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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재 기자
작약꽃 속에 가슴을 묻는다
우리는 보통 오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라고 말한다. 장미도 오월을 대표하는 꽃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꽃이라 할 수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더 아름다운 꽃이라 할 수 있는 꽃이 작약꽃이 있다. 오늘은 작약이 잘 가꾸어지기로 소문이 난 청도 읍성 옆 작약밭으로 꽃구경하러 간다.
우선 작약에 대해서 알아볼 일이다. 비슷한 모란과 작약 차이점이다.
나를 맞아준 작약꽃에 흠뻑 빠지다
‘모란과 작약꽃은 꽃이 유사하게 닮아서 가끔 혼란을 줄 때가 있다. 모란은 나무여서 꽃이 지고 나면 나무가 남고, 작약은 다년생 초본이라 꽃이 지고 나면 뿌리만 남는다. 다시 내년에 싹이 터서 꽃을 피운다. 모란과 작약꽃 꽃송이가 서로 비슷하게 닮았지만, 모란꽃은 겹꽃이라면 작약은 한 겹이다. 요즘은 원예종인 겹꽃 작약도 많이 재배되고 있다. 또 꽃이 피는 시기가 서로 다르다. 모란은 보통 4월 중하순에 꽃이 핀다. 이에 반해 작약꽃은 꽃이 5월 상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작약꽃은 옛날부터 땅속뿌리 한약재를 이용해 오고 있다. 작약을 북한에서는 함박꽃이라고 불린다.’
작약꽃밭과 둘레 나무 그 너머 꽃자리정원이 보인다
이처럼 봄의 절정이 되면 꽃 향연이 곳곳에 펼쳐져 꽃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청도 읍성 곁에 잘 가꾸어진 작약꽃밭을 찾아간다. 읍성과 작약이 어우러진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친다. 하지만 꽃은 활짝 피는 시기가 맞아서 떨어지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다. 우리는 5월 중순경에 맞추어 갔다. 우리의 예측이 거의 맞아떨어진 셈이다.
읍성 동문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니, 저 아래 작약꽃밭이 펼쳐져 있다. 꽃이 활짝 피어서 우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꽃에 대한 반응이 마음을 흥분시켰다. 꽃잎 색깔이 같은 듯하면서도 각각 다른 빛깔을 띠고 있어 눈이 현혹되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과 곁에 선 나무들의 초록빛이 어우러지면서 곁에는 청도 읍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곁에 이름도 예쁜 꽃자리 찻집이 있고 정원에는 갖가지 꽃이 피어 있다. 하늘꽃정원에서 만나는 꽃들도 그에 못지않게 눈을 즐겁게 해준다. 하늘도 맑다.
꽃밭의 여인 모습이 꽃을 닮아 읍성과 어우러진다
꽃잎에 방향에 따라 꽃 색상이 다르게 짙게 혹은 엷게 표현된다. 여인의 모습과 하모니를 이루면 더욱 꽃밭을 어울리게 꾸며주고 있다.
멀리 벌판이 보이고 그 너머에 산들이 오밀조밀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어 있는데 여기만 작약꽃이 피었다. 그 곁에 수련이 예쁘게 꽃망울이 피었다. 수련은 햇볕이 받아야 잎을 활짝 피운다.
누구나 여기에 오면 작약꽃에 반하고, 청도 읍성 가에 꾸며진 갖가지 모습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작약꽃에 눈을 떼어 이제 읍성을 돌아본다.
‘청도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일원에 있다.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순 없으나,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 시대 선조연 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년)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km), 높이 5자 5촌(약 1.64m)이며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여러 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되어왔고, 고종 7년(1870년)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 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을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청도 읍성 소개 글에서>
앞쪽에 동쪽 성벽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 그 앞에는 수많은 고을 관리를 한 선정비 군이 즐비하게 서 있다. 누가 세워준 것인지? 아니면?
고마청, 말이 외롭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고마청이 외롭게 서 있다. ‘고마청(雇馬廳)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이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迎送)에 따른 제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고문헌에 고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창고(倉庫)」조이다. 이후 1895년<청도 읍지>에 고마청이 동문 안에 있었다. 현감 조원봉이 신·구관 환송 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하였다.’<안내문에서> 말의 형상이 외롭게 뛰어가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외로워 보인다.
청도 읍성 동쪽 성벽 앞에 신도비가 즐비하다
성곽 위를 걸어서 간다. 높이 올라오니 옛 선조들이 이곳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바람이 한 줄기 시원하게 불어준다. 영(令)자가 새겨진 깃발들이 휘휘 날린다. 바람을 타고 우리도 훨훨 날아서 또 다른 곳 작약꽃을 찾아간다.
청도 읍성의 북문(공북루)
바람에 들려오는 소식에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도봉서당에 작약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달려간다. 꽃 찾아 향기가 우리를 끌어당긴다.
경주는 곳곳에 많은 유물이 있지만, 또 다른 서악동에는 무열왕릉이 있어 가 본 적이 있지만, 도봉서당은 처음 가는 곳이다.
‘도봉서당은 조선 성종 대의 학자였던 불권헌 황정의 학덕과 효행이 높아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5년(중종 1년) 지금의 위치에 추보재라는 묘사 재실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 모습이다.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97호로 지정되었다. <경북 도봉서당 위키백과>
경주 도봉서당 본채
역시 여기도 꽃소식을 듣고 온 여행객이 골목을 오가고 있었다. 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서당은 위치적인 안온함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이로 우리도 숭앙문을 들어서자 도봉서당 본채가 있다. 뒤편에 작약꽃밭이 있고, 비스듬한 언덕바지에 작약이 무더기로 심어 있다. 아마도 도봉서당은 작약꽃 때문에 더 이름을 얻은 것 같다. 서당 안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만, 꽃밭에는 사람이 부딪힐 정도로 많이 있다.
멀리 달려 온 우리를 맞아주는 작약꽃
경주 서악동 삼층 석탑이 서당과 꽃밭 사이에 연등이 둘러쳐 있었다. 도봉서당 건너편에는 서악리 고분군이 보인다. 경주에는 고분군을 언제나 볼 수 있다. 뒤편에는 진지왕릉과 헌안왕릉이 있다. 그 곁에는 이름 없이 고분군이 보인다. 천 년의 역사가 그렇게 경주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약꽃과 연등 그리고 탑, 그 너머 고분군
오후 햇살이 더해주는 꽃들의 색깔이 선명하게 곱다. 전체를 찍어 보고 개별꽃들을 찍고, 원경과 근경을 넣어서도 찍어 본다. 일행들은 흩어져 자신의 사진을 찍기에 보이지도 않는다.
햇살이 소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뚫고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도 길게 늘어진다. 많은 사람이 찍어주고 찍히면서 나름의 작약꽃을 즐기고 있다.
서악동 삼층 석탑과 작약꽃, 그리고 도봉서당을 구도에 맞추어서 찍어 보노라니 사람이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꽃과 석탑 그리고 고분군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다.
작약과 연등 그리고 탑 도봉서당 고분군
‘서악동 삼층 석탑은 보물 제65호로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바닥돌은 낮게 받침돌을 깔고 그 위에 8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 올렸다. 1층은 남쪽 면에 네모꼴로 파서 문을 표시하였고 그 좌우에 금강역사상을 새겼다. 문 모양 부분에는 문고리를 달았던 구멍이 2개씩 남아 있다. 지붕돌은 벽돌탑처럼 아래위 쪽이 모두 계단식이고, 처마가 평행한 직선이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큰 직사각형 돌을 쌓아 바닥 돌을 구성한 것은 경주 남산동 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이나 남산 용장계 지고 제3시지 삼층석탑(보물 제1935호)과 같은 방식인데 서악동 삼층 석탑은 바닥 돌 위에 놓인 몸돌 받침이 1단으로 줄어들고 크기도 작아졌다. 이러한 모양은 경주 지역의 탑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이다.’<서악동 삼층 석탑 소개 글에서>
오후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비춰 꽃이 더 고혹스럽다
서녘 해가 기울어지고 있다. 그 빛이 더욱 작약꽃들을 아름답게 비춰주고 있다. 마음은 어두워지도록 셔터를 누르고 싶다. 하지만 너무 깊이 빠지는 것도 금해야 할 덕목이다.
이제 셔터를 쉬게 하고 우리도 서녘 해를 등지고 도봉서당을 내려온다.
<글, 사진 = 박홍재 객원기자, taeyaa-park@injurytime.kr>
박홍재 시인
◇박홍재 시인은
▷경북 포항 기계 출생
▷2008년 나래시조 등단
▷나래시조시인협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회원
▷세계시조포럼 사무차장(현)
▷부산시조시인협회 부회장(현)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바람의 여백》
▷부산시조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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