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성도가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도우시며 받으십니다. 기도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는 분(hearer and answerer)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중보자(mediator)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기도를 활성화시키는 분(activator)이십니다.
먼저, 성부께서는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언제나 성삼위 하나님의 대표가 되십니다. 따라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여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시므로 기도하는 자들이 미주알고주알 아뢰지 않더라도, 기도의 심정만 갖추고 있더라도, 충분히 자녀들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부르짖을 때에 이렇게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 교통하는 수단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성도들을 도우신다는 측면이 항상 수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의 항존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듣지 않으시면, 이는 곧 자신을 부인하시는 것이 되고 맙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가 충만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며 간구할 때에 스스로 당신을 제한하여 당신의 진노를 삼가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심판하려 하셨을지라도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며 빌면 마음을 바꾸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당시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가가 잘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끈질긴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결국에는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이렇게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 안에 들어와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 앞에 자신이 놓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다음으로, 기도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중보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시고, 능히 중보자가 되신 까닭에,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두려움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만일 이러한 중보 역사가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이 중보자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길과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길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른 통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기도자가 당신께서 세우신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인 것이지, 기도자가 간절한 심정을 가졌다거나 밥까지도 굶어가면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스스로 속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심정을 실제로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부자지간의 친밀한 교제의 축복에 대한 유일한 근거이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신을 깨끗케 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자신에게 덧입혀진 칭의의 은혜를 하나님께 제시할 때에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깨끗하고 만족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려 한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의지하는 실질의 정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성도의 아버지로 불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성도의 머리요, 유일한 구세주로 세우셨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며, 그의 중보를 통해서 아버지께서는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부터 줄곧 가르쳐 나오신 바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의 희생 사역과 기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들이 그렇게 구한 것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들이 드린 희생제물들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희생제물에게서 중보 역할이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곧 그러한 제사 제도를, 약속에 대한 표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대속사역을 예시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 원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서도 가르쳐졌습니다. 제사장은 그의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제사장의 가슴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들을 박은 에봇을 달았습니다. 그는 이 옷을 입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멀리 성소의 바깥뜰에 서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성소에서 집무하고 있는 제사장을 의지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사장은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시키는 제도와 상징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끝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활성화시키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본래 기도는 우리의 심령의 절박한 필요와 감사가 동기가 되어 순수하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옛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충동에 따라 기도를 드리게 되면, 이는 하나님을 우상숭배자들이 그들의 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는 잘못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식의 기도 행위가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지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성령께서 성도의 기도를 도우신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성도의 기도가 이교도들의 기도처럼 미신화 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진정 성령의 은혜요,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를 도우사 마음과 심령을 준비시키고, 하나님을 열렬히 사모하게 만들며, 성도의 요구와 감정들을 적절하게 규제하십니다. 성도의 감정이 우상 종교의 경우처럼 무아지경 같은 광란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통제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은 성도가 담대함과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당신의 자녀로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는 확신은 참된 기도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는 데서 비롯됩니다.
또한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인 열정과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도 역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는 성도가 기도할 때에 그의 심령을 감동시켜 하늘 깊은 곳까지 관통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열정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수종드는 법칙에 자신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가운데 마땅히 드려야 할 예우를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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