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누구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홍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1989)-
해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인 기형도를 직접 본 것은 아마 1987년이던가, 중앙일보 시조백일장에 참여하여 차하로 상을 받았던 때였다. 중앙일보 관계자들이 앞 줄에 있었는데, 나는 첫눈에 그가 198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당한 기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단지 신문에 쓰는 방송평을 읽고 있었던 때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금 놀랬다. 잠깐 남부 장애인 복지관에서 문학 모임을 이끌 때 이상한 상황에서 그를 다시 접했다. 나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 서울여대에 다니는 그 여자가 어느 날 나를 떠나더니 뇌성마비인 다른 남자와 팔짱끼고 가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때, 그녀는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을 들고 있었다. 그 참담함, 처참함, 배신의 처참함과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묘한 느낌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제목이 겹쳐 마음 속 깊이 울었다.
그녀는 자기 앞에서 웃음 웃는 밝은 나의 얼굴을 좋아하지 않았고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워하는 한 마리 바람둥이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 당시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라는 소설이 화제가 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소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어두운 내면의 자신의 실체를 투영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나는 왜 그때 그런 그녀의 심리를 읽지 못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시는 시대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시대가 만든 개인의 어두운 내면을 표현했다고 보고 싶다. 시대가 어두웠기 때문에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얼굴이 밝지 못했고 그래서 <시운동>의 순수시조차 어두운 기운이 넘쳐 흘렀다.
시에서 그가 누구인지 굳이 알 필요는 없다. 화자의 심리 상태는 혼돈과 공포에 휩싸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낯설다. 뭔가 기자로서 말해야 하는데 입을 막는 검은 잎이 두려울 뿐이다. 그렇다면 잎은 기자라는 생업이 아닐까.
그것을 장례식에 비유하고 어떤 인물을 떠올리며 비유하며 쓴 것이다.
입과 잎의 발음이 비슷한 것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잎으로 입을 막는다. 잘 찾아낸 묘한 느낌의 단어이다. 글쓰는 일은 같지만 시와 기사는 다른 글이다. 이런 것은 생각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발음은 비슷하지만 입을 확실히 막을 수 있는 자연물. 숨까지 막을 수 있는 퇴색된 검은 잎, 잎, 잎.
기형도는 이 시를 씀으로써 마음 속에 도사린 나쁜 기운, 음울한 생각, 허무와 절망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카타르시스의 형식으로 이렇게 표출해야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김율도/율도국 문예창작원
[작가소개]
기형도(1960~1989) : 시인
1960. 2.16(음력)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출생 3남 4녀중 막내로 당시 부친은 황해도에서 피난 온 후 교사를 거쳐 공무원으로 재직함. 서해안 간척사업에 실패한 부친이 유랑 후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 정착하여, 이사하게 됨.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 수해 이재민이 정착촌을 이루었던 소하리는 아직까지 도시 배후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198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안개"의 배경이 된다. 시흥국민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1979)하여 정치외교학과를 졸업(1985)함.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함. 1989년 3월 7일 새벽(03:30경), 가을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 2가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됨. 사인은 뇌졸중.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대학 입학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한 이후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영하의 바람]이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 [식목제]가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됨.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 시작에 몰두 함. 대부분의 초기작이 이 시기에 씌어짐. 전역, 복학후 [겨울판화] [포도밭묘지] [폭풍의 언덕]등 다수의 작품을 쓰며,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함.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됨. 이후 문예지에 [전문가][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늙은 사람][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백야][밤눈][오래된 서적][어느 푸른 저녁] 등의 시를 발표. 중앙일보에 근무하며 [위함한 가계 1969][조치원][집시의 시집][바람은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숲으로 된 성벽]등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문인 및 출판관련 인사들과 활발히 교유함. <시운동>동인.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함)이 발간되었고 유작으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과 시 [입속의 검은 잎], [그날], [홀린 사람]이 발표됨.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일면 초현실적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 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연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콤마에 의한 분리,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 시어 구성과 문체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 있는 동인이며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 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 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첫댓글 입속의 검은 잎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감사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입니다. 비바람이
제법 심합니다. 안전하게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