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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8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그의 딸이 죽어서 집안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왜 떠들며 우느냐 하시면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 자는 것임을 알고 믿어야 할진대 사람들은 그 현상만을 보면서 비웃었던 것입니다(막 5장).
그런데 그 비웃는 자리에 나도 함께 동참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신의 눈으로만 판단하는 나는 진짜 소경입니다.
소경인 내가 소경을 인도하려 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요.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육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영안을 열어 그 나라를 볼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목사요 선교사로서 영안이 어두워 흐릿한 눈으로 봅니다.
이런 눈으로 어찌 영적 소경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오늘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8:12-20
제목 :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9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나의 묵상
음행 중에 현장에서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기회를 얻으려고 모세의 율법을 들어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이 율법을 제정하셨으며 완성자시요, 마침이신 주님 앞에서 이들이 아는 척 하는 모습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깜냥도 안 되는 이들이 마치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란.....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은 양심이 찔려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고 보내신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거가 참될 수 없다고 반박을 한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 스스로 자기의 논리를 주장하는데 그 주장이 어떻게 참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논리가 참되다는 논리를 펴신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여도 그 증언이 참된 것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기준을 따라서 판단함으로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너희의 판단은 옳지 못하다고 하신다.
만일 예수님 자신이 무엇을 판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계시므로 그 판단이 참되다고 하신다.
율법은 두 증인을 법정 증인으로 요구하는데 내 말에 대한 두 증인은 곧 나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시다.
그래서 나의 증언은 참되며 진실하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내 아버지는 더욱 모른다.
만약 나를 알았다고 한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아무도 그를 잡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아직 예수님의 때 곧 십자가에 고난 받으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데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창세전 만물 위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육신적 예수만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만 들었던 예수에 대하여 말할 뿐이다.
예수님은 하늘을 보고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땅만 쳐다보고 말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영적인 눈과 귀는 닫아버리고 오직 육신의 눈과 귀만 열어서 말하고 보고 듣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대화가 이어질 수가 없지 않은가?
교제는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아기와 할머니 사이에도 가능하다.
나는 아직 손주가 없지만 예전에 담임목회를 할 때 손주 같은 어린 아기들을 젊은 부부가 안고 오면 그 아이들이 어찌나 예쁘던지 내가 안고 눈을 맞추기도 하고 뽀뽀도 하고 까꿍까꿍하면서 웃기기도 하였다.
말은 못하지만 서로 눈을 열고 같은 시야를 가지고 옹알이를 하고 눈웃음을 짓곤 하는데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모른다.
이처럼 60살 이상 차이가 나는 할아버지와 어린 아기도 서로 같은 시야로 눈을 맞추고 말이 잘 통하지 않을지라도 교제를 하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웃으며 옹알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제와 사귐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서로의 관점과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무리 침을 튀기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해도 그들은 그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땅의 것만 쳐다보고 그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때로는 독설로, 때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 어르시면서, 때로는 자세히 설명을 하시기도 하면서 가르치시지만 그들의 눈과 귀가 닫혀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이는 영적인 눈과 귀 곧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므로 나를 따르는 자들은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며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말에 꼬투리를 잡는다.
“예수, 너는 너 스스로 논리를 펼치므로 그 논리는 참된 것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감히 예수님 앞에서 논리를 말하다니 이는 그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 앞에서 감히 논리로 따지다니 그들 스스로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나 스스로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이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육체 곧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데 그것은 나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 곧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너무도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부를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리낌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이것이 바로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함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보고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볼 때는 같은 하나님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시지만, 바리새인 등 유대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도록 예수님께서 목이 터져라 가르치신다.
하지만 유대인들 특히 그들의 선생이라 불리는 바리새인들이 그 하나님을 만물 안으로 끌어내려서 ‘자기들이 만든 신’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나는 너희들이 그것을 알기를 원해서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고 하였다.
(롬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이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였다.
그의 간절한 마음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고 바르게 믿는 것이었다.
그들이 받은 엄청난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예수가 다윗의 씨로서 오신 육신적으로 보면 그들의 혈통이다.
그런데 이 예수를 만물 안에 있는 한 선지자로만 보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무시하는 그 예수는 다름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고 강력하게 어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을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였다.
그저 만물 안으로 끌어내려서 나 잘 되게 하는 하나님,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복 주시는 신, 내가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만물 위, 창세전, 위, 하늘, 영원과 같은 거창한? 곳에 계신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설령 그런 생각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지식이나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셨다.
그저 내가 곤란을 당할 때 그 이름을 불러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하나님은 다른 종교에서 부르는 그들의 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철저하게 종교생활을 하며 살아왔다.
주일이면 교회에 빠지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만족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조차도 그 때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영적 갈증과 목마름은 더해만 갔다.
야곱의 우물을 떠나지 못하고 그 주변만 전전하였고, 이 남편 저 남편 갈아치우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야곱의 우물에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게 복음을 전해주셨다.
진리로 계시된 이 복음이 목이 말라 헐떡거리는 나의 깊은 층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었다.
내가 알지 못하던 하나님,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 미신적 종교적 육신적으로 믿던 예수를 이제 나의 생명으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요, 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니 내 안에 생명의 빛이 비추어졌다.
나는 그 빛을 전하기 위하여 지금 이 베트남 땅에 와 있다.
비록 현재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두움 가운데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나를 새롭게 다듬어 주님의 온전한 빛 가운데 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알기에 이 시간이 너무 귀하다.
주님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이 시간을 결코 ‘시간죽이기’로 허비할 수 없기에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며 주님과 내가 하나로 연합한다.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못했지만 오늘 나는 그 예수님을 잡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잡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잡아 그 안에서 내가 죽기 위함이다.
그 안에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온전한 생명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신 주님, 오늘도 복음의 빛,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로 인하여 만물 안에 갇혀 계시던 주님을 이제 깨닫고 내 맘속에서 만물 위로 올라갑니다.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어리석음과 비천한 지식으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 예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전했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조금 알지라도 그 부분적인 앎이 바른 앎이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마저 주님을 다른 종교의 신 정도로 취급하면서 주님을 이용해서 나 잘 되게 만드는 종교적 신으로 만물 안에 가두어 버렸으니 이런 대역 죄인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주님의 심판받음이 마땅한 자를 심판하셨사오니 주님의 그 심판은 옳습니다.
오늘도 그 심판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주님이 어디서 오셨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우리 주님의 기원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알아 고백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종교적 신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실존임을 깨달아 주를 위하여 나의 이 한 몸 드리게 하소서.
진정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의 형제들이 구원 받기를 원했던 바울처럼 이 종 역시 이 땅에 만연한 죽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오직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이 벳남 땅을 비롯한 땅의 끝까지 생명의 빛을 증거하게 하소서.
세상은 갈수록 어지러우나 주님 안에 거하면 세상이 나를 삼키지 못하오니 그 평안을 주를 믿는 모든 이들이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옵소서.
정치적으로 혼탁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주의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가득히 비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