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71]추수秋收 단상/나락 베기-가을 유감
친구가 들판의 네 다랭이(3마지기 600평 1필지와 같은 말) 나락을 단숨에 베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한 다랭이 베는데 잘하면 30-40분. ‘콤바인 5’ 참 기가 막히게 좋은 농기계다. 들판의 나락을 사람의 손으로 벤다는 것은 이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됐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추석연휴를 전후로 우리 들판은 사라진 줄 알았던 멸구떼의 습격으로 초토화가 됐다. 직접 보지는 못하셨으나, 이 땅의 일등 농사꾼 아버지의 구십 평생에도 이런 참담한 풍경은 처음이었을 터. 임실하고도 오수면이 가장 극심했기에 농림수산부장관도 이곳을 찾았으리라. 땅이 꺼져라 한숨짓는 농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9월중순까지 더위는 기승을 부려 추석을 ‘반소매 명절’로 만들었다. 열대야가 한 달을 훌쩍 넘은 이상기후 탓이 가장 크겠으나 ‘민족의 식량’ 쌀을 푸대접하는 농정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음날 내 손에는 ‘수매정산서’ 2장만이 남았다. 멸구 피해가 가장 심한 2필지(안평벼)의 나락이 2등급 2471.8kg. 정부는 가축 사료로 쓴다던가, 피해 벼를 모두 받아준다고 해 그나마 다행이다. 돈으로 환산된다해도 농약과 비료값에 준할 듯하다. 나락 베준 삯이나 나올까. 조금 피해가 덜한 1필지(신동진벼)는 1328,7kg. 1필지의 나락은 건조시켜 곧 쌀방아를 찧어 식구들 식량으로 할 생각이다. 작년엔 방아 삯까지 해 20kg 푸대가 36개 나왔는데, 올해는 30개도 넘지 못할 듯. 이리저리 노놔주고나면 남는 게 몇 푸대 안남지만, 1년 농사 최종 정산은 끝나게 된다. 휴우-. 멸구들의 습격만 없었다면 풍년이었을 터이나, 풍년을 꺼리는 듯 정부는 쌀이 남아돈다며 수확량이 많은 신동진벼보다 안평벼 심기를 권했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후배가 카톡으로 ‘멸구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보내와 씁쓸하게 웃었다.
<멸구> 1.(명사) 멸굿과의 곤충을 통틀어 이름. 2.(명사) 멸굿과의 곤충. 몸의 길이는 2mm정도, 색깔은 녹색, 배와 다리는 누런 백색. 20도 이하가 되면 농약과 상관없이 죽음. 3.滅口.‘입을 없애어 말이 나지 않게 한다’는 뜻. 비밀히 한 일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을 가두거나 빼돌리고 죽임. 4.蠛口. 입에 피를 칠한다는 뜻. 남을 해치려고 헐뜯어 말함. 滅口나 蠛口가 이렇게 무서운 말임을 처음 알았다. ‘입틀막’은 차라리 순진한 단어. 멸구는 기피단어이니 친구親口(경의와 사랑을 나타내려고 입을 맞추는 행동)와 함구緘口(입을 닫고 어떤 말이든 하지 않음)가 좋은 말인 것을. 어이상실의 재난을 당해 하는 애꿎은 ‘멸구타령’임을 해량하시리라 믿는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생들을 추수한 논으로 몰아 이삭을 줍게도 했거늘, 어쩌다 쌀이 천덕꾸러기가 된 듯할까. 누년 동안 쌀을 푸대접한 농정의 업보가 아닐까. 참 알지 못할 일이다. 이 나이 먹도록 알지 못하는 일이 왜 이렇게 자꾸 많아지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태국의 여성노동자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메뚜기를 잡아 빈 통에 넣는다. 모를 심을 때에는 개구리를 잡느라 바쁘더니. 그들은 개구리를 우리처럼 뒷다리만 먹는 게 아니라, 통째로 요리한다 들었다.
이제 들녘은 허허롭다. 벼를 다 베면 논도랑을 뒤지며 미꾸라지를 잡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미꾸라지를 담은 다라이에 굵은 소금을 뿌려 거품을 게워내게 했다. 그때 학독(확)에 갈아 끓여먹던 추어탕의 맛을 남원 어디어디 맛집에 비할 건가. 그리운 추억이 된지 오래다. 이맘때쯤이면 고추잠자리가 천지비까리였건만, 올해는 정말 1마리도 보지 못하게 하늘이 조용하다. 가왕 조용필의 노래가 무색하게, 앙증맞은 고추잠자리들이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제비도 거의 보지 못했고, 나비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게 다 인간이 함부로 훼손한 천지만물, 자연계의 부작용들이 아닐까.
새파란 가을하늘과 하얀 구름만 아무래도 변함이 없다. 이렇게 농부의 시름을 안고 가을이 깊어간다. 곧 겨울도 오리라. 나는 차라리 ‘가을소년’이 되기로 작정하고, 연일 뒷산의 밤나무 밑을 뒤졌다. 막 떨어진 밤톨과 밤송이들이 즐비하다. 동행한 친구는 이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줍고 까기에 바빴다. 덕분에 밤 한 말은 건졌다. 5일장에서 밤 1kg에 8000원이던데, 팔 수는 없을까. 밤장수나 해볼거나. 소금물로 두어 시간 침전시킨 후 냉장실에 넣어놓고, 오고가는 지인들에게(실상 오고가는 지인은 거의 없는 한적한 농촌이다) 선물이랍시고 노놔주기(직접 배달 아니면 택배)에 바빴다. 나는 영락없이 철없는 60대 가을소년이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