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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하느님 현존에 깨어있기. 등 )
*** 11:10 반영억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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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 하느님 현존에 깨어있기 -
고통을 이해하려
지나치게 애쓰지 말고
고통 중에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하느님의 진정한 종은
항상 기도하고,
-무릎 꿇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스러운 현존에 마음을 모읍니다.
하느님 현존을 아쉬워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하느님,
때때로 저는
왜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느낄지라도
관계없이 주님을 신뢰하고
단순히 내적으로
당신의 현존에 깨어있고 싶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과
싸우지 않게 하소서.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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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17 04:49
연중 11주 월요일-2020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문제적인 말씀들입니다.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악인과 맞서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는 뜻이거나
복종까지는 아니고 타협하라는 뜻이라면 아무리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옳은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가 따를 수 없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복종이나 타협의 뜻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악인이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죄인이나
사회정의를 거스르고 사회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주님은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뜻은 맞대응하거나 말려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가 연예인들이 악플로 인해 불행해지거나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왜 그들의 악플을 보느냐,
보더라도 대응치 않으면 되는데 왜 대응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악플을 볼 때부터 이미 그 악인들의 악에 말려드는 것이고,
한번 대응하기 시작하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얽히게 되지요.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은 것이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쓰레기 더미나 똥 더미에 발을 디딜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도 악플에 말려드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원해서겠습니까?
원치 않는데도 말려드는 거지요.
남이 상처를 줘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 좋으면 받고 싫으면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인데
그런데도 받는 것은, 받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지요.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싶지만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해 받듯이
상처나 모욕 같은 것들도 받고 싶지 않지만 약하기 때문에 받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약하다면 무엇이 약한 것일까요?
심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약한 것이며 그래서
심리적으로 약하면 우울증에,
정신적으로 약하면 정신병에,
영적으로 약하면 마귀 병이 드는 것이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랑이 강하지 못하거나 불완전하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고통에 약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은 또 왜 불완전하고 약합니까?
그것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좋은 것만 좋아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자란 사람은 웬만한 악플에 까딱없습니다.
연예인 같이 인기를 끌고 좋은 얘기만 듣던 사람이 계속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하기에 악플을 보게 되는 것이며 악플에 말려들고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 한 뺨 맞고 다른 뺨까지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오 리뿐 아니라 십 리까지 가 줄 사랑이 있는 사람은 악인이 하는 짓에
말려들지도, 대응하지도, 까딱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지에 도달하면 맞설 악인조차 없게 되겠지요?
내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원수까지 사랑하면 내게는 악인이 아예 없게 되는 거지요.
바라고 요구하는 딱 그만큼이 아니라
바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려는 우리가 되라시는 오늘 주님이십니다.
오늘과 중요한 강론을 다른 데서 하게 되어 있고,
모레는 갑작스럽게 강의를 하게 되어 그 준비로
오늘 강론을 전의 것으로 올렸고 어쩌면 모레도
그렇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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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꼬마 아이와 큰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어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이가 예의 없이 행동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어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요?”
스승이 말했습니다.
“바보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남자가 정색하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스승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렇다. 네 말도 맞다.”
어쩌면 자기를 반대하는 이 남자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진리를 향하는 방법인 바보들과 다투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설득해 봐야 무의미한 논쟁이고 이를 얼른 끝내는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 동의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논쟁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보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당시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것이 가장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더 큰 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니 그보다 큰 사랑으로 다가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넓은 마음으로 적대적인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그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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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본시 단순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자꾸 복잡하게 만들려고 한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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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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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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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월요일(마태5,38-42)
https://cafe.daum.net/rara63/bmQo/5253
raphael 24.06.18 07:39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 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간 빼고 쓸개 빼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권고 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셔야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2,20).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정말 불이익을 당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복하지 말고 남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십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버릇없는 행동에는 보복이 아니라 모범으로 맞서야 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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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악 프로그램 중에 ‘가요 톱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에 순위를 정하는 겁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매주 순위가 바뀌곤 합니다. 5주 연속 1등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 순위로 1등이 정해집니다. 20위 권 밖에 있지만 사람들이 점차 좋아할 만한 노래도 정해서 들려줍니다. 순위는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노래도 흐름이 있는지 어떤 때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과 춤이 어우러진 노래가 사랑받았습니다. K Pop이 사랑받으면서 솔로 가수가 아닌, 그룹이 순위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HOT, 동방신기 그리고 방탄 소년단이 있습니다. 걸 그룹에는 SES, 핑클, 소녀시대 그리고 뉴진스가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았던 1991년 가요 톱텐 1위 곡은 이렇습니다.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김지애의 몰래 한 사랑,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이선희의 추억을 책장을 넘기면, 노사연의 만남,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신승훈의 날 울리지 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있습니다. 33년 전의 노래인데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납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슴 벅찬 이야기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 중에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합니다. 홍수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벌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탈출기’가 있습니다. 앞에는 깊은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홍해가 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린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정말 기적처럼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나왔습니다. ‘5병 2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야기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원죄는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된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카인의 죄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갔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죽였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아합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을 억울하게 누명 씌어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억울한 죽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슴 벅찬 이야기는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보여줍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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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인지 알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못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그렇습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대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만약 그대가 오른뺨을 맞으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다른 뺨을 대줄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난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화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뺨을 대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제게는 말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천 걸음을 함께 가자고 강요합니다. 부탁이 아니라 강요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탁해도 들어줄까 말까, 하는데 강요합니다. 만약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무조건 안 할 것 같습니다. 천 걸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태도가 불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도 듭니다.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 아닐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런 어려운 길 끝에는 하늘나라라는 낙원의 문을 열고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렵습니다. 사랑도 어렵고 삶도 어렵고, 신앙의 길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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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요리
코스요리 좋아하실까요?
저는 못 먹습니다. 코스요리
왜요?
없어서요…. 하하하^^
코스요리는 말 그대로 단계별로 나오는 식사를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식, 메일, 후식으로 나오는 식사를 코스요리라고 합니다.
우리 삶도 코스요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학자는 삶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눕니다.
열정기, 권태기, 성숙기.
그대는 어디에 있나요? 열정기? 혹은 권태기?
어디에 있든 걱정하지 마세요. 코스요리는 후식이 나와야 끝나듯이
우리는 모두 성숙기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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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진리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폭력을 포기하라
“악에 대한 승리의 비결은 주님과의 일치뿐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경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다산>
“남용이 ‘백규’ 구절을 날마다 세 번씩 외우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논어>
저절로 참삶이 아니라 한결같은 노력으로 이뤄지는 참삶임을 깨닫습니다. 험하고 거친 인생 광야 여정, 성인이 되기 보다는 악마가, 괴물이, 폐인이 될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참 중요한 일이 참사람이 되는 일이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요, 이를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훈련에 온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피정온 자매가 밤에 보내온 메시지와 이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울증으로 방황하다 계단에서 넘어져 1년반 정도 의식잃고 병원생활하다 6월8일 별세한 친구입니다. 구원은총 청하며 피정기간동안 연미사봉헌합니다.”
“예, 그렇게 연미사봉헌합니다. 너무 불쌍하네요.”
불쌍하게 살다가 불쌍하게 세상 떠나는 이들이 곳곳에 너무 많습니다. 유비무환이 답입니다.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로 영혼을 튼튼히 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끝으로 성모님께 바친 전구입니다.
“당신 안에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도록 만드시고 환영하신 분, 동정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 역시 복음의 너그럽고 충실한 씨뿌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사랑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5 대당명제인 “폭력을 포기하라.”입니다. 200주년 주석성경은 “보복하지 말라.”입니다.
보복은 물론 일체의 폭력을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격성, 잔인성, 폭력성, 배타성을 꿰뚫어 통찰한 예수님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괴물을 순하게 길들이는 일 역시 평생 수행의 목표가 됩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군더더기 설명이 불요할 정도로 자명하게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완전히 압도하며 능가하는 의로움의 실체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1.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2.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3.또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5.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우리 내면의 상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괴물을 순치할 수 있는 평생과제입니다. 결코 무저항주의자로, 겁보로 비겁한 자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 사랑의 저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일이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악의 박멸이 아니라 아예 악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예방이 제일입니다. 이렇게 인간 탐욕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악은 제어할 수 없습니다. 건들일수록 강해지는 악이요 결코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악에 대한 처방은 선이 아니라 성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삶뿐입니다.
무지의 악이요 악의 신비입니다. 발본색원할 수 없는 악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성공한 적도 없고, 피흘리는 혁명이 성공한 적도 없습니다. 세계나 국내현실을 보세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악의 세력이 약화되기는커녕 날로 강해지는 느낌입니다. 교황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요청입니다.
“평화를 위한,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단, 미암마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자.”
무엇보다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전쟁의 참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 뿐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방법이요 악을 무장해제 시켜 무력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내적힘의 반영이요 존엄성의 발휘입니다. 무력으로 악마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힘, 내적힘으로 악마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래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날로 깊어져가는 일치의 삶이 우선입니다. 폭력이, 보복이 일순간 통쾌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선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폭력이요 보복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듯 하나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악의 괴물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진리의 실천으로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거룩하게 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날로 깊어지는 일치만이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는 장면을 보세요.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농간으로 유약하고 탐욕만 가득한 아합은 중심을 잃고 무죄한 나봇을 합법을 가장하여 감쪽같이 죽이고 나봇의 땅을 제땅으로 만듭니다. 어찌 이런 천인공노할 악행을 태연히 감행할 수 있는 이제벨인지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또 현재의 세상에서도 반복되는 악의 현실을 체험합니다. 잔인무도하고 사악한 이들이 여전히 활개치는 현실입니다.
악과의 영적전쟁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합왕과 왕의 아내 악녀 이제벨에 의한 나봇의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은 다윗에 의해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인류역사상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어나간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보상될 수 있을런지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악의 화신같은 아합과 이제엘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같은 이름이요, 회개와 더불어 영적 분발을 촉구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 모두 악과의 전쟁에서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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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스스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아무도 나를
물들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스미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군림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빼앗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에게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짓밟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떠받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없이 하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죽이지 못하리니
나 스스로 그를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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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다른 뺨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때릴 만큼 거만한 것은 본성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심술궂은 사람이 물어도 ‘자기가 지닌 믿음에 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1베드 3,15 참조) 사람은 맞서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영적 의미는 이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는(합리적인 교의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믿는 이들은 올바른 교의도 알려 줄 것입니다. 믿음의 논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응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비난을 그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거룩한 것들 안에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우리는 영혼이 이렇게 한다거나 저렇게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내가 이렇게 한다거나 내가 저것을 깨닫는다고 말해야 옳다. 왜냐하면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가 보기에, 육체와 영혼은 하나일 뿐만 아니라.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일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유비로 활용하여, 두 영이 훨씬 더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우리는 본 설교와 설교 6에서 영혼이 얼마나 고귀하고 신적인지를 알았다. 하지만 육체도 고귀하다. 엑카르트는 육적인 것은 모두 고귀하다고 선언한다. 따지고 보면, 그것들도 존재의 은총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전쟁 당사자 사이의 관계로 보지 않고, 친구 관계로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은 육체를 사랑한다,"
이와 같이 영혼과 육체가 서로 의존하는 태도는 아퀴나스가 말한 영혼과 육체의 동체셜과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이 전제로 깔았던 갈등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엑카르트와 아퀴나스에 의하면, 살아 있는 몸은 하나의 실체적인 일치를 이룬다고 한다. 엑카르트는 오감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는 오감을 일컬어 이 세계의 “출입구”라고 부른다. 오감은 영혼을 이롭게 한다.(187)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르 14,32-42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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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5,39)
참으로 우리가 문학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로 오늘 복음에 관한 일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딸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내 잔혹하게 살해하는 영화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제가 당사자라면, 아 주님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자식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를 가한 자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내재 된 복수 심리를 고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딸의 유괴범을 살해한 아버지를 선뜻 판단할 수 없게 하고, 일정 부분 동조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동시대의 일반적 형태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제한된 복수마저 예수님은 폐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원한도 보복도 없는 새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원수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5,38~42) 이 가르침의 방점은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시며, 새로운 삶의 자세를 제시합니다. 손바닥을 마주친다면 그와 더 나을 게 무엇이냐는 말씀이겠고, 또 그렇게 악인에게 악으로 맞선다고 한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신중하라, 는 말씀 같습니다. 물론 주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원수와 같았던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23,34)라고 기도하시며, 당신 말씀하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뜻은 비겁하게 도망치라는 의미보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폭력으로 맞서 저항하지 말고 보복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2코6,5.7)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또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12,19) 또한 구약의 잠언에 보면 “ ‘내가 악을 되갚겠다.’ 하지 말고 주님께 바라라. 그분께서 너를 도와주신다.”(20,2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25,21-22) 결국 우리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그리고 사실 복수는 더 커다란 복수를 가져오기에, 악인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 모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게 인간의 일반적인 심정이고 정서이지만 그런 방법은 참된 해결이 아닌 악순환으로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에 공정하신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고 신앙인의 경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정의는 승리합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보복과 복수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를 기다리면서 정의의 하느님께 복수를 맡겨두고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시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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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독서인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아합은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모략을 세우거나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이제벨과는 달리 하느님과 율법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였기에, 거짓 증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에 매우 충실한 사람으로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불의와 폭력에 내던져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감았습니다.
나봇이 무고하게 죽었지만, 아합은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겉으로는 모른 척하였지만 그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무죄한 의인이 희생한 대가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욕망은 아합에게 나봇의 죽음을 가리고, 포도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아합과 닮았습니다.
이제벨처럼 직접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 악행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때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빈부 격차를 가속화하며 가난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악법과 불의한 구조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 법으로 어떤 이득을 얻게 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욕심은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지금 곧바로 얻게 될 이익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어려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희생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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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온유와 겸손으로 사랑을 / 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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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ㅣNo.173376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포기하여라.’라면서 이르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는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까지 가주어라. 달려는 자에게는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그분께서는 한나스의 심문 때 경비병에게 ‘내가 감히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라며 뺨을 여러 대 맞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맞기만 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이르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증거를 어디 대어봐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이렇게 쳐 되느냐?” 이렇게 예수님은 불의에 타협은커녕 ‘침묵’하지 않으셨다. 당당하게 맞섰다.
상대방의 양 뺨을 한손으로 연속으로 치려면 손바닥과 손등을 차례로 사용해야 할 게다. 손등으로 상대를 때린다는 건 심한 모욕과 멸시까지 안긴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 시대의 근동에서도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단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대라신다. 심지어 남의 ‘속옷’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짓이지만, 그러한 요구에도 결코 맞서지 말고 ‘겉옷마저 내주라신다. 겉옷은 밤에 이불로도 쓰였다. 그래서 율법은 그것을 담보로 잡을 경우에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한다.
사실 왼뺨마저 돌려 대라는 것은 무조건 참고 또 참아라가 게 아닐 것이다. 물론 덮어놓고 굴복하라는 것도. 불의에 무조건 당하지 말고, 폭력에 대항하되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분께서는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저 얻어맞아라.”라가 아닌, 오히려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신다. 계산적으로는 상당한 손해이나 극도의 사랑의 공세이리라. 나머지 뺨마저 돌려대, 뺨을 쳐댄 그 잘못을 분명히 깨닫게 하라는 것일 게다. 이는 악의를 품는 이에게 저항하지를 말라신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더라도 따지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극복하라는 것일 게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 신앙인은 매사를 폭력으로 맞대응해 해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건, 그분처럼 다른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삶을 사는 거다. 그분께서는 온갖 모욕과 멸시를 끝내 참으시고 당신의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실제로 많은 착한 이가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라며 자신의 화를 털어놓는다. 이것은 삶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나아가 불공평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 삶에는 억울함과 불공평이 쾌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억울함을 당할 수도. 때로는 모함 받고 이용도 당한다. 오해 땜에 멍들었던 게 한두 번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였나?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나? 아니면 반항하였나? 결과야 어떻든, 상처 남는 건 매한가지니 이제는 받아들이자. 착함은 정의가 배제된 게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억울함의 상처가 십자가라는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생각하면 가슴 떨리고 증오가 솟더라도 끌어안자. 그러면 은총이 함께하리라. 누군가가 오른뺨 치더라도 눈 흘길지언정 꾹 참자. 실제로 예수님도 불의에 항거하시면서도 끝내 참으시는 용기를 보이셨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그분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택하라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의 이 아픔이 더 이상의 고통이 되지 않으려면 온유와 겸손뿐일 게다. 악에 굴복은커녕, 사랑으로 악을 끌어안는 하루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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