한 경세의 향을 발하던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이 막상 인천(人天)을 흔동(掀動)할 대과를 맞으려 할 중대 시기에 지니지 못하고 조잔(凋殘)과 영락(零落)에 맡기었으니 얼마나 황공한 일이냐. 이런 잔손(殘孫)은 대천세계를 샅샅이 둘러보아도 그 유례와 비주(比儔)를 찾을 수 없으리라. 지옥겁과 도탄고를 열 만 번 더 치르고 더 겪어도 이 죄를 다 삭치지 못하리라. 참회의 화편(火鞭)이 양심을 후려갈기니,
"인제는 다시, 인제는 다시!"
열 번, 스무 번, 골백 번, 잘 천 번 줄항복을 하고, 맹서맹서 하였다.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왔고, 올 생의(生意)라도 하였던고? 하도 기막히고 답답하기에 집안 어른을 뵈오려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지니신 한배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 뼈가 내 뼈이거든 뼈인들 아니 저리시며, 그 피가 내 피거든 핏줄인들 아니 당기시랴. 역정도 나시지만 그래도 눌러보시리라. 괘씸도 하시지만 그래도 거두어 주시리라. 밉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옆들고 받들어 주시리라. 두 팔을 벌리시고 오라, 오라! 부르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마음을 졸이시며 왜 안 오나, 왜 아니 오나! 바라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억천만 겁을 윤회한들 임 주신 뼈와 피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아아, 염통이 뛴다. 고동하는 이 가슴에 임의 손을 얹어 보소서.
이 지식 이 모양이
얼마나 미우실까
이 새끼 요 꼬라지
얼마나 화나시리
벌역이 꼭지를 잡는 듯
부들부들 떨린다.
우뢰가 소리친다
벼락이 나리신다
번개의 불채쭉이
더럽힌 몸 바숴내네
돌아서 울으시는 양
훌쩍 소리 들린다.
임에게 올리올 것
향화도 차비 않고
임에게 드리올 것
제물도 없사외다
신물(信物)로 이 피 올리니
반기실 줄 아옵네
잔 사설 긴 푸념을
다 그만 두렵니다
열두 겹 쌓인 한을
사뢰자니 목이 메네
이 안을 들여다 보시니
두말할 줄 있으랴
벙어리 냉가슴을
임께와도 앓단 말이
흉장을 두드리매
솟아나니 피 눈물이
잇대어 두견화 피옵거던
저만 여겨 보소서
- 만폭동(萬瀑洞)
성조(聖祖)의 영궁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우리는 시방 단군봉을 넘는다. 목표는 만폭동의 최고원지. 풀과 덩굴과 빙판 같은 부엽니토(腐葉泥土)와 사태(沙汰)와 현애(懸崖)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행진이다. 거꾸러져도 보고 자빠져도 보고, 포복슬행(匍匐膝行) 부릴 수 있는 재조를 부리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찰과상과 열상 등 수십창을 입었다.
이백(李白)이 촉도지난(蜀道之難)을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이라고 호들갑스럽게 흥감을 떨었지만 청천도 오를 수 있는 길이라면 이보담 더 험하고, 더 위(危)하고, 더 급하고, 더 촉(矗)하지는 않을 듯싶다. 절벽을 만나 혼비백산의 변을 볼 뻔하기 무룻 7회, 방향을 잘못 잡아서 회정(回程)하기 무릇 5회.
어마어마하게 큰 흑암 위로 은류(銀流)가 날으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한결같이 "아!" 소리를 쳤다. 얼마나 많은 느낌을 붙인 이 외마디냐. 경탄과 찬미와 환희가 한꺼번에 뒤섞인 소리라. 무진한 윤회고를 겪다가 복지(福地)에 도착한 기쁨도 이러할 듯.
안전(眼煎)에 전개된 이 광경을 웅흔하다 할까 장엄하다 할까, 빼어난 봉만 이 대붕의 두 나래처럼 좌우에 펼칠 대로, 동곡(洞谷)은 활짝 열렸는데, 먹을 갈아 부은 듯한 시커먼 바위 머리 ─ 횡으로 80척이 넘을 듯한 어마어마하게 큰 반원형의 머리를 슬쩍 넘는 듯하더니, 폭포는 나리지른다. 물 떨어지는 데마다 널리 판판한 반석이 되고, 그 반석을 지나면 또 다시 비폭(飛瀑)이 되어 밑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만 크고 긴 놈이 4층, 조금 짧은 것이 3층, 모두 7층을 이루었는데 이 7층을 합하면 모두 80길이 넘는다던가. 만폭동의 폭포라면 대개 그 입구의 무릉폭만 보고 돌아서고, 험난한 여기에는 유객이 적은 탓으로 실지로 재어 본 일도 없고, 뚜렷한 명칭조차 붙지 않았다 한다.
상하 7층에서 벽력을 나리며, 뇌정(雷霆)을 일으키며, 먹장 같은 직립 거암과 백옥 같은 펀펀한 반석을 무대로, 비류(飛流), 직주(直注), 활보(活步), 난무(亂舞)하는 양은 과연 신변(神變)을 단예(端睨)할 수 없는 은룡(銀龍)이 넘노는 듯하다.
- 곰틀을 보고
반석 위에서 우리는 다 늦게야 점심 꾸러미를 끌렀다. 젓가락은 단지(檀枝)요, 먹는 물은 폭포다. 찬으로는 몇 가닥 미역과 한 숟가락 고추장 뿐. 장경(將景)과 활취(闊趣)가 모두 반찬인 양하여, 제각기 두 손으로 움켜쥔 주발만큼 씩한 밥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비말(飛沫)과 수연(水烟)이 찰 세라고, 어느결에 나타난 태양은 불볕을 나려부으신다. 척척한 옷이 불시에 마른 듯. 까마귀 몇 마리가 그리운 인간을 반기드키 요샛말로 저공비행을 하며 까욱까욱 지저귄다. 오늘 아츰 길 떠난 뒤로 생물을 만나 보기는 이 까마귀가 처음이다. 우리도 정다운 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볼 제 노승 한 분은
"속가(俗家)에서는 까마귀를 보면 흉물이라고, 불길지조라 하지마는, 우리 산인들은 그 소리도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까우까우는 가우(嘉遇), 가우니 곧 잘 만났다는 뜻이라지요."
하며 ‘고시레!’하고, 밥 한 술을 돌팍 위에 던져 준다.
화식(火食) 먹는 인간이란 절경도 참말 식후다. 배꼽이 일어서자, 일행은 활기가 넘친다. 이따금 홍소가 물소리를 누르며, 「향산가(香山歌)」 가 울리고, 「도라지 타령」이 나오고 곡조 모를 가락을 청승맞게 지르는 이, 콧노래를 웅얼거리는 이, 겨운 흥을 견디지 못하는 듯. 어떤 이는 옷을 활짝벗고 고개를 폭포 나리막에 불쑥 내밀었다가, 차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도리도리도 하고, 어떤 분은 덤벙 물에 뛰어 들다가 걷은 옷도 다 버리고, 화난 듯이 물을 탕탕 차기도 한다.
승경에 겨운 흥을 다 못 풀고, 갈 길을 재촉하니 오후 4시경. 기구한 행정(行程)에 또 다시 죽을 판. 20리 나마를 휘다듬어 내원암 후봉을 넘어서니, 산등이 조금 펀펀하고 나무가 드뭇한 자리에, 굵은 참나무 기둥들이 우뚝 서고, 그 뒤는 굼튼튼하게 시립(柴門) 같은 것을 얼키설키 엮어서 비스듬히 뉘어 놓고, 그 위에는 또 다시 돌무더기를 쌓아둔 것을 발견하였다. 동행의 설명으로 그것이 곰 잡는 틀인 줄을 알았다. 과연 심산이구나, 하는 느낌이 다시금 새롭다. 백웅(白熊) 전설이 별안간 머리에 떠오르며 기이한 인연인 듯도 싶었다.
차 군(車君)과 나는 그 틀 위에 올라 짓궂게 쿵쿵 굴러 보다가, 문득 방아쇠처럼 장치한 나무가 벗겨지며, 곰틀은 벼락 치는 소리를 내고 나리떨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틀 밖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 산삼(山蔘)과 석용(石茸)
6시 30분경, 강선대(降仙臺)에 올라서니, 절벽에 우뚝 솟은 기암인데, 흙 한 점 없는 바위이거늘 청송 몇 주가 돌을 뚫고 어엿이 정자를 지어, 일진청풍(一陣淸風)이 일 때마다 송뢰(松籟)를 아뢴다. 선적(仙跡)은 찾을 곳이 없건마는, 사향노루의 똥이 콩알처럼 군데군데 흘러, 진세가 아닌 것만은 알려준다. 오늘밤에 숙박할 곳이 금강굴이란 바람에, 일행은 안심의 숨을 내쉬자, 다시금 시끌덤벙거리며 인환(人寰)에 들리라는 듯이 외마디 소리를 지를 때, 노승은 손을 내저으며 엄숙한 얼굴과 종용(從容)한 말소리로,
"떠들지들 마소. 여기가 어디라고 일모(日暮)가 박두한데 인성(人聲)을 낸단 말요? 산행엔 무어(無語)외다. 어인(御人) 지도대로 ─ 말하자면 인도하는 이의 가는 데로 뒤를 좇아오는 법이오. 산성(山聲)이란 참으로 멀리 들립니다. 누구에게 알릴 일이 있으면, 지팽이로 바위를 두어 번 뚝뚝 쳐도 산이 울려다 알아듣게 되는 거요.“
일좌(一座)는 숙연해졌다. 나는 이산의 제일 특이한 소산(所産)이 무엇인가를 나직히 물었다.
"그것은 산삼이지요.“
노승은 언하(言下)에 대답한다.
"산삼을 캐자면 7일 재계(齋戒)는 물론이거니와 산신제도 굉장히 지낸다오. 대개 7월 보름이 되면 입산을 하는데, 그야말로 천신만고지요. 산신님이 도우사 혹시 삼을 얻지 않겠소. 그러면 그 자리에 표적으로 나무를 덮어둔다오. 그것은 제 고생을 생각하여 뒤에 오는 이에게 여기 삼을 캐었으니 이 부근에 삼이 날 것 같다는 뜻을 알리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그 나무 덮은 것을 ‘고장자리’라 하오. 7월부터 입산하는 것은 조금 서두는 편이고 원래는 8월 15일을 지나야 산신님이 내어준다시지요. 가을철에 산삼에 목숨을 매달고 다니는 이가 퍽이나 많지요."
노승은 잠깐 숨을 돌리는 듯하더니 다시 말끝을 잇는다.
"산삼보담도 더욱 참혹한 것은 석용(石茸) 따는 노릇이오. 산삼은 그래도 한 뿌리만 큼직한 것을 캐면 돈 천이나 생기기가 일쑤지만, 석용이란 한 바구니를 따와도 단 돈 10량이 되지 않는구려. 그래도 힘들기란 산삼 이상이지. 석용이란 산에도 맨 윗머리 석벼랑에 여는구려. 이것을 따자면 제 허리에다가 새끼를 메고, 새끼 한 끝을 바위 뿔따구니에 매어 놓고 신지무의(信之無疑)로 나려가지요. 석용이란 한 곳에만 모여 나지도 않고 여기저기 드뭇드뭇 붙어있기 때문에 새끼 닿은 대로는 이라도 가고 저리도 가지 않겠소? 이 사이에 칼날 같은 바위 이빨에 새끼가 닳는구려. 석용 따는 데 정신이 팔려 제 생명의 줄이 닿은 줄을 모르다가 뚝 끊어지는 날이면 아차 소리도 지를 새 없이 천인단애에 떨어지지요. 한 해면 시신도 못 찾는 이가 수두룩하지요."
나는 인생의 생계가 곧 사인(死因)임을 다시금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금강굴에 도착하니 오후 8시.
- 금강굴의 일야(一夜)
금강굴은 서산 대사의 수도처로 유명하다. 주위 12장이 넘는 규형(珪形)의 거암이 동편의 3분지 1 가량만 땅을 디디고, 3면은 10수 척 가량 공중에 떠 있는데, 이 바위를 지붕으로 집을 들여앉혔다. 간수는 4간이 될까 말까. 이 집도 언제 지었는지, 연대는 역시 미상하다 하되, 뼈대가 아직도 성한 것으로 보아 100년 안짝의 창건인 듯. 주승은 이도산(李道山)이란 함경도 중으로 여기 입산 독거한 지 벌써 10년이 넘는다던가. 나이는 50 가량, 귀는 절벽이 되어 남의 말은 도모지 못 알아 듣고, 이따금 고성으로 제 말만 떠들다가 기성을 발하며 홍소한다.
석간으로 나린 물을 세사(細砂)로 다시 걸렀으니 청렬(淸洌)한 물맛은 속장(俗腸)을 씻기에 넉넉하다. 이 물로 밥을 짓고, 윗산에서 우리 손으로 캐어온 고사리와 미나리로 찬을 맨들어 저녁을 마치니 어느덧 여름밤이 겨웠다.
밤이 들수록 공기는 더욱 맑아 온다. 초저녁엔 젖빛 안개가 증봉(甑峰)의 중허리를 덮어버려 빼어난 봉우리만 꿈결같이 점점이 보이더니, 이윽고 반천(半天)에 깔렸던 운무가 스르르 걷히며 반달이 백옥으로 깎은 듯한 얼굴을 슬며시 내민다.
이 산, 이 밤, 이 달, 이 경(景)
일총명월청허침(一牕明月淸虛枕)
무한송풍운부제(無限松風韻不濟)
청허 대사의 자영(自詠)한 일수를 읊조리매 과연 진념(塵念)과 속사(俗思)는 가뭇없이 사라지며 심신이 우화(羽化)나 한 듯이 가뜬하고 가벼워진다.
산허리와 안개는 짙은 빛이 차츰차츰 엷게 풀어지며 새하얀 흰빛으로 옮겨간다. 나부끼는 깁오리처럼 이 봉에서 저 봉으로 하늘하늘 아늘아늘 푸른산 살을 아련히 보였다가 감췄다가. 장등에 흘러나리는듯이 보이면서 어느 절에 윗머리를 넣을꼬? 칠장산(七長山) 기슭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문득 중봉에 다시 감돌아 올라 봉오리 한 개씩 두 개씩 흐려 버린다.
이 안개의 빛이란 정말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희다 맑다 하여도 이대도록 희고 맑을 수 있으랴. 영롱한, 투명, 청정, 현요!─ 이 모든 형용사를 나열해 보아도 이 미묘한 백색을 꼬집어 표현할 길이 없다.
그나 그뿐인가, 그 가벼운 것이란! 우모(羽毛)에 비길까, 경라(輕羅)에 견줄까. 동풍에 휘날리는 유서(柳絮)와 방불하고, 옥경에 너울거리는 선희(仙姬)의 수무(袖舞)도 저러할 듯.
문득, 석굴 뒤로부터, 한 점 두 점 안개가 홀홀 불려 나온다. 갓 따 놓은 솜처럼 희게 피어난 안개 송이가 바루 우리 앉은 쪽 마루 옆을 스치며 몽실몽실 날아가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경이(驚異)였다.
꿈꾸는 듯이 안개의 작란만 바라보고 있던 차 군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 안개를 보자 신기한 듯이,
"이키, 안개가 집 뒤에서도 나오네, 저것 보아요, 뭉게뭉게 자꾸 나오네."
하고, 안개를 잡으려는 듯이 두 팔을 내밀다가 별안간 뜰 아래로 나려선다.
그는 황홀한 웃음을 띠며 나를 보고,
"우리 안개 잡으러 가 볼까요?"
나도 웃으며 따라나섰다. 여기를 오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월영(月影)을 잡던 이청련(李靑蓮)의 고지(故智)를 본떠 석굴 뒤로 돌아보니, 주승이 외로이 석반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그 연기가 밝고 맑고 대기에 그대로 서리에 백무(白霧)의 화판(花瓣)을 이룬 것이다. 명월의 청휘(淸輝)가 더욱 빛나니, 용용(溶溶)한 몽환적 은파(銀波)가 투명한 공기와 어우러져, 완연한 유리세계를 이룬 것이다.
"허기성운(噓氣成雲)!"이란 문자는 이런 경우의 광막한 표현이리라.
월광에 뚜렷한 산형을 바라보며, 그 변화무궁한 환상이 심안에 명멸할 제 나는 인생을 생각하고 영겁을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하고 고달픈 꿈조차 맺을 줄을 몰랐다.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다가 말고, 다시 깨어 보니 은하가 바루 눈 앞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만류(萬類)가 정적한 가운데 우 ─ 하고 나리지르는 폭포소리가 목침을 흔든다.
- 수충사(酬忠祠)·안심사(安心寺)
7월 13일, 오전 7시 발정.
최초 예정은 여기에서 중비로(衆毘盧)를 거쳐 비로봉을 반등(攀登)하려 하였으나 이 경로로는 아즉 한 사람도 비로봉에 올라본 이가 없고 억지로 올라가자면 왕복 4일정을 요하는데 요사이 같은 임우절(霖雨節)에는 생의(生意)도 못한 노릇이라 하여 일행이 굳이 말리므로 섭섭하나마 후기에 미루기로 하고 하산하였다.
내원암 무너진 자최를 굽어보고 삼성봉을 지점하면서 나한굴(羅漢窟)을 잠깐 들러 8시 30분경 대향(大香) 두참이라는 곳에 이르니 무릉폭의 입구다. 도목(桃木) 수주가 명칭의 유래(由來)를 알리는 듯. 청계를 두어 굽이 돌아드니 규모는 비록 작을망정 수십장 비폭이 상하 2층으로 나누어 은사(銀絲)를 날리는데 하층에 떨어지는 급단(急湍)은 돌기한 암신에 부서지며 인공보담도 더 섬교(纖巧)한 분수(噴水)를 지은 것이 사랑스러웠다.
오전 10시, 수충사(酬忠寺)에 도착.
사태(沙汰) 밀린 자리에 쇄와(碎瓦)와 잔초(殘礎)가 산란하다. 정묘년 탕수에 그 굉대하던 건물이 휩쓸려 떠나가 버리고 지금은 영각(影閣)만 남았는데 이 또한 반나마 경퇴(傾頹)하고 말았다. 영각 안에 들어가 보니 좌측 사명당 유정(惟政), 중앙 서산 청허당 휴정(休靜), 우측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의 영정을 모셨던 감실조차 군데군데 파열되었다.
이 수충사는 말할 것 없이 임진란 당시 휴정 서산 대사의 위훈을 표창하기 위하여 거금 214년 전 정조 18년에 창건하고 사액(賜額)까지 나린 것이다.
보현사에서 소게(小憩)도 못하고, 다시 행정을 재촉하니 그럭저럭 오전 11시, 오늘 해 안으로 향산의 제일 절경이라는 법왕봉(法王峰) 하의 상원암(上元庵)을 기어이 구경하고 다시 회정(回程)할 욕심인 까닭이다.
보현사 우측을 돌아 얼마 가지 않아 창고굉외(蒼古宏巍)한 일좌(一座) 고찰이 우리를 맞이하니 이것이 이 산 사원 중 최고 건물인 안심사(安心寺)다. 지금으로부터 960여 년전 고려 광종 19년에 개산조사(開山祖師) 탐밀대사(探密大師)의 창건한 것으로, 천년풍우에 아즉도 까딱없이 구용(舊容)을 보전한 것을 보면 당시의 건축이 얼마나 견고하고 내구성에 부(富)한가를 짐작하겠다.
- 금강폭인호대(引虎臺)
일조(一條)의 청계를 옆에 끼고 급경사의 곡경(曲徑)을 상하(上下)하는데 숨이 턱에 닿고 땀이 목을 적시되 작일(昨日)의 행정과 비교하면 정말 탄탄대로다. 단숨에 5리 허를 휘어넘으니, 기암과 괴석이 풍목(楓木) 수주를 머리에 이고 깎아지른 듯이 층층이 솟았는데 한 가닥 비류(飛流)가 백옥을 바수며 떨어진다. 그 밑에 지은 소(沼)는, 벽옥을 담은 듯이 연련하게 푸르다. 번번하게 다스려 놓은 듯한 황색 화강반석 위를 슬금슬금 기는 듯이 잔잔히 흐르는 그 물이란! 어쩌면 저렇게도 맑고 고울 수 있으랴. 사랑스럽고 정다운 품이 고운 임을 만난 듯. 명경을 들여다보며 방싯 웃는 선녀의 풍정(風情)에나 견줄까. 이 폭포를 이름 지어 금강폭이라 하였으니 기수(奇秀)한 금강산 한 모서리를 떼어 왔다는 뜻이리라.
구름과 이웃한 학소대(鶴巢臺)를 지나 옥반에 구으는 대하폭(臺下瀑)을 나려다보며, 인호대(引虎臺)하에 이르니 상원암을 지을 때, 인부가 길을 잃고 주저하는 차에, 난데없는 범이 나타나 길을 인도해 주었다 하여 이 명칭을 붙였다는 전설이다. 좌우는 천야만야한 단애요, 앞에는 층층절암이 가루 막혔으니, 당시의 인부가 아니라도, 나 또한 길을 잃을 지경이다.
꼬불꼬불 바위 위를 문자 그대로 석경을 더듬어 오르니 인적을 붙일 수 없는 양대 절암이 두 층으로 반공에 흘립(屹立)하였는데, 하층엔 약 6간통, 상층엔 약 5간통의 철색(鐵索)을 걸어 두었다. 발끝을 겨우 놓을 만큼 암신(岩身)에 호방을 파고 철색은 손잡이로 철환을 연(連)한 것이다. 우리는 디룽디룽 그야말로 생명선의 철색에 매달려 오르는데, 하층 철환(鐵環)은 조금 촘촘하여 콧수가 100이요, 상층 것은 조금 성글어 50코를 헤아렸다.
인호대 위에 올라서니, 안전에 전개된 광경은 과연 기절장절(奇絶壯絶) 하다.
- 산주폭(散珠瀑)·용연폭(龍淵瀑)
앞장을 섰던 차 군은 어느 결에 인호대 최동단의 암상에 우뚝 올라선다.
"아, 기절(奇絶)! 기절!"
하고 환성을 지르며, 땀이 방울방울 맺힌 가운데도 황홀한 얼굴을 돌려 나를 어서 오라, 손짓한다.
천인단애에, 창송을 더위잡고 아슬아슬하게 발을 붙이니 굽어보는 눈이 어찔어찔한데, 눈앞 저만큼 산주폭(散珠瀑)이 곤두섰다. 눈보라처럼 날리는 물줄기는 끝마다 방울이 맺혀, 산산이 떨어지는 양은 과연 구슬을 끼얹는 듯.
한 번 눈을 오른 으로 돌리매, 경(景)은 또 다시 변하여 용연폭이 3백여 척의 삭벽(削壁)에 기어 나린다. 몇만년, 몇억만년 물길에 갈리고 또 갈리고 바래고 또 바래어, 암신은 곱게곱게 희게희게 대패로 밀어놓은 듯하여, 물줄도 얼음을 지치듯이 가만가만히 밀려 나려온다. 폭포라면 연상되는 비류와 난무와 급하(急下)와 직주(直走)는 이 폭포 앞에 변형이요 광태일 따름이다. 홍상(紅裳)을 거듬거듬 조심조심 시부모 앞에 나아가는 신부의 걸음걸이도 저러할 듯. 단애는 깊고 깊은 물 떨어지는 자최를 조요(照耀) 찾을 수 없고 층만(層巒)은 높고 높아, 창송과 녹수조차 하의(霞衣)를 두른 듯한데 백일은 이 골 안에 영롱한 채홍(彩虹)을 일으키는 양하여, 수색(水色)과 애용(崖容)과 산형(山形)과 수영(樹影)이, 금강석으로 타오르는 듯. 보는 눈이 무시무시할 만큼 부시다.
여기서 몇 발자욱 옮기지 않아, 상원암 앞에서 법왕봉으로 고개를 돌리면 경은 또 다시 일변한다. 청천에 대지른 법왕봉은, 그 백설 같은 옥부(玉膚)를 속자의 눈에 보이기 싫다는 듯이, 그 변화자재의 안개 자락으로 얼굴도 가려 보고 가슴도 가려 보는데 어찌하면 천불만불의 열좌(列座)를 이루고, 어찌하면 선관(仙官) 선녀의 윤무를 그리고, 가지 각색의 물형(物形)을 황옥, 백옥으로 새겨낸다.
- 천심폭(天心瀑)·상원암(上元庵)
이 법왕봉 밑에 백련처럼 걸린 것이 천심폭(일명 天神瀑)이다. 용연폭보담도 석질은 더욱 희고 더욱 곱고 가만가만히 밀려 나려오는 물 줄기는 그 잔잔한 거품으로 가지각색 무늬를 놓는다. 2백여 척의 길고긴 팽팽히 잡아당긴 화폭 위에 그 신변자재(神變自在)한 화필은 은린과 옥척이 꼬리를 맞물고, 비금(飛禽)과 주수(走獸)가 날개와 갈기를 한데 어우른 듯, 옥경의 화원에 난만한 기화(琦花)와 요초(瑤草)의 각양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이 폭포는 2백 척 나마를 곱게곱게 밀리다가, 층암 속에 슬쩍 얼굴을 감추고 하계에 나려와서는 비단(飛湍)이 되고 이 비단이 눈부신 백석(白石)너덜에 떨어지자 길을 잃어버려, 군데군데 소폭, 소지 소소(小沼), 소분수를 지으며, 만뢰(萬籟)와 같이 울어 예다가 비단결 같은 석반을 소리 없이 지나 선적암(仙跡巖)에 모이고, 다시 길고 부신 꼬리를 빼어, 용연폭의 기경을 이룬 것이다.
용연폭 윗머리에 자배기를 하나 엎어 놓을 만큼 돌이 구멍이 뚫어졌는데 그 청람(靑藍)의 수색으로 보아, 그 수심이 몇 십 길이 되는지 모른다던가. 옛날 영맹(獰猛)한 용 한 마리가 천심폭 위에 살며 물을 흐리므로 상원암에서 금강삼대(金剛三昧)의 날을 보내던 도승이 신력으로 이 돌구멍에 몰아넣었다하여 이것을 용추(龍湫)라 한다.
상원암 입구 반석에 양봉래(楊蓬萊)의 호탕한 필치로,
"신선굴택(神仙窟宅), 운하동천(雲霞洞天)"
이라고 4자씩 두 줄로 새긴 것이 장광(長廣) 한 간통이나 뺃치었다.
상원암은 "은하만장전(銀河萬丈巓)"에 "반승공(半昇空)"으로 솟았는데 과연 설암 대사의,
추장우혈오채룡(湫藏禹穴五彩龍)
벽괘여산천장폭(壁掛廬山千丈瀑)
이란 시가 실경(實景)에 방불하다. 여기 졸필을 농하느니보담 차라리 승개(勝槪)를 영(詠)한 고인의 시 2수를 적어 볼까.
불각규기의상연(不覺叫奇意爽然)
법왕봉세박청천(法王峰勢薄靑天)
인반철색천심잔(人攀鐵索千尋棧)
암재은하만장령(庵在銀河萬丈嶺)
수감측규용두하(誰敢測窺龍竇下)
오능평보호대전(吾能平步虎臺前)
석광여광무섬예(石光如光無纖穢)
도욕동마범속연(都欲同磨凡俗緣)
(이상 蒼 巖[창암])
삼도은하일석춘(三道銀河一石春)
공몽소애법왕봉(空濛素靄法王峰)
암개선로문포호(巖開線路聞咆虎)
감재금추유수룡(龕在金湫有睡龍)
갑을봉래론승개(甲乙蓬萊論勝槩)
심상도솔치범종(尋常兜率致凡從)
반원계수위청숙(攀援桂樹爲淸嘯)
정오계풍송소종(亭午溪風送小鍾)
(이상 金昌翕[김창흡])
- 사리탑(舍利塔) 패문(牌文)
오후 4시경, 점심을 마치고 도솔궁(兜率宮)에 범종(凡蹤)을 오래 머무를 인연이 없음을 슬퍼하며 길을 떠났다. 축성전(祝聖殿)으로 오는 길에 50척나마를 반공에 천연돌기(天然突起)한 용각석(龍角石)을 쳐다보니 제명(題名)이 산란하다. 포영(泡影)과 같이 덧없는 인생이거늘 성명 3자나마 석신에 붙이려는 노력이야말로 가련하다.
석명제명환자소(石面題名還自笑)
풍뢰열진식창태(風雷閱盡蝕蒼苔)
어떤 제명(題名)한 이의 이런 자탄구를 생각하며 무상한 애수가 가슴을 누른다. 이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어영(御影)과 열성조 실록을 봉안하였다는 불영대(佛影臺)를 거치니 단군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단군께서 여기도 나려오시어 연무(演武)하셨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불영대 맞은 편에 신건(新建)한 12층 탑이 있는데 인도승의 설명을 들으면 이 탑은 4년 전에 신조한 것으로 석가세존의 금사리(金舍利)를 모신 사리각이 탕수(蕩水)에 쓰러져 여기 이안(移安)할 계획이라 한다. 이 사리각의 유래를 설명한 휴정 서산 대사의 석비도 옮겨 놓았는데 수백년 풍우에도 그 웅경(雄勁)한 필치가 그대로 남아 문면(文面)이 자못 역력하다.
이 사리는 본래 양산 통도사에 모셨던 것으로, 임진란에 남도가 위험하자 숭대장 유정(四溟堂)이 이 사리를 모시고 금강산으로 봉안하려 하였으나, 금강산도 해로(海路)이므로 또한 위험을 느끼고 이 묘향산으로 이안한 연유를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이런 문구가 있었다.
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 불열제후(不列諸侯) 신인단군(神人檀君) 출흥어태백산신단수하(出興於太白山神檀樹下) 위시조왕(爲始祖王) 여요
병립야(與堯並立也) 연즉(然則) 태백산시태호(太白山始胎乎) 일국왕(一國王) 사조선국민(使朝鮮國民) 영탈동이지호(永脫東夷之號) 종안우삼계(終安于三界) 사역사동방(師亦使東方) 불실성불지인(不失成佛之因) 차비산지령야(此非山之靈耶) 위재(偉哉) 비도법중(非徒法重) 국역중(國亦重) 비도국중(非徒國重) 인역중야(人亦重也)
그리고 맨 끝으로,
휴정 84세 서(休靜 八十四歲書)
만력31년1월초길건(萬曆三十一月初吉建)
이라 하였다.
비도법중(非徒法重) 국역중(國亦重) 비도국중(非徒國重) 인역중야(人亦重也) 이 얼마나 애국애민의 열혈이 뭉친 문자냐. 사(詞)는 비록 간(簡)하나, 의(意)는 만근(萬斤)의 중이 있지 않으냐. 금강삼매의 그가 가사(袈裟)를 벗어던지고 장검하산(杖劒下山)한 포부와 면목이 눈앞에 약여하다.
- 보현사(普賢寺) 일순(一巡)
오후 7시 보현사 도착.
총총(怱怱)한 일정 관계로 정작 주찰(主刹) 순람(巡覽)을 뒤로 미룬 것이다.
보현사는 관서의 거칠로 금년으로부터 965년 전 고려 광종왕 19년 탐밀 조사의 창건이다. 굉곽 대사(宏廓大師) 대에 이르러 산내에 대소 범우(大小梵宇) 3백여 처를 중창하고 승려 3천여 명을 옹(擁)하여 정토의 왕국을 이루었으며, 고려 공민왕 당년 성승 나옹 대사(懶翁大師)가 주석(住錫)하게 되자, 사운은 더욱 흥강(興降)하였다. 이조에 이르러서는 성승 서산 대사와 사명(泗溟) 송운 대사(松雲大師)가 머무르게 되자, 조선 팔도 사찰 도총섭(都總攝)의 지위까지 누리게 되었으나 그후 병란과 화재와 탕수의 겁운(劫運)을 여러 번 치루어, 부속되었던 암자와 사원이 백불존일(百不存一)하여 지(趾)가 있으되 명(名)이 없고, 명이 있으되 지가 없다. 이금(爾今)엔 본찰의 건물 외 수개의 암자가 있을 뿐인데, 현존의 건물 중 대부분은 거금(距今) 170년 전 영조대왕 37년 남파 대사(南坡大師)가 재건한 것이라 한다.
대웅전, 명부전, 심검당(尋劒堂)과 굉대한 만세루에서 1,600근이나 된다는 대종을 구경하고 서산 대사가 축조하였다는 19층 여래탑에 인공의 묘를 찬탄하고 대장전에 들어서니 불경과 각 명승들의 문집 판본이 그야말로 산적하였다.
사무실에 들러 사보(寺寶)인 나옹, 서산, 사명 3대사의 유물을 열람하였는데, 명장(明將) 이여송 등의 연명 감사장과 정종(正宗)대왕 어필 화상당지명(畵像堂之銘)에 감회가 다시금 새로웠다. 패엽범문경(貝葉梵文經) 오엽(五葉)을 보매 자양(字樣)이 한글을 흘려쓴 듯한 것이 기이하였다.
건둥건둥 사내를 일순하고 향산 여관에 돌아오니 오후 9시경, 자리에 누으니, 몸은 솜같이 피로하다. 과로한 까닭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 반시간(半時間)의 잔발짠
7월 14일 오전 9시 보현사 출발.
잔뜩 찌푸린 일기는 떠나는 이의 이회(離懷)를 더욱 설레게 한다. 그 동안에 정든 층만(層巒)과 청강(淸江)은 우기에 흐리어 서운한 이 발길을 눈물로 부여잡는 듯.
"다시 오리다, 다시 오리다."
그들의 누용(淚容)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홀로 마음에 뇌이고 또 뇌이었다.
월림(月林) 나루를 건너니 만포선(滿浦線) 공사로 와글와글하는 소음이 유리정토에 맺었던 꿈을 가뭇없이 부순다. 채신머리없는 함석 지붕의 바라크, 짐차의 알성(軋聲), 번쩍이는 십장(什長)의 혈안, 수선스러운 인부의 비가! 무릉도원에서 진환(塵寰)에 귀양살이로 떨어진 듯하다.
길목에서 황진을 날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여러 번 손을 들었으나 차마다 만원이다. 1시간 나마를 기다리다가 못하여, 차 군의 제의로 짐꾼하나를 얻어서 보행을 시작하였다. 얼마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혹 차를 얻으면 타기로 한 것이다.
5리나 걸어갔을 때, 자동차 하나를 만나 그야말로 사정사정 비대발괄해서 차 군과는 구장(球場)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 하나만 짐칸에 탈 수 있게 되었다.
월림에서 구장까지 차는 춤을 추며 줄달음질을 치는데 걸상도 없이 짐 위에 쪼구리고 앉은 나는 차가 뛰는 대로 몸이 치살렸다가 나리살렸다가하는 바람에 머리가 치받치고 잔등이 벗겨져 여정의 고난을 단단히 맛보았다.
구장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이토수향(異土殊鄕)에 동서를 분간치 못하겠는데 궂은 비마저 쏟아진다.
무턱대고 "음식점"이라고 쓴 장명등(長明燈) 붙은 집에 들어서니 주인인 듯한 노파가 수상한 듯이 위아래를 훑어본다.
"점심 먹을 것 있소?"
나는 첫밗에 물었다. 아츰을 오전 8시에나 건둥건둥하고 오후 4시나 되었으니 시장기를 지나, 속이 쓰릴 지경이다. 노파는 눈을 한 번 껌벅하다가 다시 크게 떠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간단하게,
"없쇠다.“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어이없이 발길을 돌려 그와 같은 또 한 집을 찾아갔다. 때가 겨워 요기할 것은 없을망정 그 흔한 소주야 없으랴 하고 이번에는
"술 있소?“
하고 물어 보았다.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목로방에 삼사인 모여 있던 군정들이 우 ─ 내달아 역시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술 없쇠다.“
하고 만다. 아모리 벽촌이기기로 식점(食店)에 밥이 없고, 주점에 술이 없을 리 있으랴. 그들은 아마 나의 행색을 수상하게 본 것이다. 나도 나 자신을 훑어보았다.
<재편집: 오솔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