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흐르다/장미숙
하늘길, 사람길이 열린다. 나무길, 꽃길도 환하다. 바람은 휘파람을 날리며 마을을 어슬렁거리고 길은 둥그렇게 이어진다. 허공과 바닥이 경계를 넘나들고 나무는 팔을 벌려 길들을 호위한다. 의식이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길에 서자 막혔던 숨이 터진다. 적당한 간격을 지키며 피어난 꽃, 정답고 정갈한 초가와 담장 너머로 마당이 널따랗다. 바지랑대 하나 비스듬히 허공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조는 사이 빨래는 춤사위가 한창이다.
하늘 들판에는 나무의 이력이 선명하다. 잎을 다 떨궈버린 채 해탈한 듯 무심한가 하면 계절에 상관없이 푸른 기운을 간직한 나무는 청정하면서도 생경하다. 사철 따뜻한 피를 간직한 상록수의 너른 품이 온화하다. 가벼움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나무는 하늘에 수묵화 한 점 그려놓았다. 긴 시간을 달려왔지만, 아직도 도를 닦고 있는 모양이다. 이파리 서너 개가 고요한 듯 생기롭게 하늘의 발치에서 나풀거린다.
길은 사방으로 무한하다. 여럿이 어울릴 수 있는, 서넛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폭을 맞출 수 있는, 두 사람이 정담 나누기 좋은, 한사람이 깃들어도 꽉 찰 것 같은 길 앞에 선다. 어느 곳이라도 다시 만날 것처럼 마침표가 없다. 너른 길이 좁다란 길을 품고 좁다란 길이 너른 길로 스며든다.
휘어지고 굽이돌아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길의 가슴에서 집이 태어나고, 집이 자라 길을 키운다. 길의 옆구리를 채운 담에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사색이 피어난다. 길을 생기롭게 하는 건 나무의 그림자다. 살아있는 건 어디든 뿌리를 내린다. 막히지 않고 모든 것과 이어지는 길에 서면 사물 너머의 것들이 보인다.
돌담이 감싸고 있는 흙길을 밟는다. 처음 걸어보는 곳이지만 낯설지 않다. 이미 기억 속에 저장된 많은 길과 겹친다. 모양은 달라도 하나로 연결되어 같은 이미지로 집약된다. 그곳에 섰을 때의 평화나 안온함, 따뜻함이나 포근함, 혹은 감성이 말랑말랑해지는 유연함 같은 것이 앙상블을 이룬다.
그건 각박함이나 삭막함과는 거리가 멀다. 차디찬 도시의 길과는 다른 편안함이다. 어렸을 때의 정서가 고여 있거나 어느 한 시절의 애틋함이 자리한다. 물큰하게 밀려오는 감정이 질펀하게 녹아나 마음길과 연결된다. 그럴 때 전해오는 편안함이 돌담을 옆에 둔 흙길의 정서다.
담 아래 키 작은 꽃들이 아기자기 피어있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풀이 고개를 빼꼼하게 내미는 곳에서는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키 큰 해바라기가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기댄 담이나 게으른 햇볕이 느릿느릿 시간 속을 자맥질하는 흙담을 만나면 쪼그려 앉고 싶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담 아래서 해바라기 하던 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가슴에 메아리친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길을 걷는 것, 평탄대로이든 진창이든 너덜겅이든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을 건너와 서 있는 곳이 현재를 반영한다. 길이 길을 만들며 끝없이 이어지듯 사람의 마음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게 마련이다. 마음길이 서로 연결되고 또 다른 길을 만든다.
환하거나 아름답거나 숨이 트이거나 밝은 길이 있는가 하면 어둡거나 침침하거나 좁거나 막힌 길도 있다. 길이 어디로 향하느냐 또는 누군가로 이어지는가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고 보폭의 길이가 정해진다. 반듯하고 견고하거나 수더분하고 자유 분망한 길, 자주 가고 싶은 길이 있는가 하면 불편하거나 꺼려지는 길도 있다.
언젠가부터 길 하나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자잘한 균열이 생기더니 실금이 가고 빗금이 생겼다. 자갈들이 무시로 튀어 상처를 입혔다. 잡풀이 자라고 황폐함이 감돌았다. 어둠이 찾아들고 점점 좁아지더니 단절이라는 냉담 속에 갇혔다. 햇볕을 받지도 살가운 바람을 키우지도 않아 메말라갔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길 앞에서 주춤하기를 반복했다.
소통의 부재는 길의 끊어짐이다. 오해와 갈등이 쌓이고 미움과 증오만이 잡풀처럼 자라난다. 보살피고 다듬어줘야 하건만 발길이 머물지 않는 길은 거친 흔적만을 남긴다. 끝내는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끊어버릴 수도 없다. 결국, 인연이라는 공식이 아닌 책임과 의무만이 남게 된다. 길이 사라져버린 게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존재했다는 건 지울 수 없다. 형체만 남아있는 길 앞에서 돌아설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게 뒤틀린 인연의 길이다.
길을 반추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발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낯설고 물 서른 곳에 서서 무심히 뭉친 마음을 풀어놓는다면 새로운 공식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기대도 되었다. 친구의 나들이에 계획 없이 따라나선 이유다.
시골의 어느 전통마을 앞에서 길의 흐름을 보았다. 갈래갈래 난 길들이 품고 있는 고즈넉한 풍경, 고택도 초가도 나무도 하늘도 모두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길은 생명과 사물을 조합해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중심이었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서자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동그랗게 이어지며 생명을 담은 길이 환희를 불러왔다. 길은 산과 손을 잡고 하늘에 닿았다. 그 광활한 곳을 향해 나의 좁다란 마음길을 풀었다.
길들이 너울너울 물처럼 흘러간다. 모양도 형체도 없는 마음길이 그토록 무거웠던가. 천근만근의 힘으로 짓누르는 그 무엇이 삶이라면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감정의 경계점을 그어놓고 저울질로 만든 길 앞에서 휘둘린 건 아니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사이 몸속으로 바람이 드나든다.
돌아오는 길, 바람의 무게가 더해졌는데 오히려 홀가분하다. 엉킨 실타래는 시간이 해결해 줄 터, 지레 불안해하는 건 그만두자고 애써 웃음을 날린다. 길을 다시 내는 건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물안개처럼 점점이 번져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