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58
2월6일[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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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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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박진수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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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유달리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료 수준이 극히 낙후되어 있던 시절, 수시로 전염병이 창궐했었는데, 제대로 된 치료제도 없다 보니, 그저 씻고 또 씻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어찌 보면 유다인들이 시대를 앞서 살았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이 그토록 목숨걸고 소중히 여기며 강조했던 손이나 몸을 씻는 예식, 그릇이나 제구를 씻는 예식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정결례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정결함은 필수였습니다. 특히 제사에 앞서 정결함은 크게 강조되었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의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제나 레위인들은 하느님께 번제를 드리기 전, 반드시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정결례, 참으로 유익한 것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으로서 합당히 지녀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과함은 부족함만 못합니다. 정결례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세심주의는 사람을 꼼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으며, 세부 규정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정결례의 정신, 곧 하느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 사랑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셨던 분, 지극히 자유로운 분이셨던 예수님 눈에 유다인들의 과도한 정결례 준수가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서민적인데다가 파격적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보란 듯이 일부러 정결례를 무시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스승님을 따라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준수하는 정결례를 밥 먹듯이 파기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맨소리로 따졌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정결례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분의 자녀로서 당연히 거룩해야 마땅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룩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은 필수입니다.
몸도 깨끗이 씻지만,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겠습니다. 잔도 씻고 제구도 씻지만, 우리 영혼도 거듭 정화시켜야 하겠습니다. 내 탓이라고, 가슴도 크게 치지만, 마음을 찢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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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X_Fj8q7Y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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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도 암세포가 있고 면역세포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왜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느냐고 따집니다. 사실 손을 씻는 법은 율법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이스라엘 조상들로부터 병들지 말라고 지켜온 전통인 거죠.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전화 전통은 따르지 않고 인간들의 전통을 강요하냐고 하면서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당신을 헛되이 섬긴다,결국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암세포는 그냥 병이 들었을 때 그때만 생기는 건 줄 알았더니, 항상 생겨난다고 합니다.
대신 그렇게 생기는 것들을 없애주는 면역세포도 있습니다. 면역세포는 세포가 몸 안에서 지켜야 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 세포를 없애는 역할을 합니다. 몸도 면역세포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이 전체가 인제 죽게 됩니다. 몸을 사랑한다면 자꾸 생겨나는 암세포를 죽이는 면역세포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전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교회 전통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없애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 가톨릭 학생회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 학생회는 데모 서클 중에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어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가니 또 어쩔 수 없이 화염병을 나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라에 저항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다만 교회의 전통이 세상의 전통이 스며드는 것을 좌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허물어진 것입니다.
처음엔 스파이가 들어오고 그 스파이가 다른 전통의 가르침을 물들입니다. 그것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되면 어느 체계건 무너집니다. 가톨릭교회는 안 그럴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대부분이 교만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예전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반대했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습니다. 암세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지옥 이야기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우리는 어둠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다는 요한 사도도 극단적 이원론자가 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할 때 오히려 거부당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삼구(세속-육신-마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김대건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당부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면서 삼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하면 조선시대 사람이냐, 중세 시대 사람이냐고 합니다. 이제는 교리서에 나오거나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암세포가 될 것인지, 면역세포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올바른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암세포와 대결하는 면역세포의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전통을 지키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세상 전통으로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선은 교회의 성체로만 구원이 이뤄지고 나머지는 피의 세례, 열망의 세례, 혹은 계약에 관한 신학으로 나아가야지, 처음부터 교회를 부정하는 말들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개신교가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신교 신자로 오해받습니다. 주님이라면 아마도 암세포를 무찌르는 면역세포의 역할을 하는 이들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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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해 서로 연대하는 사회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삶의 대화입니다. 이웃 종교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서로를 가로막는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신학자들의 대화입니다. 여러 종교의 전문가들이 각자 자기 교파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성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대화’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이는 충분하지 못한 신학 지식과 교리 이해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한 종교인들이 서로의 교리와 생활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 공정하지 못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 가톨릭은 마리아교다.) 타 종교에 대한 교리와 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공동선을 위한 협력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보편적인 가치에 따라서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폭넓은 협력 활동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학문과 예술을 진보시키기 위해서, 기아와 재난, 문맹과 빈곤 등 소외 계층이 겪는 곤경에 대한 대책 마련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특히 생명 경시 풍조를 극복하기 위한 생명 운동과 창조 질서 보존을 위한 생태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전쟁과 폭력을 막고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넷째,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종교인의 공동의 언어입니다. 기도는 일치를 이루는 힘입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한다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입니다.
교황청은 2023년 12월 18일에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사제의 ‘동성 커플’ 축복을 공식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교황청 교리성은 선언 내용과 관련해 “축복은 모든 규정에 어긋난 상황을 승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모든 이를 환영한다는 의미”라며 “축복을 통해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막아선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 교리성은 또 “가톨릭교회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상에 따라 축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고 풍부하게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교황청 선언문을 옹호하는 측은 이번 결정을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뒤집는 역사적 결정’이라며 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것이라며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교회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부모나 자신이 죄를 지어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될 여인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그들이 죄인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 소수자를 포함해서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내가 필요한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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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 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 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회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이 법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며 지켜야 한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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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지어 봉헌한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잘 알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면 성전에서 하느님과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성전의 외적인 화려함과 장엄함이 아니라 그곳에서 드리는 참되고 진실한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내면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과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결법을 근거로 손을 씻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진정한 의미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7,20-23 참조). 우리의 정결함은 손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만이 아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을 가볍게 여기면서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하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을 입술로 공경하지 말고 마음으로 섬기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생활’이기에 우리가 단순히 외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계명이 담고 있는 정신을 잘 알아야 하며, 그 정신에 따라 마음을 다하여 이를 지켜야 합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이란 이처럼 내면의 가치를 어렵지 않게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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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규정>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1-8)
이 이야기에서 ‘쟁점’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겉만 깨끗이 하지 말고 마음도 깨끗이 하여라.”라는 가르침은 뒤의 14절-23절에 따로 나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위선은, 겉만 깨끗이 하고 마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위선이 아니라, ‘사람의 전통’만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는 위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랍비들의 전통으로서 ‘할라카’라고 부르던 ‘일상생활과 행동에 관한 지침’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지침을 지키지 않는 것을 종교적인 불경죄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유다인’이 그 지침을 지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모든 유다인’이 지킨 것이 아니라 ‘모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켰고,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그 지침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서민들은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못 지켰습니다. 마실 물도 부족한 지역에서, 그런 복잡하고 엄격한 정결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은, 음식을 먹을 때 정결예식에 관한 ‘랍비들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로, 즉 부정한 사람들로(죄인들로) 보였습니다.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도 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루카 11,38)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규칙을 무시하셨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라는 말씀과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라는 말씀은, 옛날의 랍비들이 정해 놓은 규칙들은 열심히, 또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채로 살고 있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신앙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인생 전부를 바치는 사람인데, 한낱 사람일 뿐인 랍비들이 정해 놓은 규칙은 ‘교리’가 될 수 없고, ‘교리’가 아니라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지침을 왜 그렇게 철저하게 지켰을까? 그리고 왜 그 지침만 지키고 하느님의 계명은 안 지켰을까? 처음에는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잘 지키기 위해서, 또 사람들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을 도와주려고 만든 구체적인 실천 지침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 지침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잊어버렸다는 것이, 또는 무시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그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또 각 개인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가 만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들과 규칙들이 있는데, 만일에 지침들과 규칙들을 만든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 지침들과 규칙들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만 집착한다면, 우리도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또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교회가 만들어 놓은 지침들과 규칙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들만 비난할 것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는 계명들과 지침들과 규칙들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지키고, 다른 것들은 무시하거나 대충 지키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또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간에,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일은 항상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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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코르반은 하느님께 봉헌한 예물이기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코르반 제도가 악용됩니다. 복음에서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 재산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은 하느님께 바친 것이기에, 이제는 부모를 위해 재산을 쓸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상 부모 공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결국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악용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것이지요.
또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채권자는 그에게 “네가 빌린 돈이 바로 코르반이다.”라고 다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 봉헌한 돈을 빌려주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채무자는 하느님께 빚진 셈이 되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받아 낸 것을 실제로 하느님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코르반 제도처럼 하느님 계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자신이 편리한 대로 악용하는 경향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 계명의 참된 정신을 파악하고, 그 실천적 방법을 찾고자 한층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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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분께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옹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관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들이 지닌 전통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전통은 오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명(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생겨난 규정들일 것입니다. 문제는 세세한 규정들의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집착하다 보면, 그 바탕을 이루는 본질과 정신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은 규정은 악용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코르반’은 하느님께 드릴 예물이니 그것을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악용한 일부 유다인들이 부모에게 돌아갈 몫이 아까워 그것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하였던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맹세를 드린 예물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봉양할 의무를 회피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과 정신이 바로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계명이나 규정도 사랑이 없다면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주일 미사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드릴 때 비로소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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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을 두고 흔히 ‘정결법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율법이 담긴 모세오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전통에 따라 이어진 관례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쟁점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마따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종(교황)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머무르셨던 숙소 비용을 직접 계산하시고, 바티칸의 관저가 너무 크다며 그 대신에 사제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십니다.
또 고급 방탄차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타시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시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예전 교종들께서 하신 방식 그대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당연시하던 관례를 다시 복음의 빛에 비추어 과감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교종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과 규정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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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완벽에 가까운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행복한 시기를 함께 보내는 동안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는 상대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게 되고 스스로 기쁨을 찾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혹은, 오히려 상대가 나에게 짐이 되는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지닌 우리 인간에게 그것은 실로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을 일구어내고 있는 자들을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인내로 간호하는 배우자, 아무리 마음을 상하게 해도 자녀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부모의 모습, 지체 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어려운 시기에도 상대를 보살피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지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며 항상 청결을 유지하는 행위를 지키려 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모습은 누구보다 거룩해 보이고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시니 다소 그들의 진심을 너무 몰라주신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지켜온 규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이들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실로 부족한 점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종교적인 의식 행위였습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을 씻는 물은 특별히 큰 항아리에 따로 보관되어야 하며 특별히 정결예식을 위하여 쓰이는 것이기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없었습니다.
손을 닦는 방법 또한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는데, 손을 처음 씻을 때에 손가락은 반드시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 계란 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규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양손이 젖어 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먹으로 문지른 다음에, 손과 손가락 끝을 아래로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부어야 이 의식은 끝났습니다.
유다인들은 반드시 이 방법을 통해야 부정한 것이 씻겨 내려가고, 비로소 손이 깨끗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만약 이 방법을 어기면 쉽게 악령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하느님 앞에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유다인은 로마인에 의하여 투옥되었을 때 물을 먹는 대신 그것을 손을 씻는 데 사용해 수분부족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이들의 시선에서 손을 씻는 전통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좋아 보일 리 없습니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으니 당장 악령에 들렸다고 해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할 말이 없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계명을 잘 지키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사랑의 방식임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병이 걸린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죄 지은 이들, 이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 이들은 손 씻는 행위를 통해 모든 이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나아가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만약 병에 걸리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벌처럼 느껴지고 결국 힘들 때에 더욱 의지해야 할 하느님을 원천적으로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처럼 종종 나 자신만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생활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달콤한 것만을 청한다면 우리의 마음 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그릇된 사랑, 즉 즐거움과 기쁨만을 기대하는 완전하지 않은 사랑만 남을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전통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며 좋은 것을 일방적으로 청하는 태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은 힘들 때도 기쁠 때에도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삶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실현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결하게 되며 그 누구보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마음 속 하느님의 자리는 과연 어떠한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자리가 지나치게 많다면 조금은 하느님께 그 자리를 양보하고 그분께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좋은 기도가 오늘의 복음 환호송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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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분께 시비를 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옹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관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들이 지닌 전통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전통은 오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명(율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생겨난 규정들일 것입니다. 문제는 세세한 규정들의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집착하다 보면, 그 바탕을 이루는 본질과 정신을 쉽게 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은 규정은 악용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코르반’은 하느님께 드릴 예물이니 그것을 다른 용도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악용한 일부 유다인들이 부모에게 돌아갈 몫이 아까워 그것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하였던 모양입니다. 하느님께 맹세를 드린 예물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봉양할 의무를 회피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질과 정신이 바로 ‘사랑’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계명이나 규정도 사랑이 없다면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주일미사에 다녀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드릴 때 비로소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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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바위 안에 천사가 갇혀 있음을 느끼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는 원석을 다듬어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원석만을 보고서는 “여기에 아름다운 다비드상이 있군.”, “여기에 천사가 갇혀 있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지금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의 사랑에 큰 힘을 얻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게 만드는 사랑을 향해 ‘사랑의 미켈란젤로 효과’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천사를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천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원석만을 바라보고서 ‘쓸데없는 돌이네.’라며 단정을 지어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안에 천사가 있는데, 사랑을 통해 그 안의 천사를 꺼낼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분명 조상들의 전통에 맞지 않는 행동이고, 또 비판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두고 위선자라며 꾸짖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결 예식이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서원을 채우고자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의무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그저 사람의 전통일 따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오로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곳에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관심과 반응을 통해 사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의 몸과 성장을 응원하면서 이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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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믿음 참바람 참사랑>
마르코 7,1-13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참믿음 참바람 참사랑>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마르 7,11-12)
하느님 믿음과
사람 믿음이
갈림 없으니
하느님 믿음이
사람 믿음이요
사람 믿음이
하느님 믿음이라야
참믿음입니다
하느님 바람과
사람 바람이
갈림 없으니
하느님 바람이
사람 바람이요
사람 바람이
하느님 바람이라야
비로소
참바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갈림 없으니
하느님 사랑이
사람 사랑이요
사람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라야
참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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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체적인 생명 양식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받아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의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 전례 때에 참회 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제는 미사 때 예물을 준비하고 손을 씻으면서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외적인 행위를 통해 내면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외적인 전통을 고집하면서 내용과 의미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하지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 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는 척하지 말고 사랑을 담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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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어디에서 사시는가?”>
-존엄한 품위의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강론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숙제 거리를 가득 안고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참 공부할 것이, 배울 것이 많은 하루하루입니다. 한 일간신문은 “가족파산-조여오는 빚, 가족의 파멸” 1면의 톱 기사에 이어 두 면에 걸쳐 상세히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각자도생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또 다른 일간신문은 “내몸과 함께 잘살고 있습니다” 주제로 5회에 걸쳐 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별 시리즈 목차는- 1.시간이 새겨진 나이든 몸, 2.크고 아름다운 살진 몸, 3.다름을 알려준 장애가 있는 몸, 4.이대로도 괜찮은, 아픈 몸, 5.규정을 거부하며 존재하는 몸-으로 이루어졌으며, 어제는 4번째 항목을 다루고 있는 특집기사였습니다. 삶은 몸이라 할만큼 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지혜가 참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모두가 공부의 대상입니다.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 참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공부의 궁극 목표는 무지에서의 해방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 무지한 인간입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불행이나 비극은 거의 대부분이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한없이 강조하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불가의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진치(貪瞋癡)도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기후위기의 원인도 결국은 인간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궁극의 필생 공부는 무지에서의 해방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전쟁도 결국은 무지와의 전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자 지혜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무지에 대한 승리입니다. 하느님 지혜의 빛, 말씀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퇴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매일미사가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 처방이 이 거룩한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입니다. 여기서 무지와 지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입니다.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무지로 인해 하느님의 계명이 덮여 버리면 완전히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 계명의 지혜로 분별되어야 하는 전통이요 관습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전통과 계명간 관계를 깨끗이 정리해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밝히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인간 무지의 보편적 현실을 가리킵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코르반의 예를 들면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부모 공경을 거스르는 이들의 위선과 무지를 꾸짖습니다. 무지로 인해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 헛되이 주님을 섬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사람되는 공부가, 지혜로운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진정 교회 공동체의 보물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의 건물도, 전통좋고 자연경관 수려한 수도원도 그 안에 지혜로운 사람이 없으면 다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수도원이나 사찰을 찾든지 우선 찾아 확인해 보는 것이 참으로 깨어 있는 지혜로운 고승高僧입니다.
우리 교회나 수도원을 저는 서비스업이라 합니다. 서비스업의 삼대필수조건도 첫째도 사람이요 둘째도 사람이요 셋째가 환경입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고 거룩하고 좋아야 하며,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비스업에는 병원의 예가 적절합니다. 사람좋고 실력좋은 의사에 환경좋으면 최상이겠지만,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식, 무능한 의사라면 정말 문제입니다. 무식, 무능한데다 자기를 몰라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제1독서의 솔로몬의 기도가 참 멋집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에 너무 중심을 두는 듯 솔로몬의 무지가 엿보입니다. 저는 거대한 건물의 성전을 볼때마다 믿음의 위력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땀과 피를 흘렸겠나 생각하곤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기도합니다. 유대인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전통적 기도 자세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옳고 마땅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물이 아닌 땅위의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 안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참 거룩하고 좋은 형제들의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이 거하는 집임을 몰랐습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잘 살면 묻히는 어느 곳이나 명당이라 합니다.
<어린왕자>에 사막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샘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 말도 있듯이, 명산대찰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고승(高僧)이 있어서 이고, 외적 건물이 성전이 빛나는 것은 그 안에 참 좋은 거룩한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 거룩하고 좋은 사람들이 없는 건물뿐이라면 참 공허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점을 솔로몬은 착안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안에 있는 솔로몬입니다. 시작도 웬지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솔로몬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사십니까? 창세기에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화려한 건물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로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한 우리들 안에, 우리들과 함께 사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하느님의 현주소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나 어떤 바리사인들의 손씻는 거룩한 행위도 인간의 거룩한 품위의 존엄에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이들의 공동체 성전에서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 자비와 지혜의 빛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제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이어 일본의 순교자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박해 중 예수회 회원인 성 바오로 미키는 33세에 체포되어 교토의 옥에 갇혔다가 작은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2명, 일본인 신자 15명 등 23명과 함께 1597년 1월3일부터 오사카를 거쳐 1월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합니다.
이들은 무려 한 달 이상 혹한 속을 걸어서 2월5일, 도중에 자진하여 합류한 신자 2명과 함께 모두 26명의 신자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합니다.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를 보면, 이들의 순교 시 신앙고백을 대하면 감동 그 자체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일본 순교자 26명의 순교성인 공동체 성전을 통해 영원히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성 바오로 미키가 포함된 순교자들 26명은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안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성인영성의 디엔에(DNA), 순교영성의 디엔에(DNA) 같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당신이 머무시는 거룩한 거처로, 성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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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많이 하는 짓들>
예전에 제가 본당에 잠깐 있을 때 옆 교회 전도사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었는데 기도할 때마다 그 여자분 생각이 나서 너무 괴로웠고, 그래서 일생 독신으로 사는 신부에게 무슨 비법이 있나 배우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온 김에 하나는 따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왜 천주교 신부는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느냐? 성경에 술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제가 성경에 하느님께서 흥겨운 술을 주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도 먹보요 술꾼으로 비난받으실 정도로 드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반박했지요.
둘 다 아전인수인 셈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무엇입니까? 저기 논에 물 대는 것이 아닙니까?
물을 끌어다 자기 논에 대듯이 우리 인간은 권위 있는 말을 서로 끌어다 자기주장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데 쓰지요.
술을 왜 안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안 먹어야 하는 거지요.
술을 왜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먹어야 하는 거지요.
며칠 전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 저녁 식당에 오셨습니다. 지금 저희 <여기 밥상> 식당이 공유식당을 시작하였습니다. 점심은 삼천 원짜리 식당을 그대로 하고 저녁은 이주민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이주민 자매가 제값을 받는 장사를 하고 그래서 술도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옆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시끄럽고 음식에 대한 불평도 막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대 한국 사람들이 술을 먹고 많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아예 술을 못 먹게 하였는데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손을 씻는 정결례도 이스라엘의 전통일 뿐입니다.
요즘 청결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흙 가지고 놀지도 못하게 하고 돌아오면 꼭 손을 씻게 하는데 적당히 균들과 함께 살아야 싸워 면역력이 생길 텐데 너무 지나쳐 오히려 아이들의 면역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에 영성적 의미도 있지요. 씻어야 할 더러운 손은 먼지가 묻은 손이 아니라 뇌물을 받아먹은 손이요 피를 묻힌 손이지요.
사랑에 어긋나는 더러운 손은 놔두고, 제 건강을 챙기기 위해 손을 씻는 정결례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해치는 뒷담화나 험담은 하지 말아야 할 짓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을 주는 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짓은 어떤 짓들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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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마르 7,6)
<믿음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 7,1-13)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유다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에 기초해서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의 세부조항들'인 '조상들의 전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전통 중에 하나가 소개되고 있는데, 바로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위선자'로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6.7.9)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모세오경)'이나 유다인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의 본질은 '살리는 일인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계명의 본질 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외적 형식에만 머물러 있었고, 본질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1597년 2월 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순교한 '26명의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순교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라는 믿음의 본질로 나아간 장한 순교자들입니다.
우리도 형식을 뛰어넘어 믿음의 본질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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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uYXoCDo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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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 8)
쉼없이 흐르는
교회의 역사를
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하느님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계명은 생명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고서는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신앙의 참된
정체성입니다.
참된 정체성은
신앙 공동체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악을 멈추고
적극적인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계명은
신앙인의
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얽매임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하느님의
자유와 해방입니다.
이 시대의
위기를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지
사람의 전통이
아닙니다.
현시대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전통은
오히려
결속과 화합을
방해합니다.
목적이
정당한 것도
중요하지만
수단에서도
역시 타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전체를 보아야
하는
계명의 역사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전통만 따지는
풍조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전통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계명은
오늘도 생명처럼
힘차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신앙인들의 인격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생명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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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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