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신문 ♤ 시가 있는 공간] 햇살마루 / 우남정
심상숙 추천
햇살마루 우남정
아파트 108동과 119동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다
상강에서 입춘에 이르는 기간뿐이지만
지구는 돌고 태양은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겨울을 지나간다
밤이 가장 긴 계절이므로
여명이 붉어 오는 쪽으로 나는 머리를 둔다
아침햇살이 거실을 건너 발밑까지 밀려오는 것을 지켜본다
찰방거리는 파도에 맨발을 담근다
햇살을 가슴 끝까지 끌어 덮는다
블라인드 무늬를 지나가는 빛의 실루엣
후숙(後熟)을 통과하는 빛깔처럼
환하고 따뜻한 주황이 남실거린다
누추한 화초 몇 포기가 바닥에 그림자를 벗어 놓았다
빛나는 것은 왜 그늘을 더 도드라지게 할까
햇살이 책꽂이의 냄새를 말리고 제목과 저자를 훑어가다가
어제 읽다 만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소파에 한동안 걸터앉아 있다가
어느 슬픔이 통과하는지 책 모서리 끝에서 글썽인다
눈물이 없다면 무지개도 없을 것
햇살은 눅눅한 살림살이를 말리고 어둑한 눈매를 씻어 준다
갯벌에 무릎 꿇고 꼬막 캐는 아낙처럼
탁자 밑에서 숨은 동쪽을 찾아낸다.
도시의 겨울 틈새로 동백꽃 한 송이 피어났다
(우남정 시집『뱀파이어의 봄』 천년의 시작 2022)
[작가소개]
(충남서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2008『다시올 문학』신인상, 2018《세계일보 》신춘문예「돋보기의 공식」당선으로 등단, 시집『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2020년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뱀파이어의 봄』(2022년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김포문학상대상,《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
[시향]
우남정 시인은 겨울 햇살을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볼 수 있다. 24절기 중 상강에서 입춘에 이르기까지이다. 밤이 가장 긴 계절이므로 여명이 붉어 오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다.
아침햇살이 거실을 건너 발밑까지 밀려오는 것을 지켜본다. 찰방거리는 햇살의 파도에 맨발을 내어놓고 가슴 끝까지 햇살 끌어 덮는다. 햇빛은 블라인드의 무늬를 통과하여 형체를 만든다.
가을걷이 늙은 호박이 겨울 동안 푹 익어 더욱 밝아진 속 빛깔을 지니듯이 겨울 햇살이 환하고 따뜻한 주황으로 넘실거린다. 거실에 겨울 화초 몇 포기 바닥에 선명한 그림자가 생긴다.
“빛나는 것은 왜 그늘을 더 도드라지게 할까”
빛나는 것은 왜 완벽할수록 그늘을 더 분명하게 만들까? 빛과 그림자의 관계이다. 햇살이 책꽂이의 책 냄새를 말리고 제목과 저자를 훑어가더니 어제도 찾아 와 읽다가 만 페이지를 다시 읽는다. 햇살은 소파에 한동안 걸터앉아 있다가 무슨 생각으로
“어느 슬픔이 통과하는지 책 모서리 끝에서 글썽인다”
어느 슬픔에 닿았는지 책 모서리 끝에서 햇살이 글썽인다. 눈물, 그러니까 공기 중 물기가 없다면 빛의 파장인 무지개도 없을 것이다. 슬픔이 없다면 인고의 피어남도 흐지부지할 것이다. 햇살마루는 이 집안에 손보아야 할 눅눅한 살림살이를 말리고 그늘로 어두워져 이슬이 맺힌 눈매를 어루만져 씻어준다. 갯벌에 무릎 꿇고 꼬막을 캐는 아낙처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동녘 방향을 탁자 밑에 든 햇살로 발견하게 되어 일의 실마리를 잡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겨울 햇살이 머물다 가는 사이 동백꽃이 피어나게 하는 거룩한 역사가 성취된다. 세계의 존재자들은 햇살마루에 매달려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후숙(後熟)을 통과한 빛깔처럼 환하고 따뜻한 주황빛 겨울 햇살이 매일같이 찾아 들어 파도치기를 바란다.
글: 심상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