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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2월07일(일요일) [공주시 무령왕릉&논산시 관촉사&익산 미륵사지&고창 고인돌공원&고창 선운사] 탐방일정
국민은행 010-9024-3919(예금주: 이진미) 계좌로 10월28일 회비 30,700원 송금 완료
8열1번 좌석 예약
탐방지 : [공주시 무령왕릉&논산시 관촉사&익산 미륵사지&고창 고인돌공원&고창 선운사]
탐방일 : 2025년12월07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8시간 소요)
07:00~09:00 “신사산악회” 버스로 지하철 3호선 신사역 5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40-8 번지에 있는 무령왕릉으로 이동 [2시간, 129.7km]
09:00~09:40 삼국시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인 무령왕릉을 탐방 후 백제오감체험관을 관람
[무령왕릉 (武寧王陵)
목차
정의
개설
내용
의의와 평가
이칭 : 송산리고분군 제7호분
지정 명칭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公州 武寧王陵과 王陵園)
지정기관 : 국가유산청
종목 :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
개설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된 송산리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 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용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다. 입지한 지형은 남향한 경사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원형인 분구(墳丘)의 지름은 약 20m 이며, 무덤의 상면에 호석(護石)으로 추정되는 잡석으로 쌓은 석축도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였으나,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편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무덤의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후면의 관대는 동서 너비 293㎝, 남북 간 너비 315㎝의 규모이다. 관대와 바닥의 경계는 벽돌쌓기의 차이, 즉 관대와 바닥 전면의 벽돌쌓기는 삿자리문 형태로 장방형의 벽돌을 깔면서 경계에 해당하는 관대 외곽은 벽돌을 길이로 늘어 쌓아 구분하였다. 이 바닥의 벽돌 아래는 묘실에서 연도를 지나 묘도로 빠져나가는 배수시설이 있다.
묘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연도는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의 규모이고,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묘실의 축소판으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방법도 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천정 이하의 벽면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이 있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바닥도 묘실처럼 벽돌을 삿자리문으로 깔았으나 묘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묘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연도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에 벽돌을 쌓아 304㎝의 높이로 연도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무령왕릉에 사용된 연꽃무늬가 있는 것 외에도 제6호 벽돌무덤에서 사용된 동전무늬가 있는 전범문(錢范文)의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에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만들었다. 벽면은 좌우 벽을 상부에서 곡률을 주어 정상부에서 만나고, 전 · 후벽은 수직으로 하여 터널형 천정을 축조하였다. 전축은 뉘어쌓기와 세워쌓기를 반복하여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으로 축조되어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벽돌쌓기 방법은 네 벽면이 동일하지만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둥근 형상이 표현되는 부분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으며,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었으며, 위치에 따라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과 연화문을 다르게 배열하였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 · 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살창(유자창)을 시설하였다. 이외에 묘실 벽에는 대형의 철정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묘실 바닥을 1단 높여 관대를 시설하면서 그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연화문이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막음벽돌 중에는 무문전과 제6호 벽돌무덤의 벽돌과 동일한 전범문 벽돌이 꽤 많이 있다.
출토유물은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데, 연도 입구에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誌石) 2매와 오수전 한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발견되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 금제관식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귀걸이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제 뒤꽂이 1점(국보, 1974년 지정),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와 금은제도자 각 1점, 발받침 1점(국보, 1974년 지정) 등과 왕비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비 금제관식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귀걸이 2쌍(국보, 1974년 지정), 금목걸이 2개(국보, 1974년 지정), 은팔찌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개, 금동식리 1쌍, 베개 1점(국보, 1974년 지정)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국보, 1974년 지정)과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 · 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 · 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있다.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 ·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이 백제 묘제의 전개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벽돌무덤으로서 중국 묘제라는 특수성을 지녔지만, 백제의 묘제 변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묘제 측면에서 살펴볼 경우 한강유역 궁륭식 천정의 굴식 돌방무덤이 웅진천도와 더불어 송산리 제1∼4호분과 같은 형태로 도입되었다가, 이후 무령왕릉과 제6호 벽돌무덤의 출현에 영향을 받아 터널형의 천정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이와 같이 외래의 벽돌무덤이 기존의 백제 묘제 속에 무리 없이 수용되고 전통적 묘제 자체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릉의 영향이 단순한 묘제의 변화뿐만 아니라 백제의 사회 · 문화에 걸쳐 전반적인 변화상을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무령왕릉과 출토유물을 통하여 웅진기 백제문화는 중국 남조문화의 직접적 영향 관계에 있으며,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백제오감체험관
백제오감체험관은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승지인 ‘고마나루 명승길’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의 송산리고분군,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눈과 귀로 배운 역사를 손끝으 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갖췄다. 지하 1층과 지상 1·2층에 8개의 테마관을 갖춘 이곳 체험관은 탁본문양체험, 야광스탬프 등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형 놀이 및 게임 프로그램을 설계해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웅진백제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주목할 만한 공간은 1층 로비에 자리한 ‘공감의 창’으로 소리와 터치로 색상이 변하는 2층 높이의 압도적인 규모의 패널이다. 이 패널에는 관람객이 체험 관에서 찍은 사진을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올린 콘텐츠를 화면으로 보여준다. 또 한 같은 층에 자리한 ‘창조의 창’에서는 백제시대 유물을 크레파스로 예쁘게 채색한 후 스캐너로 통해 그래픽 맵핑 영상으로 벽면에 띄울 수 있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00~17:30
쉬는날 : 설날 및 추석 명절 당일
입장요금 : 무료
(출처 : 공주 문화관광 홈페이지)]
09:40~10:35 “신사산악회” 버스로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번지에 있는 관촉사로 이동 [55분, 40.2km]
10:35~11:20 관촉사(灌燭寺) 탐방
[관촉사(灌燭寺)
관촉사(灌燭寺)는 고려 광종 19년(968) 혜명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비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하다.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개판하여 해인사로 옮겨간 목우자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판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안이라는 명승이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고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말한 이후,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내에는 불상, 석탑, 보물232호인 석등, 배례석, 석문 외에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14년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에 개수되었다.
문화재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등 - 보물 제232호
논산 관촉사 석문 -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79호
논산 관촉동 석조비로자나불입상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8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지정(등록) : 2018년 4월 20일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관촉동, 관촉사)
시대 : 고려시대 전기
수량/면적 : 1구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 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이 참여하여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11:20~12:05 “신사산악회” 버스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0-1 번지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로 이동 [45분, 30.9km]
12:05~12:40 익산 미륵사지 탐방 후 국립익산박물관 관람
[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여기다가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 설화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것이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미륵사는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 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진이 지은 『와유록(臥遊錄)』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불타버린 것과 달리 다른 원인으로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은 대부분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 결과 일연이 기록한 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에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을 일직선상으로 하나씩 배치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탑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주로 목탑이 건립되었다. 그러던 중에 익산 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가지고 미륵사 탑을 만들게 되는데, 이 탑을 만들면서 목조 건축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사 탑은 신라시대에 경주 감은사 탑으로 이어지고, 다시 석가탑을 통하여 완벽하게 완성된다.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미륵사 터는 넓이가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국보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석탑인 서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이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 달리 2기가 있다.
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 뒤편에 자리잡은 천호산 자락에 천호 동굴이 있다. 천호산 아래 펼쳐진 여산은 오늘날 익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이다. 하지만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전까지만 해도 독립된 하나의 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속」조에 “풍속은 검소함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군의 진산은 호산이었다.
여산군 객관의 동북쪽에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누각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윤향은 “늦은 아침에도 밤비는 완전히 개지 않았는데, 연한 풀 새로 핀 꽃은 한 뜰에 가득하구나. 오직 담장 동쪽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대나무는 영롱하게 지난해의 푸른빛 변치 않았네”라는 시를 남겼고, 성임은 그의 시에서 “서 있는 대나무는 천 그루의 낚싯대요, 꽃은 백 일의 붉은 것일세. 송사가 한가하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시대가 태평하니 고을에는 성이 없다. 멀리 뵈는 나무는 연기 속에 아득한데, 기울어지는 햇빛은 비 뒤에 더욱 밝구나. 어지럽게 솟은 산 창칼을 비껴 세운 듯한데, 새 차를 연에 갈아 내는도다”라고 하였다.
성임의 시처럼 송사가 없어 한가했다던 여산은 지금은 면 소재지로 한가할 따름인데, 옛 시절 이곳이 군 소재지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산동헌만이 남아 있다.
여산동헌은 여산면 당산리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의 납도리집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때 여산우체국으로 사용되다가 양로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진남루와 문루정이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찾을 길이 없고, 내동헌 터와 양재역 터, 연방죽리에 있었던 옥 터 등은 그저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또한 장수가 오줌을 누어 골이 졌다는 시시내골도, 왕비가 태어났다는 왕비안골도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다.
여산면 원수리에서 시조 문학으로 우뚝 선 가람 이병기가 태어났다.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인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달은 이병기는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과 국사 연구를 시작한다. 또한 시조를 연구하고 짓기 시작한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2년에 옥고를 치른 그는 광복 후 전북대, 중앙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스스로 술 복과 제자 복, 화초 복이 있다고 자랑했던 그는 시조 문학을 활짝 꽃피워냈고 『한중록』, 『춘향전』 등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비는 전주 다가공원에 세워져 있고, 여산 남초등학교 교정에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별」을 새긴 시비가 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지금은 익산시에 딸린 함라면 소재지 부근에 함열현이 있었다. 철도가 개설되면서 함열이라는 이름을 빼앗긴 채 함라라는 이름을 얻은 함열에 유배를 왔던 교산 허균이 남긴 글을 보자.
무신년(선조 41, 1608) 공주에서 파관(罷官)되고 나서 전사(田舍)를 물색하기 위해 부안에 갔다가 바닷가에 있는 산속의 거처할 만한 땅을 얻어 경영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도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죄를 져서 유배될 적에 기필코 함열을 요구한 것은 이곳이 부안과 가까워서 사면을 받으면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균은 그 뒤 이곳에 있으면서 현감으로 온 한후의 요청을 받아 「함열현 객사대청 중건기(咸悅縣客舍大廳重建記)」를 지었다.
함열의 고을 됨이 외떨어져 호남의 바닷가에 있다. 땅은 사방이 모두 20리가 못 되고, 백성은 가난하여 저축이 없으며, 또한 큰 산이 없어 편남(楩枏)과 예장(豫章) 같은 좋은 재목이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낮고 좁으며 민가는 대개 띠로 지었다. 또한 정유년 난리를 겪으면서 왜적이 몹시 잔학하여 노비는 죽거나 도망친 자가 반이 넘고, 논밭은 황폐한 채 버려진 것이 십중팔구다.
이 기록을 보아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함열향교는 1437년에 창건되었는데,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8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국립익산박물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국립박물관.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익산, 군산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며, 주로 미륵사지 출토 유물과 백제 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본래 전라북도가 운영하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으로 개관했다가,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관리주체가 전환되면서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2020년 1월 10일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새롭게 증축 개관하였다.
연혁
1994. 10. 07. 전라북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설치조례 제정
1995. 01. 전라북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 개소
1996. 07. 04. 미륵사지출토 국가귀속유물 위,수탁 협약(19,049점) (국립전주박물관장-전라북도익산지구문화유적지관리사업소장)
1996. 11. 22. 미륵사지유물전시관 등록
1997. 05. 09.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개관
2002. 사무동 1동 신축 및 기획전시실 1실 신설
2007. 07. 30. 중원출토 금동향로 국가귀속 및 미륵사지유물전시관 보관
2007. 08. 03. 미륵사지유물전시관으로 명칭 및 기구변경
2015. 12. 30.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으로 전환
2016. 03. 16. 제1 종합박물관 등록, 제 2016-1호
2019. 02. 26. 국립익산박물관 승격(대통령령 제 29571호)
2020. 01. 10. 본관 전시동 증축 및 재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토요일, 공휴일은 1시간 연장)
휴관일 : 1월 1일, 설날 , 추석,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하고 다음 평일에 휴관)
관람료 : 무료
주차료 : 무료]
12:40~14:01 “신사산악회” 버스로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번지에 있는 고창 세계유산 고인돌박물관으로 이동 [1시간 21분, 92.8km]
14:01~14:40 고창 고인돌공원 탐방 후 고창 세계유산 고인돌박물관 관람
[고창 고인돌공원(高敞支石墓公園)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76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고인돌 공원.
개설
기원전 4~기원전 5세기경 조성된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인 고창 지석묘군(高敞支石墓群)[죽림리 고인돌군, 상갑리 고인돌군]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9.5㎞ 남짓한 지점에 자리한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 내에 447기가 분포되어 있고, 지정 보호 구역의 면적은 57만 3,250㎡이다. 고창 지석묘군은 1994년 12월 21일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다.
사적 일대의 표고는 최저 15m에서 최고 199m 정도인데, 대부분의 고인돌은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표고 15~50m의 범위 내에 군을 이루며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죽림리 고인돌군과 상갑리 고인돌군의 밀집 분포는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밀집된 것으로서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묘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사상, 사회상, 문화상, 묘제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건립경위
고창고인돌공원은 고창군 특유의 문화유산인 고인돌을 관광 자원화하여 도시민과 내국 관광객 및 외국 관광객에게 고인돌의 가치와 역사를 소개하고, 자원을 보존 관리하여 후세에까지 문화유산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2004년부터 죽림리 부지에 26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유적지를 정비하였고, 고인돌박물관·선사마을 재현공간·체험실습장·탐방로 등을 조성하여 2008년 7월 31일 준공하였다. 고창고인돌공원 내에 자리한 고창고인돌박물관은 2008년 9월 25에 개관하였다.
구성
고창고인돌공원의 총면적은 9만 2,390㎡이다. 부대 시설로 야외에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움집, 가축 우리 등과 목교, 해자 등으로 꾸민 선사 마을 재현 공간[1,231.96㎡]과 고인돌 상석 끌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체험 실습장[1,062.06㎡], 야외 무대, 묘제 변천 전시장 등이 있으며, 화장실과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 밖에 자연석으로 만든 의자와 이엉을 얹은 초정(草亭) 등의 쉼터가 설치되어 있고, 가래나무·대나무·뽕나무·오리나무·배롱나무 등의 나무와 구절초·앵초·양지꽃 등의 야생화가 곳곳에 식재되어 있다. 고창 지석묘군의 고인돌 447기를 둘러볼 수 있는 탐방로는 제1~제6코스에 걸쳐 정비되어 있다.
고창고인돌박물관은 건물 총면적이 3,952.8㎡로, 지상 3층 규모이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3D입체영상실, 다목적강당이 들어서 있고, 2층의 상설전시실에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조형물과 대형 벽화, 영상 시설, 고인돌 관련 정보 검색대, 세계 거석문화 소개 코너가 설치되어 있다. 3층은 선사시대 방식의 불 피우기, 암각화 그려 보기 등 선사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로 꾸며졌으며, 쉼터로 활용되는 옥상에는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인근의 고인돌 유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현황
고창고인돌공원을 찾아가는 방법은 크게 4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고창인터체인지에서는 ‘고창인터체인지 삼거리→아산 방면[우회전, 8분]→아산 삼거리[선운사 방면, 1분]→하갑교[우회전, 2분]→고인돌 유적’의 경로를 이용할 수 있고, 선운사인터체인지에서는 ‘선운산인터체인지 삼거리[우회전, 5분]→흥덕검문소[고창 방면 우회전, 10분]→현대아파트 사거리[우회전, 10분]→고인돌 유적’의 경로를 밟으면 된다. 이 밖에 ‘정읍인터체인지→고창 방면[좌회전, 20분]→현대아파트 사거리[우회전, 10분]→고인돌 유적’ 또는 ‘백양사인터체인지→고창 방면[좌회전 20분]→그랜드모텔 삼거리[5분]→고창군청[오거리, 직진 5분]→K마트 삼거리[우회전, 1분]→현대아파트 사거리[좌회전, 10분]→고인돌 유적’의 방법이 있다.]
[고창 세계유산 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 및 생활상과 세계의 고인돌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상설전시관은 전체 전시 공간에 대한 관람 정보와 상설전시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주제전시실의 전시 내용을 압축해서 상설 전시함으로써 전시 내용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일으켜 적극적인 관람 욕구를 유도, 관람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전시관 3층에 마련된 체험 공간에서는 불 피우기, 암각화 그려보기, 고인돌 만들기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또한 원형움집의 내부를 1:1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만들어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관 외부의 넓은 야외공간은 고창 청동기인의 생활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테마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선사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선사마을과 고인돌의 덮개돌을 운반해 볼 수 있는 고인돌 끌기 체험 마당과 대표적인 묘제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마당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안내데스크 및 정보검색 시스템을 설치하여 관람객을 위한 사진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40~14:58 “신사산악회” 버스로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번지에 있는 선운사로 이동 [18분, 13.8km]
[고창 선운사
선운사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兜率山)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운사의 창건은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 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 및 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선운사를 창건하였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 선운사에는 보물 8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1점,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3점 등 총 25점이 있다. 특히 대웅전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높이가 평균 6m는 되는 동백나무들의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루고, 선운산의 동백숲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중순경 동백연예술제가 열린다.]
14:58~17:00 [선운사 대형주차장~마이재~수리봉(선운산정상,인증)~소리재~용문골~도솔암~도솔천계곡~선운사
(대웅보전/만세루,역사문화대장정 인증)~선운사 대형주차장](10km)의 코스로 선운산 산행
[선운사~도솔암 : 46분 소요, 2.6km]
[선운사~참당암 : 1시간 소요, 2.4km]
[선운사(禪雲寺)
선운사(禪雲寺)는 대한민국의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위치한 명승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역사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조 18년(1794) 임우상이 기술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법명을 법운자로 한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진흥굴 윗산에 중애암을, 만월대 아래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고 공민왕 3년(1354)에 재중수하였으며 조선 성종 5년(1474)에 행조선사가 중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무장태수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통해 161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재건하였다.
선운사는 한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을 내세운 조선 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폐쇄령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금동보살좌상·지장보살좌상·선운사 대웅전·참당암 대웅전·도솔암 마애불 등의 보물, 동백나무숲·장사송·송악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으며, 석씨원류 경판·영산전목조삼존불상·6층석탑·범종·약사여래불상·만세루 백파율사비·참당암 동종·선운사 사적기 등 보물 7점, 천연기념물 3점, 기타 지방문화재 총 19점의 지정문화재 등이 있다.
문화재
선운사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대웅전(보물 제290호), 참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소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52호) ,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보물 제2031호) 등의 보물 7점과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등 천연기념물 3점이 있으며, 추사가 쓴 백파율사비(전북 유형문화재 제122호)를 비롯한 19점의 유형문화재가 있다.
이 가운데 도솔암 내원궁(전북 문화재자료 제125호)은 기암절벽 위에 조성된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처 가운데 하나로 연중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동학혁명 때 배꼽에서 비결을 꺼내갔다는 도솔암 마애불이 바로 발아래 있고, 위로는 검단선사에게 쫓겨 달아나던 용이 뚫었다는 용문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백파율사비는 생전에 추사와 선 논쟁을 벌인 조선후기 화엄학의 대종주 백파긍선 스님의 비다. 백파스님이 입적하자 추사가 애통해 하며 직접 짓고 쓰기를,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을 주고받으며 나눴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입에 올리는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까?”하며 당시 벌였던 선 논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물 목록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79호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80호
고창 선운사 대웅전(高敞 禪雲寺 大雄殿) : 보물 제290호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 보물 제803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 : 보물 제1200호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 보물 제1752호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懺堂庵 石造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031호
선운사 만세루 : 보물 제2065호
고창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 좌상 (高敞 禪雲寺 金銅 地藏菩薩 坐像)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보살상.
보물 제279호 (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선운사 (삼인리)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15세기경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마치 모자 같은 두건(頭巾)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두건의 좁은 띠가 귀를 덮어 내리고 있다. 이러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 불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얼굴은 비만하면서도 평판적이고, 눈 · 코 · 입 등이 얼굴 가운데로 몰려 있으며 생기가 없다.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된 목은 밭아서 움츠린 듯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가 낮아져 빈약해 보이는 하체는 상체에 비하여 다소 불안정하다.
통견(通肩)의 가사와 같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이 불상의 착의법은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어진 독특한 치레 장식이 특징적이다. 고승의 영정이나 불상 · 보살상에서도 쓰이는 것이지만, 지장보살상의 착의법으로 자주 나타나는 형식이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두꺼운 옷주름 선은 규칙적으로 접혀 있어 부자연스럽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동여맨 단정한 띠 매듭이 표현되었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가슴 아래에서 옆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두 다리는 옷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특징
이 보살상은 도솔암에 봉안된 14세기의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목걸이 장식, 밋밋한 가슴 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다. 하지만 신체 비례에 비하여 머리가 유난히 큰 점이라든가 목이 밭아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빈약한 하체, 간략화된 장식,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도솔암의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 신앙의 한 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 지장보살 좌상 (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 地藏菩薩 坐像)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보살상.
보물 제280호 (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라북도 고창군 도솔길 294 (아산면,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좌(臺座) ·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다. 상체가 늘씬하면서도 당당한 편이어서 고려 후기의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이나 충청남도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보물, 2008년 지정)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보살상은 길상좌(吉祥坐)주1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환미감(丸味感) 있는 어깨, 당당한 가슴과 함께 단아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얼굴에서도 잘 나타나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 초승달 같은 눈썹, 가는 눈, 오뚝한 코, 작고 예쁜 입 등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아담한 여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또한 신체와 얼굴의 단아한 형태는 서로 잘 조화되어 있다.
이 보살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두건 쓴 머리와 손의 인상(印相)주2이다. 두건은 이마를 걸쳐 귀 뒤로 해서 어깨까지 천을 뒤집어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두건은 고려시대의 지장보살화(地藏菩薩畵)에 흔히 보이는 지장보살상의 특이한 형식이다.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說法印)을 결(結)하고 왼손에는 엄지와 검지로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 독특한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지장보살상의 형식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락(瓔珞)을 장엄하게, 법륜을 정교하게 치장한 것은 가슴의 화려한 목걸이나 손목의 팔찌 등과 함께 고려 후기의 귀족적인 호사한 취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옷으로는 대의(大衣) 모양의 천의(天衣)를 일정한 두께로 입고 있다. 반달 모양으로 옷자락을 오른쪽 어깨에 걸친 것과 왼 팔꿈치의 Ω형 주름 등은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이나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대의에서와 같은데, 보살의와 불의(佛衣)를 구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Ω형 주름 등의 특징에서도 불상과 동일한데, 이 보살상은 당시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꽃무늬와 연주문(連珠文)이 정교하게 새겨진 승각기 치레와 승각기주3를 묶는 네 갈래 진 띠 매듭 또한 이 당시 대부분의 불보살상에 묘사된 특징과 동일한 것인데, 이 역시 이 지장보살을 특징지어 주고 있다.
특징
보살상에 표현된 선묘는 단순, 명쾌한 것이 특징이다. 즉 어깨나 소매 · 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도 나타나지만 간명하고 명쾌한 표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늘씬하면서도 단아한 양식적 특징은 당시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이 보살상은 장곡사 · 문수사의 불상과 더불어 당시를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선운사 대웅전
선운사 대웅전(禪雲寺大雄殿)은 대한민국 보물 제290호다.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년) 재건하였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단청 벽화가 뛰어나다. 단층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에는 모두 빗살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건된 사찰건물. 불전.
보물 제803호 (1984년 11월 30일 지정)
소재지 전북 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194-77, 선운사 (삼인리)
198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다포계(多包系) 양식을 한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 백제의 고승 검단선사가 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을 완료했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선운사에는 원래 많은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참당암을 포함하여 동운암, 석상암, 도솔암 등이 남아 있다.
전각 내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1900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의문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기록한 「참당사고사급법당기(懺堂寺故事及法堂記)」가 1794년(정조 18)에 간행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으나 정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배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
보물 (구)제1200호(1994년 5월 2일 지정)
시대 고려시대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길 294, 선운사 (삼인리)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 여래 좌상이다.
1994년 5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禪雲寺 兜率庵 磨崖佛)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이 마애불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중에 마애불의 명치 부위에 있는 감실에 비결이 들어 있어 그것이 꺼내지는 날 조선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학 농민군이 비결을 탈취해 갔다는 말도 전해진다.
현지 안내문
국문 설명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200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은 커다란 바위벽에 새긴 불상으로, 신체 높이가 약 15.7m, 무릎 너비는 약 8.5m이며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마애불의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성 시기는 신라 말기,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고 백제 위덕왕 때 검단 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에 목재가 박혀 있는 것도 있다. 이것들은 마애불의 장엄함을 위해 설치한 닫집(법당의 부처를 모신 자리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있었던 흔적이다.
가슴 아래 새겨진 복장(불상(佛像)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ㆍ은ㆍ칠보(七寶)와 같은 보화(寶貨)나 서책(書冊) 따위를 넣음)에는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내용은 복장 안에 보관된 비기가 알려지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기록을 꺼내 보려다 천둥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한다. 100여 년 후 동학농민혁명이 움트던 1892년에 동학 접주 손화중이 그 기록을 무사히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전설이기도 하다.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수량/면적 3구
보물 제1752호 지정(등록)일 : 2012.02.22.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로 250 (아산면, 선운사 대웅보전)
시 대 1633년(인조11)
소유자(소유단체) 선운사
관리자(관리단체) 선운사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삼불상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이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괴로움이 없는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다.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나무 기둥을 세워 윤곽을 바로잡고 흙을 바르고 천을 덧씌운 뒤에 금박을 입힌 소조 불상이다. 선운사 불상은 조각적·종교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불상의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 등은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불상의 받침에 승려 무염 등 10여 명이 1633년에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의 명칭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어 17세기 불상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로 모시는데, 선운사는 대웅보전임에도 불구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국가유산 설명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高敞 禪雲寺 懺堂庵 石造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2031호
수량/면적 상 1구, 대좌 1기
보물 제2031호 지정(등록)일 2019.06.26.
소 재 지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로 250 (아산면) 선운사
시 대 고려 말~조선 초
소유자(소유단체) 선운사
관리자(관리단체) 선운사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하는 보살로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민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로 묘사된다. 하지만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상보살좌상은 머리에 두건을 썼다. 이런 모습은 대체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유행하였는데, 앉아 있는 지장보살을 돌로 조각한 이 보살상도 이때 조성한 것이다.
이 지장보살좌상은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원하는 것을 이뤄준다는 여의주를 들었으며, 왼손은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불교 그림에서 흔히 보이는 이런 모습을 조각상으로 정확하게 구현한 까닭에 당시 지장보살 신앙과 형태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불상을 모신 받침대인 대좌(臺座)는 상대, 중대, 하대를 완전하게 갖추었는데, 지장보살상과 함께 만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지장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와 띠로 묶어 주름잡은 섬세한 두건의 표현 등이 조형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여의주를 든 두건 지장의 정확한 도상을 구현했다. 이 시기에 금동 또는 나무로 만든 지장보살상이 여럿 전하지만 돌로 만들어져 온전하게 전하는 지장보살은 거의 없어 당시 불교조각 연구 자료로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두건 지장보살은 고창 선운사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지장 신앙을 잘 전해 주고, 조형적으로 우수하며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의 모습을 잘 구현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국가유산 설명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고려 말~조선 초에 유행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좌상으로, 특히 불교회화에서 많이 그려진 도상이다. 온화한 표정과 불룩한 입술, 양쪽에서 드리워져서 여의두(如意頭) 형태로 마무리 진 띠 장식, 둥근 보주(寶珠)를 든 모습, 그리고 가슴에 들려진 띠 매듭 등은 고려 말기 보살상 양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지장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와 띠로 묶어 주름잡은 섬세한 두건의 표현 등이 조형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보주를 든 두건 지장의 정확한 도상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여말 선초의 지장 신앙 및 지장도상 연구에 귀중한 사례이다. 이 시기 금동과 목조로 제작된 지장보살상은 몇 점이 전하고 있으나, 석조로 제작된 지장보살 중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한 사례는 참당암 지장보살좌상이 거의 유일하다.
대좌의 경우 보살상과 함께 조성되었는 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상․중․하대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고 가늘고 긴 형태, 여의두문(如意頭文)이 새겨진 안상(眼象) 등에서 고려 중기의 시대적 특징이 뚜렷하므로 함께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할 가치가 있다.
선운사 만세루(禪雲寺 萬歲樓)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위치한 선운사의 만세루는 정면 9칸 측면 2칸으로, 주심포 맞배지붕 형식이다.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선운사로 250]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065호 (2020년6월1일 보물 지정)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중앙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천연기념물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高敞 禪雲寺 동백나무 숲) : 천연기념물 제184호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 : 천연기념물 제354호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선운사석씨원류(禪雲寺 釋氏源流)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호
선운사영산전목조삼존불상(禪雲寺靈山殿木造三尊佛像)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
선운사육층석탑(禪雲寺六層石塔)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호
선운사범종(禪雲寺梵鐘)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1호
선운사약사여래불상(禪雲寺藥師如來佛像)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선운사만세루(禪雲寺萬歲樓)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선운사백파율사비(禪雲寺 白坡律師碑)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2호
선운사사적기(禪雲寺 事蹟記) : 전북특별자치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55호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고창 선운사 도솔암 나한전(高敞 禪雲寺 兜率庵 羅漢殿)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선운사도솔암내원궁(禪雲寺兜率庵內院宮) :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템플스테이
선운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고창 선운사
3천여 승려와 89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대가람
고창하면 생각나는 곳이 선운산일 것이다.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떠올리라면 대다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테지만 나는 상사화를 떠올린다. 9월경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 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꽃이 상사화다. 잎이 지고 난 다음에 피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꽃은 영원히 잎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상사화라고 부른다.
또 하나 들라 하면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 복분자는 딸기의 일종으로 ‘고무때왈’이라고도 불리는 검은 딸기인데 그 술을 마시면 요강 단지가 뒤집어질 정도로 오줌발이 세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은 딸기가 뒤집어진 요강 단지와 흡사해 복분자라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운산 입구에서 하룻밤을 머물 때 복분자술과 함께 지새우기가 일쑤다. 풍천장어 역시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먹지 않고 가면 서운한 필수 음식이 되었다.
또한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선운산곡(禪雲山曲)」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진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에 나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선운산곡」이다. 오늘날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 있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의 창건 설화는 이렇다.
죽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내려 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흘러가곤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나갔더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안에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 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하게 하리라’라고 쓰인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백 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 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다.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報恩鹽)이라는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광복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 있는 9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광해군 6년(1614) 원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의 네 개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열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 있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선운산(禪雲山)
요약 : 선운산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본래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 선운산이라 널리 불리게 되었다. 동쪽의 구황봉 산줄기와 서쪽의 선운산 산줄기 사이에 선운천이 북동쪽 방향으로 흐르고(선운 계곡), 주진천(인천강)으로 합류하여, 북쪽의 줄포만(곰소만)으로 유입된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암석산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다.
목차
개설
자연환경
현황
개설
선운산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경위도는 동경 126° 35′, 북위 35° 30′이며, 해발고도는 336m이다. 1979년 12월에 이 일대 43.7㎢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으며, 1984년에는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북쪽의 부안군 변산반도와 함께 우리나라 백악기-신생대 화산암류 중 화산체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지질학적, 학술적 가치를 평가받아 2017년 9월 국내에서 10번째 국가 지질 공원(전북 서해안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202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지질 공원으로 인증받았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암석산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다.
본래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 선운산이라 널리 불리게 되었다.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리킨다. 즉, 선운산이나 도솔산 모두 불도를 닦는 산, 불교와 관련된 산 이름이다.
자연환경
선운산은 아산면과 심원면의 경계를 따라 북쪽에서부터 경수산(444m), 선운산(336m), 개이빨산(345m), 천황봉(329m), 천마봉(284m), 배맨바위(315m), 청룡산(314m) 등 남북으로 이어진 산줄기 상에 위치한다. 선운산의 동쪽 아래에는 선운사(해발고도 40m)가 위치하며, 동쪽에는 남북 방향으로 노적봉(253m), 구황봉(298m), 인경봉(263m), 비학산(308m)이 연결되고 있다. 동쪽의 구황봉 산줄기와 서쪽의 선운산 산줄기 사이에 선운천이 북동쪽 방향으로 흐르고(선운 계곡), 상류에 도솔계곡과 도솔저수지가 있다. 선운천은 주진천(인천강)으로 합류하여, 북쪽의 줄포만(곰소만)으로 유입된다.
선운산 지역은 후기 백악기에 화산 활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선운산 화산암의 원형은 최대 직경이 약 13km에 달한다. 이 지역은 백악기 화산 활동의 과정과 그 전후에 나타난 다양한 화산 분출 작용과 더불어 퇴적 작용에 관한 정보를 잘 볼 수 있는 백악기 화산암체로 화산체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지질명소로 지정된 곳은 선운산 남쪽에 위치하는 천마봉, 도솔암 마애봉, 진흥굴이다.
식물 자원으로는 196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과 199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창 삼인리 송악(두릅나무 송楤, 흰소 악㹊) 등이 있다.
현황
선운산의 동쪽 계곡에 위치하는 선운사는 조계종 24교구의 본사로 577년(백제 위덕왕)에 검단선사가 창건하고, 남서쪽에 위치하는 참당암(懺堂庵)은 진흥왕의 왕사인 의운(義雲) 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선운 계곡에는 도솔암, 석상암, 동운암, 참당암이 있는데, 옛날에는 89개의 암자가 골짜기마다 있었다고 한다. 선운사에는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고창 선운사 대웅전 · 고창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 좌상 ·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 지장보살 좌상과 1984년에 보물로 지정된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1994년 보물로 지정된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 좌상 등이 있고, 1971년에 지정된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선운사 석씨원류 경판 등을 비롯한 많은 국가유산이 있다.
그 외에 도솔암 마애불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영산전 목조 삼존불상, 육층석탑, 범종, 약사여래불상, 만세루, 백파율사비, 참당암 동종, 선운사 사적기 등이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백파율사비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도솔 계곡 방향으로는 장사송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서쪽 1㎞ 지점에 위치하는 참당암, 개울 건너 산 중턱에 이 산에 침입하는 마귀를 방어하는 신장 역할을 하는 봉두암(일명 투구봉)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위 산등성이에 돌아앉은 바위는 도솔천에 들어오는 마귀를 방어하는 사자암이고, 도솔암 우측으로 층층의 바위 계단을 오르면 절벽 위에 도솔천 내원궁 즉 상도솔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 암벽을 오르면 말 발자국이 파여 있어 이를 진흥왕의 말 발자국으로 전하며, 만월대와 선학암이 있다. 그리고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도솔암 마애불, 용문굴, 낙조대, 천마봉이 있다.
또한 선운산에는 풍천장어, 작설차, 복분자술, 동백기름 등의 특산물과 동백나무와 상사화가 유명하다. 검단대사가 도둑들을 모아 놓고 천일염 제조법을 가르쳤는데, 그에 대한 보은염(報恩鹽) 공양의 관습이 선운사에 전해 내려 온다. 풍천장어는 주진천(舟津川)이 서해에 합류하는 심원면 월산리 부근에서 많이 잡히며 양식도 하고 있다.
교통편은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산 IC - 서쪽으로 22번 국도 – 선운사 터널 – 삼인교차로 – 선운산 주차장으로 올 수 있다. 고창읍에서는 15번 지방도 – 고창 고인돌 공원 - 아산면 – 아산교차로 – 734번 지방도 – 풍천터널 – 선운산 주차장으로 올 수 있다. 그리고 선운산의 등반코스로는 선운사 – 석상암 – 삼거리 – 선운산(336m) – 삼거리 – 참당암 – 선운사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다.]
17:00~21:10 “신사산악회” 버스로 선운사를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으로 귀경 [4시간 10분, 262.3km]
공주시 무령왕릉 지도
논산시 관촉사 지도
익산 미륵사지 지도
고창 고인돌 박물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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