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왕자의 견성
기연
장유보옥선사와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서기 101년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와서 3년간 지극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한 뒤 수로왕 62년(서기 103년) 음력 8월 15일 대보름날 밤, 달이 중천에 떠 삼라만상을 두루
비추고 있을 무렵 장유화상은 慧眞, 覺初, 智鑑, 等演, 柱淳, 淨英, 戒英 등 7왕자와 선문답을 폈다.
왕자들은 외삼촌 보옥선사와 함께 달을 지켜 보며 즉 흥시를
읊조렸는데 한 왕자가「가을이 되니 바람이 서늘 하고 보름이 되니 달이 둥글도다」하니 또 한 왕자가「푸른 하늘에 삼경 달이 밝아서 심장과 쓸개까지
훤히 비추는 구나」하고 대답하고 또 다른 한 왕자는 땅위에다 가만히 동그라미를 기리고선 지워 버렸다. 그 밖의 네 왕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가는데 이 때 철거덩 하는 쇳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순간 일곱왕자는 현묘한 진리를 깨쳐 모두 성불하였는데 金王光佛, 金王幢佛,
金王相佛, 金王行佛, 金王香佛, 金王性佛, 金王空佛이 그들이다.
허왕후와 영지(影池)
일주문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200여 미터 오르면 길 오른쪽으로 둥근 못이 하나 나타난다. 바로 영지(影池)이다. 아들을
출가시킨 뒤 김 수로왕(金首露王) 부부는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가락국 수도인 김해에서 배를 타고 남해 바다를 거쳐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리산 골짜기까지 찾아 왔으나 장유 보옥선사는 수도 중인 왕자들의 마음을 흐트릴까봐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계속해서 왕비는 아들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운상원(雲上院)을
찾아 왔으나 그때 마다 장유화상은 여동생인 왕비(王妃)를 크게 꾸짖어 돌려 보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왕비는 아들이 수도하는 운상원을 찾아
갔는데 이 때 장유화상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네 아들들이 모두 成佛했으니 오늘은 만나봐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 때 공중에서 「연못을 보면 만날수 있으리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을 들여다 보니
황금 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영지를 일명 천비연(天飛淵)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허왕후가 아들을 만나러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장유화상이
머물렀던 곳을 범왕리(梵王里, 장유화상이 인도의 왕자 였으므로 그렇게 불림. 지금은 凡旺里라 쓴다)라고 하고,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정금리
대비동(大妃洞)에 대비암(大妃庵)이 있고 범왕 고개 너머에는 삼정승이 기다렸다는 삼정리(三政里)가 있다.
아자방과
문수동자
하동(河東)땅에 암행 순시차 온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가 화개동천(花開洞天)의 1백여 사암을
폐사할 구실을 찾으려고 칠불암을 찾았는데 절에는 스님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기에 괴이쩍게 생각하여 두리번거리다가 아자방(亞字房)을 발견하고는
그 곳으로 가서 문을 열어 젖혔다.
이때 한 동자(童子)가 나타나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에다 손가락을 갖다대고 제재를 가하였다. 그런데 이미
열려진 방문 안에는 마침 장좌불와(長坐不臥)에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끼만 식사하는 것을 말함)인 점심 공양을 마친 후라 참선하던 스님들이
각양각생이 자세로 졸고 있었다.
박어사가 그중 고개를 뒤로 젖히고 조는 스님을 바라보니 동자는
이러한 참선 자세는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이라 말하는지라 속으로는 크게 웃으며 한 쪽을 보니 고개가 무릎에 닪도록 떨구어 조는지라 이 자세는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冥觀)이라 동자는 대답했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자세는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 방귀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는 타파칠통관(타파칠통관)이라 이름하니 어느 한가지라도 참선자세가 아닌것이 없으므로 박어사는 어린 동자승에게 법문만 잔뜩 듣고 하는 수
없이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 닷새 뒤 박어사는 하동 현감과 함께 스님들의 신통력을 시험할
한 가지 계책을 짜냈다. 며칠이 지난 뒤 하동 관아에서 박어사로 부터 칠불암 선방스님들은 재주가 비상하니 만큼 각자 목마를 타고 관아의 동헌 앞
마당을 한 바퀴씩 돌라는 출두통지가 날아 들었다. 나무로 만든 목마를 타고 달리지 못하면 절을 폐쇄하고 달리면 선량(禪量, 절의
양식)을부담한다는 것이다.
하동 현감의 출두 통지를 받은 스님들은 모두들 걱정을 하다가 출두당일 관아 마당에 모였지만 서로가
얼굴을 마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함께 온 동자승이 안장도 없는 목마등에 올라타고 목마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치자 목마는 소리를 크게
지르며 동헌 앞 마당을 몇 바퀴 돌았다. 이에 놀란 박어사는 칠불암 스님들을 극진히 대우해 돌려 보내고 아자방에 두꺼운 장판을 다시 깔아 주었다
한다.
이날 동자승은 절에 거의 다 와서는「스님네들 어떻게 하든지 공부
열심히 하시고 수도에 전념하셔야 됩니다.」란 말을 남기고 홀연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일행들은 동자승이 문수보살의 현신임을 알고 문수동자가
사라진 곳에 동자부도를 세워 기념했다고 한다. 이 동자부도는 현재 일주문 아래 초의선사 다신탑비 바로 아래 남동쪽으로 5미터 거리에 있다.
사라진 칠불암
철비(鐵碑)
백암 성총스님과 무가당 스님의 부도 오른쪽 모서리 방향으로 5m 거리의 대숲에 비신(碑身) 없는
대석(坮石)이 있는데 이는 옛날 칠불암 사적비(事蹟碑)로서 높이 6척 너비 4척의 철비(鐵碑)가 세워져 있었으나 승노(僧奴)들의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이름이 비석에 적혀 있다고 해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비신을 뽑아 묻어 버렸다 한다. 이 곳에 칠불사 사적과 칠불의 성불,
불교의 전래에 대한 귀중한 기록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일제 때 일본인 불교 학자들이 이 비의 행방을 추적했으며, 해방 후 한국 사학자인
이병도, 권상로 등이 찾으려고 노심초사 했으나 아직까지 행방을 알길이 없다.
전쟁과 칠불암
종소리
1951年 1月 눈이 내리던 날, 태고의 정적을 헤집고 요란한
포성이 지리산을 흔들었다. 골바람이 일고 산이 울었다. 그리고 뒤따라 칠불암에서 불길이 솟았다. 보광전(지금의 대웅전)벽이 흔들리는데 불길 속
종루(지금의 원음각)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골짜기에 내리는 눈은 대개 조용하게 사뿐사뿐 소리를 내는데 그날은 달랐다.
눈발이
휘날리고 산이 울었다. 아자방 구들을 감싸고 있던 벽안당 건물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설선당은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크게 치는 목탁소리를
간간히 내고 타고 있었다. 그것은 서까래가 타면서 나는 소리였다. 종루에서는 종소리가 또 울렸다.
열흘 남짓 타고 있었던 칠불암은
하얀 재가 되어 골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은은하게 울려 주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때 칠불암을 방화하고 하산하던 군인들은 매복해
있던 반란군에 의해서 전부 몰살 되었다고 한다.
여순 반란군이 지리산에 들어오고 국군 토벌대의 전투가
6.25전쟁으로 연결되면서 칠불암은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데 1600여년 전에 조성 되었다는 칠불암의 '약사여래 석조상'도 아자방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칠불암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종루에서 오랫동안 종소리가 울려 메아리친 것은 이 약사여래 석상이 불탔기 때문에 일어난 이적(異蹟)일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이런 풍문이 나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칠불을 신성시 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의 강대국들도 밤낮으로 전쟁을 하면서도
그들의 조상이 쌓아올린 천년의 문화유산을 서로가 지켰다. 연합군은 일본의 여러 도시를 폐허로 만들면서도 교토(京都) 나라(奈良)등 유서깊은
역사유적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군의 지휘관들이 좀더 현명했더라면 우리가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천년 문화유산을 불사르는
작전방식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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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_()()()-
칠불사는 일년에 서너번씩 찾아 보는 사찰 이랍니다.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길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지요..청비님 덕에 다시 찾아 보니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입니다..더 믾은 것을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_()_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