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허친슨에 대한 오마주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7대 죄악이라는 것이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는 17세기 미국 보스턴의 청교도 마을을 무대로 오만•탐욕•분노•간음•질투•나태•폭식의 7대 죄악 중, ‘간음’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죄목으로 ‘간음(Adultery)’의 머리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하는 형벌을 받은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앤 허친슨’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앤 허친슨이 누구냐?
앤 허친슨(1591~1643)
북아메리카,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 활동한 여성 종교가. 영국의 링커셔에서 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상인과 결혼해서 1634년 남편과 도미, 보스턴의 교회원이 되었는데, 자택에서 집회를 열어서 신의 개인적 은혜를 강조하는 가르침을 주장하고, 교회에서 여성들을 교육할 것을 주장하며, 신봉자를 모았다. 교회와 정부의 율법을 부정하는 <도덕불요론자(antinomian)>로서 규탄 받았는데,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아서 추방과 파문을 당했으며 로드 아일랜드로 도망가서, 후에 인디언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니깐 앤 허친슨은 그 당시 식민지 초기의 자유사상가였다. 기본적으로 17세기 미국은 엄격한 청교도 사회였다. 청교도라고하면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주장했고, 엄격한 도덕, 주일(主日:일요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 등을 주창한 개혁파들이었는데, 기독교근본주의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유사상가? 그들에게 그녀는 이단이었다.
처음에 호손은 ‘들장미’에 빗대며, ‘성자’라는 수식어까지 동원하여 앤 허친슨을 언급한다.
이 들장미 덤불은 기묘한 우연으로 지금까지 역사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본디 들장미 덤불을 뒤덮고 자라던 우람한 소나무들과 참나무들이 쓰러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황량한 옛 황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듯 성자 같은 앤 허친슨이 이 감옥 문 안으로 들어갈 때 그녀의 발바닥이 닿은 땅에서 솟아난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지금 뭐라고 단정을 짓지 말기로 하자 p9
나는 이 문장에서 없어진 소나무들이나 참나무들이 청교도와 같은 과거의 옛 교리를 상징한다고 본다.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의식이 달라짐에 따라 케케묵은 교리의 자리를 ‘들장미’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리가 차지한다는 것이다. 사실, <주홍글자>는 당대 청교도 사회의 불완전함을 계속해서 지적하는 소설이다. 일단, 헤스터를 보자.
설정을 보면, 헤스터의 남편은 2년 전에 행방불명되어 그 생사도 모른다. 한창 사랑을 찾아 나설 젊은 나이에 졸지에 과부된 여자가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자인 것이다. 이런 여자가 육체적인 욕망에 끌린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랑하는 이가 생겨서 그이와 사랑을 나누어 임신을 하게 됐다. 자, 이런 사실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헤스터가 가슴에 평생 주홍글자 A의 낙인에 찍힌 체 살아가야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걸까? 이게 죽을죈가?
뭐, 우리야 남편이 행방불명 된지도 2년이 지났고, 인간의 행복추구권도 존중받아 마땅하니, 그런 교제를 간음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청교도에 있어서 이는 하느님의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 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 여자의 죄는 씻을 수없는 중죄다. 첫 부분에서 아낙네들이 간음한 헤스터를 때려죽여야한다는 말을 할 정도니, 이 사회가 얼마나 가혹한 사회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인간적인 동정의 시선이 없는 청교도사회. 근데, 그래서 동정을 거세한 종교의 엄격함이 인간사회에 완벽한 유토피아를 만들었는가? 헤스터가 형벌을 받는 마을은 기독교적 이상에 부합하는 하느님의 나라인가? 아무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때문에 청교도 사회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점에서 너새니얼 호손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해석을 폭넓게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소나무들과 참나무들이 쓰러지고 피어난 이 들장미는 ‘자유주의 신학’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얘기다. 이게 뭔 얘기냐고? 계속 들어보라.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중심교리인 속죄론(贖罪論)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데, 이는 종래의 교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종래의 속죄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속죄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데 대하여, 자유주의신학은 오히려 인간의 주관적인 정신상태의 변화에서 속죄적인 의의를 인정하고, 예수는 단지 뛰어난 종교적 인격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속죄를 통한 인간 성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속죄에 대한 긍정적인 면모가 <주홍글자> 가감 없이 드러난다. 헤스터를 보자. 처음에 헤스터는 간음이라는 죄의 대가로 주홍글자를 가슴에 달고 살지만, 끊임없는 회개와 반성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선행들을 통해서 간통을 의미했던 A를 능력(Able)이나 천사(Angel)의 의미까지 발전시킨다. 딤스테일 목사 역시 마찬가지다. 간음의 죄를 밝히지 못하고 위선자로써 7년을 살아가지만, 이를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고뇌하면서 마지막에 결국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숨을 거두는 장면은, 딤스테일 목사가 결국 구원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죄가 결국 인간을 더 성숙시키고 마침내 구원을 이루어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듯, 경험을 통해 값진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엄연히 일어나는 현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죄인의 교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낙인을 찍는 청도교의 극단적인 형벌의 가혹함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죄’ 그 자체만을 위한 비인간적인 형벌임을 너새이얼 호손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 소설이 앤 허친슨의 오마주라고 말했는데, 청교도 사회의 사고범주를 이탈한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자유사상가들이 종래의 종교를 자유롭게 다시 해석하고자했던 점에서 앤 허친슨의 기본마인드와 그 생각을 같이한다.
허나, 이런 죄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 이외에도 <주홍글자>의 큰 주제에 있어서 페미니즘 [feminism]을 또 빼먹을 수가 없다. 위에 적어놨듯이 앤 허친슨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주장과 시도들을 통해서 당대 청교도 사회에서 추방된 인물이다. 여성의 주체적인 역할을 부인했던 성서의 가부장적인 면모를 뒤엎고,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모는 주인공 ‘헤스터 프린’을 통해서 들어난다. 그녀가 주홍글자의 의미를 봉사와 베풂을 통해서 간음에서 능력이나 천사의 뜻을 변모시킨 점이나, 딤스테일 목사를 이해해주고 동정해주는 부분을 통해서 여성의 포용력과 주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헤스터가 후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돕고, 따스한 조언을 해주며 지냈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화신으로써 그녀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페미니즘, 자유사상가 그리고 앤 허친슨. 너새니얼 호손은 앤 허친슨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시대가 달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잘 알지만, 왠지 자꾸만 대화를 나누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뭐, <주홍글자>에 대한 해석은 이쯤하고, 끝으로 너새니얼 호손이 말한 ‘죄와 처벌’을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과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죄 한번 짓지 않고 사는 순수 무결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나? 이런 점에서 인간적인 면을 거세시키고 종교적 교리만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닌, 지은 죄를 고백하고 속죄함으로써 더 성숙하고 완성된 인간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인간적인 처방이 아니었을까?
이만 마친다. 총총.
<주홍글자에 대한 한가지 아이러니는, 정작 너새니얼 호손 본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단 사실이다. 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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