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적 이성이란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가 서구의 계몽적, 문명적 발전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던 개념이다. 서구의 계몽 과정을 이끈 행위와 사유가 목적정향적이고 합리적인 특성을 띠었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면 이성이 점차 도구적인 기능으로 전락하였다는 의미에서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는 서구 계몽 과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한 도구적 이성의 예는 자기보존의 목적 하에서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신화적 인물 "오디세우스"에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주관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된다.
주관적 이성은 서구 전통의 객관적-형이상학적 철학이나 믿음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싹트는데, 그러한 주관적 이성은 마침내 자연을 지배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가 전개한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물화" 과정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을 더욱 폭넓게 전개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이나 인간 상호 관계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 전체로 보편적으로 확장되는데, 요컨대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주관성의 근원적 역사와 자아 정체성이라는 형성 과정이 역사철학적인 포괄적 관점 하에서 파악될 수 있다"(하버마스, 『소통행위이론(Theorie des kommunkativen Handelns)』)는 것이다.
주관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될 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주체의 맹목적인 "자기보존"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계몽 과정에서 자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서 등장하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자연과 마주할 경우 그 자아는 외적 자연을 자신에 종속시키고 생산력을 배가하면서 자신의 주변 세계를 탈주술화 한다. 그러나 탈주술화 과정 중에 주체는 외적 자연뿐만 아니라 내적 자연까지도 지배하고 만다.
흥미로운 점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자신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이성적 주체의 책략을 드러내고 있다(이 점은 『계몽의 변증법』 중 괴물 폴리페모스로부터 탈출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에 잘 드러나 있다). 주체의 자기보존은 주관적이고 도구적인, 자연 지배적인 이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해 주며, 요컨대 "이성이 인간에 의한 인간적 자연과 인간 외적인 자연의 지배도구로 된 이후 - 아주 초기부터 - 진리를 발견하려는 이성의 본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의 비판에 관하여(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최문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모든 저작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이성의 도구화라는 결정적 개념을 아도르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이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기 보존에 기초하여 근거 세우고 있다. 우 리는 이를 이제는 자연과 인관과 자본의 관계, 인간과 인간 및 자본의 관계라는 틀로 그 시각을 확대하여 더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자본이 인간에게 가하는 도구 성에의 타락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본에 의한 인간 이성의 도구화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지구의 유일한 가치로 군림하게 하 는 동인을 제공하고 있는 만큼, 아도르노가 제공하고 있는 기존의 이론적 특을 확대 발전시키면 자본의 위 력이 잉태하고 있는 도구적 이성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이 보일 수도 있겠다. 문병호, '비판과 화해: pp.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