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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내면을 주님으로 가득 채울 때!
물때가 좋을 때면 근처 수로로 밤낚시를 나갑니다. 낮에는 잔챙이들이 활개를 치지만, 희한하게도 밤이 되면 씨알 좋은 녀석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하지요. 밤바다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풍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일 때도 수두룩합니다. 미끼를 싱싱한 것으로 갈아도 끼워보고, 수심도 바꿔보고, 자리도 옮겨보고, 움직임도 줘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거듭 반복된 헛그물질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괜히 말 걸었다가는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 말씀을 들은 시몬은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참으로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포크레인 앞에 삽질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의 표현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결과는? 인생 한방이라고, 초대박이 터졌습니다. 그야말로 긴 연장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그물질에 오랜 실패가 만회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 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전문직 어부였던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씀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부도 아닌 예수님, 고기잡이에는 전혀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분야만큼은 프로인 시몬에게 전혀 설득력 없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라고 권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기존의 사고방식, 개인적인 야욕,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과도한 욕심, 사사로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라는 권고이겠지요. 예수님이란 너무나 큰 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모든 것을 다 바꾸란 말씀이겠지요.
그릇은 무엇이 담기냐에 따라 그 그릇의 품위까지 달라집니다. 아무리 멋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애완견 사료를 담아놓으면 개밥그릇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투박한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보물이 담기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 내면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값진 존재가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복음: 루카 5,1-1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는 짐승은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굽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면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멕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 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 사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카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수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11).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 미사에도 또 청소년 미사에도 많은 아이가 나옵니다.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큰 희망이고 또 큰 기쁨이지만, 50대 중반을 넘어선 제가 아이들과 함께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세대 차이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 나면 힘이 쫙 빠집니다. 함께하는 젊은 신부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부의 부족으로 인해 우리 본당에 보좌 신부가 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친한 선배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 즉 본당에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 혼자 아이들을 담당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우울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는데, 선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열심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둘 수 있었습니다. 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힘이 되는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힘이 빠지는 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로 더 안 되는 길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군중은 주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그물만 씻고 있을 뿐입니다.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어부 일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단한 일과를 마쳤는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도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는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적 권위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말씀에도 그렇게 집중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에 커다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힘이 되는 이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의 말씀을 계속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일에만 집중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의 이웃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청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랄프 왈드 에머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 낚는 어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그물에
사로잡히도록 이끄는 사람을 뜻합니다.
내가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냐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람을 낚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있어야
그 사람에게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낚아야 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엉뚱한 것에 사로잡히도록 안내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평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헛물을 캔 거라 볼 수 있는데,
우리 역시도 엉뚱한 데 사로잡혀 있다면
헛물을 캘 수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09.연중 제5주일."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 4)
우리를
받아주시는
깊은 마음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깊은 데의
우리 마음속을
바꾸어 줍니다.
마음을 찢고
만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데서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복음의
마음을 건네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풍랑 속에서도
사람 낚는
어부들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매순간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쁨과 행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은총을 따르고
맞아들이는
어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는
본마음의
주일 되십시오.
진실한
마음을 바치는
거기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데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2ㄱ.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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