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문춘희
풍선을 한 묶음 샀다. 여러 가지 색깔의 풍선들이 가득 들어있다. 그것을 꺼내 하나씩 분다. “푸-우, 푸-후훕, 푸푸-훕.” 노랑 풍선, 파랑 풍선, 빨강 풍선들이 거실 천장으로 쑥 날아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종종 혼자서 풍선을 분다. 남들은 참 이상한 버릇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게뭉게 부풀어 올라 가슴이 먹먹해져 오면 풍선을 분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숨이 가빠져 올 때엔 더 빨리 풍선을 분다. 풍선을 불면 숨이 가빠지는 증상이 많이 잦아들고 무언지 모를 불안감도 줄어든다.
겨울바람이 웅웅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창문을 몹시도 할퀴던 수 해 전 겨울, 병원에 누워있었다. 퀴퀴한 약품 냄새가 나는 병실에 누워 가혹하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름이 돋도록 무서웠다. 빗자루에 휴지 조각이 쓸려가듯 저 바람이 이 세상에서 나를 쓸어가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숫제 고역이었다. 이리저리 한참 동안 뒤척이다 운이 좋게 잠이 들었다하더라도 거의 발작하듯 일어나야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 누워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문을 온 사방 다 열어 살을 도려낼 것 같은 바람을 흠씬 들이쉬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 순간은 내가 출산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산모라 찬바람을 쐬면 안 되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었다. 수시로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가빠지는 증상은 내가 막내를 출산하던 날 밤부터 생긴 증상이었다.
난산 끝에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출산한 날 밤, 이승과 저승의 문을 오가며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산소 유리관으로 세상과 겨우 소통하면서 생의 끈을 가까스로 그러쥐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풍선 끈을 놓쳐버린 아이들이 하늘 높이 날아간 풍선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우는 장면이 나타났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보면 온몸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직 아들 녀석을 한 번도 품어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줄을 놓아버릴 순 없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둘째와 다섯 살 배기 첫째가 내 명줄을 바투 쥐고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생사고비를 넘긴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서 병실로 찾아오셨다. 목발을 짚으신 채로 아주 힘겹게 병실 문턱을 넘으셨다.
“고생했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이 서방 집은 워낙 아들이 귀한 집이다. 이젠 어깨 펴고 살아라.”
그리곤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주셨다. 순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평소 그렇게 무감하시고 엄하시던 아버지께서 장미꽃이라니. 그것이, 바로 그 말씀이, 생전에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요, 마지막 말씀이 되실 줄이야…. 그리고 그날 저녁 한 통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 비보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늑골 사이사이로까지 깊숙이 찔러댔다. 내가 열 달 내내 유산기와 조산기의 위험 속에서 새 생명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아버지의 생의 끈은 서서히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언니나 오빠들에겐 언제나 과묵하고 엄하셨지만 막내인 나에겐 풍선만한 웃음을 푸후후 자주 웃으셨다. 오빠들이 짓궂게 놀리며 야단을 치려 할 때도 아버지의 등 뒤에만 숨으면 그만이었다. 끈 하나에 매여 높이 떠 있는 풍선처럼 아버지의 시선에만 매여 있으면 나는 이 세상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암으로 누워계셨다. 여러 차례의 대수술과 항암치료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속도로 늙으셨다. 나중에는 걷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러던 그날 아침, 생사의 고비를 막 넘긴 막내딸을 보기 위해 그렇게 힘겨운 걸음을 병원으로 옮기신 것이었다. 아버지께선 막내딸을 보지 않고선 도저히 생의 끈을 놓지 못하셨던 것일까?
‘사람의 나고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만도 못하다니….’ 눈만 감으면 시간 너머에 계시는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낙타처럼 등이 굽은 아버지가 나를 애처로이 바라보고 계셨다. 어떤 날은 풍선처럼 쪼글쪼글해진 아버지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보이지도 않는 당신을 찾아서 꿈속을 걷고 또 걸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여윈 극도의 슬픔에다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 내 생의 끈을 잘라가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을 들이쉬기 곤란한 증상이 그때부터 계속되었다. 출산한지 몇 주가 지났지만 퇴원을 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다 받아보았지만 의외의 진단결과가 나왔다. 임상적인 문제보다는 산후우울증에다 심리적인 공황상태가 더 크다는 소견이 나온 것이다.
어느 날, 출근을 서두르던 남편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귀찮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받았다.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별반 궁금하지도 않아 식탁 한 켠으로 밀쳐두었다. 오후 다섯 시쯤이 되자 거실 창문으로 어둠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짙은 녹색으로 다가오는 어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아버지가 가신 그 외로운 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이어 막 숨이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그때 작은 상자가 손끝에 닿았다.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내쉬며 열어보았다. 그기엔 갖가지 색상의 풍선이 가득 들어있었다. 작은 메모지엔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당신과 같은 증상에는 자가치료 방법 중 하나로 풍선을 부는 것이 좋다함. -남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풍선을 불었다. 주황 풍선, 검정 풍선, 초록 풍선 자꾸 자꾸 불었다. 너무 빵빵하게 불어 터질 것 같았다. 가슴이 좀 덜 답답했다. 풍선 부는데 집중하느라 아버지도 잠시 잊어버렸다. 온 집안 가득 풍선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좋아라하며 박수를 쳐댔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도 말없이 웃었다.
그 후 몇 해 동안 나는 풍선을 참 많이 불었다.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올 때쯤엔 온 집안이 풍선으로 가득 찼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한 방울 한 방울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풍선을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 펄펄 종이조각들이 하늘을 날아다닐 때에도 풍선을 불었다.
하늘이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주말, 풍선을 한 묶음 샀다. 그리고 세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로 나갔다. 훤하게 터진 강심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수없이 많은 빛의 입자들이 강 낯바닥에 반사되어 서로 부딪치면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 강물 위로 하얀 학들이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잔잔한 강 수면처럼 고요해졌다. 아이들과 나는 갖가지 색깔의 풍선을 불었다.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 시선의 줄에 매달려 있는 끈을 놓으려 해요.’
나는 풍선을 날렸다. 풍선은 인연의 줄을 끊고 강바람을 타고 높이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는 창공(蒼空)에서 하얀 학처럼 너눌너울 춤을 추듯이 날아가는 풍선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풍선은 슬픔의 노래, 아픔의 노래가 아니라 그리움의 노래가 될 것이다. 나는 세 아이의 손을 바투 그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