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최대규모의 「히로뽕」밀조단 두목 이황순(46·부산시 민악동산1)의 집은 집 전체가 하나의 「히로뽕」제조공장이었다. 이의 조카 이갑진씨 명의로 등기돼있는 이집은 산허리에 있는 마을의 맨 끝집으로 왼쪽으로는 집이 한채도 없어 외진 곳이었다. 아래로 수영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태창목재 저목장이 있어 저목장에서 항상 악취가 바람에 날려 「히로뽕」제조에서 나는 악취를 숨길 수 있어 밀조공장위치로는 안성마춤이었다.
◆ 국내 최대의 히로뽕 밀매총책인 이황순이 총기를 난사하자 경찰이 집 주위를 포위하고 있다. (1980.3.19)
이같은 외진 집이「히로뽕」범인검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있는 수사당국의 눈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집은 큰길에서 경사15도로 10m쯤 올라간 곳에 철제대문이 있고 이 철제대문에서 다시 10m쯤 올라간 곳에 대문이 있어 2중 대문으로 돼있으며 붉은벽 돌담과 대문위에는 철조망, 그 위로 다시 전선이 가설돼있다. 또 대문양쪽과 옥상에는 「카메라」장치가돼 안방에서 「스위치」만 누르면 바깥동정이 그대로 나타나게 돼있다.
철조망에는 경보장치가 돼있어 접근자가 있으면 비상「벨」이 울리고 집안에는 세마리의 경찰견이 버티고있어 철옹성을 이루고있었다. 더우기 이들 개는『덤벼』『물러나』『들어가』정도의 말을 곧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잘 훈련돼 외부사람은 얼씬도 할 수 없었다.
주범 이의 검거 후 수사진이 밤새 집을 뒤져도 발견되지 않던 비밀공장은 정원석을 가장한 돌 한개를 들추어내면서 발각됐다. 입구는 한사람이 겨우 구부리고 들어갈 정도이나 「시멘트」벽으로 된 6평정도의 공장이 있고 그 속에서 50여점의 제조기구와 원료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같은 비밀 「아지트」가 바깥에는 전혀 눈치를 채이지 앉아 주민들까지도 모두 태창목재 정회장의 별장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이 마을에서 20여년간 살아온 민락동 어촌계장 이수씨(41)도 『사람 드나드는 것을 본적이 없으며 정회장 별장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같은 일은 이와 하수인등이 밤에만 들락거리고 혹시 낮에 출입때는 월부책장수·수도·전기검침원으로 행세해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주범 이는 황해도가 고향으로 충북 모 대학을 중퇴한 폭력단출신. 60년대 후반 부산의 깡패조직 「칠성파」조직원으로 주먹을 휘두르다 70년대 들어 밀수에 가담해 돈을 모으고 72년12월 시계·금괴밀수로 징역 4년, 벌금1천4백33만원을 선고받고 복역중 73년11월13일 폐결핵·심장병등으로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은 전과자.
출소 당시 부산시 당감동87 그의 집으로 주거지를 제한했으나 한달만에 거주지를 옮겨 행방불명돼 경찰이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75년10월 당시 태창목재회장 별장이었던 이 집을 1억원에 매입, 조카이름으로 등기해 이때부터 77년9월까지만도 「히로뽕」70kg(도매1억2천만윈, 소매70억원)을 밀조해 일본과 국내에 팔아왔다.
이의 범행은 76년 일당이던 이모씨(40)가 대검에 고발했지만 찾지 못하고 지난2월 판매조직의 최재도(36)가 검거됨으로써 확인됐으나 이가 자취를 감춰버려 그때부터 수사진은 잠복근무에 들어가 지난19일 외제승용차를 타고 나타난 이를 발견, 대치극을 벌였던 것이다.
잠복 근무조는 지난 13일 이의 집에서 나오는 김병국(37·운전사)을 발견했으나 김이 옆에 장부같은 것을 들고나오며 『수도검침원』이라고 해 그냥 보내기도 했다.
이의 집에선 또 포장마차1개가 발견됐는데 이는 「히로뽕」을 운반하면서 행상을 가장했던 것으로 수사진은 보고 있다.
이는 일당인 김덕근의 주민등륵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김덕근으로 행세하고 운전할때는 김병국의 면허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사용했고 두 김은 분실신고로 주민증과 면허증을 경신해 사용했다.
이는 「히로뽕」중독자로 하루 6차례(1회 0.1mg)주사를 맞고있었다.
◆ 검거 당시 총알 관통상을 당해 입원한 이황순
「히로뽕」밀조범 이황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부산지검특별수사 제2부는 3일 이의 배후인물 전모를 밝혀내고 마산교도소 전보안계장 김영규(43), 보사부 부산지구마약감시반원유병원(41), 이상경(40), 전보사부마약감시반원 오진복씨(41)등 마약감시반원 5명, 서울시경 차모경사(40), 폭력배와 밀거래조직인 이강한씨(40)등 모두 11명을 추가로 수배했다.
검찰은 또 「히로뽕」거래조직책 이정웅(35·부산시부평동 104), 이학수(53·부산시암남동180의13)씨등 2명을 습관성의약품관리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이로써 이의 조직 및 배후인물은 21명으로 늘어났고 그중 7명이 구속됐으며 배후인물로 마약감시반원 6명, 경찰관 2명, 교도관 l명, 폭력배 5명등 모두 14명이 수배됐다.
마산교도소 전보안계장 김씨는 73년10월 이황순이 복역당시 이의 조카 이길웅씨(42)로부터 1백만원을 받고 이가 형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출소하도록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마약감시반원 유·이씨등 5명은 76년부터 지금까지 부산·서울등지에서 마약감시 활동을 하면서 이로부터 1인당 50만∼1백만원씩을 받고 범행 적발때마다 눈감아준 혐의다.
경찰관 차경사는 이가 마산교도소에서 집행정지로 출소한뒤 무단 주거이탈로 수배받고 있는데도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돈을 받는등 향응을 받은 혐의다.
폭력배 이강한씨(칠성파두목)등 5명은 이로부터 「히로뽕」을 구입, 일본에 밀반출하거나 국내소비자들에게 팔아왔고 이에게 폭로를 미끼로 공갈을 일삼아왔다.
◆ 당시 신문 기사
히로뽕 일본 밀수 운반책이 쓴 수기입니다
韓씨는 완제품이 나오면 이를 인수, 그가 부리는 여러 갈래의 외항 선원들을 통해 日本으로 밀수출했다. 그는 일본에 수많은 輸入先을 갖고 있었다. 對日 히로뽕 취급량에선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급 인물이었다.
韓씨는 보통 히로뽕 5kg이 든 보따리를 나에게 건 주었다. 나는 뜯어보지도 않고 이것을 쇼핑백에 넣은 채 부산항에서 배에 올랐다. 출항할 때는 몸수색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발각 될 위험은 없었다. 배에선 선실 벽을 뜯고, 또는 파이프를 절단하고 뽕을 감춘 뒤 깜쪽같이 복원해 놓는 등의 방법을 썼다.
요꼬하마 항구에 내리면 나는 韓씨가 적어 준 전화 번호로 도착을 알린다. 인수자와 만나는 장소는 보통 우리 배가 접안한 부두였다. 日本에선 일반인들의 부두 출입이 자유롭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부두로 내려간다.
미리 약속한 복장으로 낚시질를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암호를 교환한 뒤 슬그머니 옆에다가 보따리를 내려놓으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는 씩 웃으며 잡은 생선을 한아름 내 주면서 『회를 쳐 먹으라』고 농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차를 몰고 여자를 데리고 와 아베크족으로 가장하는 수가 많았다. 그 다음날엔 시내에서 인수자와 만나 히로뽕 대금을 수표로 받는다. 당시의 가격은 kg당 2백50만∼3백50만 엔이었다.
나는 韓씨에게 대금을 전달해 주고 kg당 1백50만 원씩의 운반비를 받았다. 5kg만 운반해도 7백50만 원, 선원 월급은 택시값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엔 나뿐만이 아니라 정말 수많은 선원들이 이런 운반을 해 주었다.
그런 심부름을 하지 않는 선원들을 세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시절이었다. 우리 배는 요꼬하마, 고오베, 오오사까 등 일본의 여러 항구를 드나들었다. 韓씨는 항구마다 수입선을 확보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운반해 준 것만 해도 韓씨는 5∼6개의 루트를 갖고 있었다.
나는 1년 남짓 배를 타다가 하선했다. 요꼬하마에서 동료 선원이 밀수품을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렸다. 나를 포함한 다른 선원들도 조사를 받고 귀국 조처를 당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세븐 스타호는 얼마 뒤 홍콩 근해에서 침몰, 선원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오른쪽이 실제 체포 당시의 이황순
▷ 영화와 현실 차이점 ◁
송강호의 리얼한 연기와 1970,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대한민국 마약 사업의 실체를 다뤄 개봉과 함께 화제가 된 영화 <마약왕>. 실화를 모티브로 다뤘지만, 여느 영화들이 그랬듯이 영화와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다.
영화 <마약왕>과 현실은 어느 정도 다른지 아래 기사를 통해 정리해봤다.
1. 이두삼과 이황순은 고향과 출신부터 다르다.
영화 속 이두삼은 7, 80년대 명성을 날린 마약 업자들을 섞어 만들어낸 가상의 캐릭터다. 이중 가장 중심 격에 있는 인물이 이황순이라는 마약 업자로 극 중 이두삼 캐릭터 원형에 가깝다.
이두삼은 만주 출신으로 설정되었다. 하지만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이황순은 만주가 아닌 충북 청주 출신이다. 그는 충청북도에서 대학교를 나온 수재였지만, 부산에 정착해 금괴 밀수를 하다가 필로폰 밀수에 뛰어들면서 어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2. 이두삼과 이황순의 집 보안 시설은 어느 정도였나?
히로뽕 수출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이두삼은 1970년대 대한민국의 부자들도 갖기 힘든 엄청난 크기의 저택(660㎡(200평))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외부를 관찰할 수 있는 CCTV 같은 당시에는 너무나 희귀한 보안 장치들까지 설치돼 있어 영화가 어느 정도 과장해서 설정했나라는 의심까지 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황순도 이두삼 못지않은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영화 속 집은 이황순의 실제 저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CCTV는 기본이며, 고성능 음파탐지기에 잘 훈련된 맹견 4마리까지 두고 있었다. 이 맹견들을 위한 개집도 3평 크기의 벽돌집일 정도로 호화로웠다.
하지만 이황순은 화려하고 안정된 집에서 인생을 낭비했다. 하루 6차례나 히로뽕을 맞았을 정도로 중증 마약중독자였고, 가정부를 비롯한 여러 여성과 혼음을 즐기는 등 난잡한 생활을 이어나가며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3. 영화처럼 히로뽕은 주인공 집에서 제조되었나?
실제 이황순의 집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었다. 그의 저택은 산허리에 있는 마을의 맨 끝 집으로 왼쪽으로는 집이 한 채도 없어 외진 곳이었다.
집 아래로 하천이 있었고, 바로 앞에 목장이 있어서 악취가 휘날렸다. 목장의 악취 덕분에 이황순의 마약 공장은 제조 공장에서부터 나오는 악취를 막을 수 있었다. 마약 제조를 하는 데 있어서는 안성 맞춤인 곳이었다.
4. 실제 이황순은 이두삼 처럼 공개적인 외부 활동을 가졌나?
극 중 이두삼은 음지로 나와 양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신분 세탁을 한다. 심지어는 박정희 대통령의 행사에 참석해 귀빈석에 앉고 정치자금 기부활동까지 하며, 스포츠 선수들을 지원하고, 반공 관련 활동에 참석해 중앙정보부의 신뢰를 얻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 이두삼의 공개 활동은 어려운 일이다.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이두삼의 모델인 이황순은 공식적으로 도망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처럼 그는 폐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어 행방을 감춰서 검찰로부터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여기에 히로뽕 밀조 혐의까지 씌어진 상황이었으니, 사실상 1급 수배범인 셈이다. 박정희의 암살로 그가 몰락하게 되는 배경은 픽션을 가미시킨 설정이다.
영화는 주제 전달과 재미를 위해 이두삼이 활발한 외부 활동 설정을 빌려왔는데, 이 부분은 이황순이 아닌 또 다른 마약 거물 신상호의 행적에서 빌려왔다.
신상호는 이황순과 더불어 1970년대 4대 마약왕으로 필로폰 시장을 지배했다. 그는 이황순 보다 법적 신분이 자유로웠기에 지역정화위원 등 여덟 개의 사회적 직함을 갖고 당당한 지방유지 행세를 하며 신분을 감췄다.
5. 70년대 대한민국은 정말 히로뽕 제조국가 였나?
영화가 묘사하는 7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은 <나르코스>에 등장한 콜롬비아 못지않은 마약 제조국으로 그려진다. 실제 대한민국의 마약 제조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조선 시대 부터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평안도.함경도에서 양귀비의 밀재배가 이뤄졌고, 조선 말기, 일제 시대에 들어오면서 부터 '아편' 이란 이름으로 보편화가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들어서 일본이 작업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아편을 대량 생산해 군대, 공장에서 반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자연히 조선에도 마약이 퍼지기에 이른다.
부산 외국어대 사학과의 박강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1920~30년대 조선 인구의 3.5%인 7만여명이 마약류 중독자였다' 라고 적어 당시의 마약 중독 실상이 매우 심했다고 전했다.
이후 1960년대 일본 당국의 강력한 단속을 피해 일본 야쿠자가 국내로 들어와 태평양 전쟁 당시 제조기술을 익힌 한국인들을 포섭해 공장 건설을 지원하게 된다. 이들은 대만에서 밀수입한 염산에페드린으로 히로뽕을 제작해 일본으로 밀 수출했다.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히로뽕 제조국가라는 오명을 쓴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1980년대 후반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국내 재고량이 급증했고 이로 인해 유흥업소와 조직폭력배를 중심으로 마약류가 퍼져나갔다. 90년대가 되면서 개혁 개방으로 문이 열린 중국으로 마약 제조 공장이 이전되기에 이른다
6. 경찰과의 총격전은 진짜 있었나?
후반부 총격신은 실제 이황순이 체포 당하기 전 경찰과 벌인 총격전을 재현한 것이다. 이황순 체포를 위해 부산 남부경찰서 소속 전경 대원 74명이 현장에 도착해 집을 에워쌓다.
그러자 이황순은 자신이 소유한 엽총을 경찰을 향해 난사했다고, 당황한 경찰도 이에 대응하게 되면서, 무려 2시간이 넘는 대치 상태를 이어나가게 된다. 마약 중독자였지만, 자신의 개들을 끔찍하게 사랑한 애견가였기에 대치 상황에서도 죽은 개들을 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의 영화 같은 대치 상황이 지날 때쯤, 오후 7시 12분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재진입을 시도하려 한다. 그 순간 갑자기 한발의 총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리게 되는데, 바로 이황순이 자신의 엽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다행히 집안에서 함께 있었던 그의 형이 그의 자살을 제지하게 되면서, 어깨를 관통한 중상에 그치게 되었다. 희대의 검거 작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체포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 동아시아를 뒤흔든 마약왕은 징역 15년이라는 심판을 받게 된다.
7. 이황순 이후 마약왕의 계보는 끊겼나?
기존 왕이 죽으면 새로운 왕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마련. <나르코스>의 상황처럼 대한민국의 마약왕 계보는 다른 이들을 통해 지속한다.
70년대가 이황순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윤재성이라는 새로운 마약왕의 시대였다. 1989년 9월 28일 검찰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고급 주택가를 급습한다.
놀랍게도 그곳은 마약 단속반 사무실에서 불과 1㎞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바로 이 주택가가 대한민국 최대의 마약 공장이었다. 이때 압수된 필로폰의 양은 20㎏에 달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들이 제조한 마약은 필로폰으로 1987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무려 220㎏의 필로폰을 제조했는데, 이황순이 제조한 140kg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필로폰을 제조한 주범은 유명 아동복 브랜드 '피터팬'의 소유주 김정숙 회장으로 '아시아 최고'의 마약 제조 기술자인 윤재성의 아내였다.
수사가 시작될 당시 윤재성은 간암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내가 남편의 사업을 계속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부부가 함께 마약 사업을 오래전부터 진행하고 있었다.
부부는 1975년부터 10년 넘게 필로폰 제조에 힘썼고, 체포 직전까지 제조한 마약량을 합치자면 무려 2,000kg이 넘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절반은 국내로, 나머지는 일본을 비롯한 해외로 퍼져나갔다. 이후 국내 마약 제조 산업은 사실상 뿌리가 뽑히게 된다.
하지만 90년대부터 2000년까지는 중국에서 제조된 마약이 국내로 수입되는 형태로 바뀌었을 정도로 마약 소비는 암암리에 지속하고 있었다. 현재도 마약은 코카인, 엑스터시 등 다양한 형태와 종류를 변형되어 우리의 일상을 침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