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8주간(목)
마르코 10,46ㄴ-52
‘믿음의 수준은 무엇까지 희망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자비를 청한다는 말은 이미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희망하는 능력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희망한다고 다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육체와 머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위협이나 나의 생각이 그 희망을 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목숨을 걸 수 없으면 희망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희망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그 희망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이 브라유는 세 살 때 사고로 실명을 하였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과 빛을 가져다 준 인물입니다.
그의 삶과 점자 발명의 과정은 희망과 인내의 진정한 본보기입니다. 루이 브라유는 1809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쿠브레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구를 만드는 가죽 장인이었고, 루이는 종종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 살 때, 루이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가죽 송곳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여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염이 반대쪽 눈으로 퍼져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루이의 부모와 본당 신부는 루이를 보통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루이도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학교에서 안 받아들여 줬지만, 루이는 결국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로얄 인스티튜트 포 블라인드 유스(Royal Institute for Blind Youth)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학습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은 글자가 양각으로 되어 있어 한 손으로만 읽어야 했고, 크고 무거워서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루이는 이러한 한계를 느끼며 시각장애인들도 효율적으로 읽고 쓰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821년, 프랑스를 방문한 군인 찰스 바비에(Charles Barbier)는 야간 전투 중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던 ‘야간 문자(night writing)’라는 체계를 루이의 학교에 소개했습니다.
바비에의 체계는 12개의 점을 이용하여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나, 복잡하고 사용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루이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더욱 단순하고 효율적인 점자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는 바비에의 체계를 개선하여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를 고안해냈습니다. 이 점자는 각 문자를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1824년, 15살의 나이에 루이는 자신의 점자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점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루이는 자신의 발명을 널리 알리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점자 체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음악 기호와 수학 기호도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점자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점자 체계는 결국 1854년, 루이가 사망한 지 2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두 눈을 잃고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꿈을 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자비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의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믿음과 희망이라는 두 날개로 위로 솟아오릅니다. 구원은 무엇에 의해 이뤄질까요?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생존하려고 선악과를 바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더 위대하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라고 말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순수한 젖이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곧 우리에겐 성체성사가 됩니다. 하느님의 진짜 자녀, 곧 자신도 하느님이기에 불가능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는 마치 넬슨 만델라처럼, 아니면 위 루이 브라유처럼 절망의 상황에서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매일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넬슨 만델라는 희망을 위해 27년간을 쉬지 않고 준비했다고 말합니다. 매일 운동하고 공부하였습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도 믿음이 있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