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칼럼
진성여왕을 다시 보라
황 원 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이름이 김만(金曼). 신라 제51대 임금이며 세 번째요 마지막 여왕이다.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은 작은 오라비 정강왕 김황(金晃)의 뒤를 이어 897년 6월에 조카 효공왕 김요(金嶢)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9년 11개월간 신라를 다스렸다.
진성여왕은 제48대 임금 경문왕의 딸이다. 그녀의 위로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큰 오라비 김정(金晸)이 제49대 임금 헌강왕이다. 헌강왕이 죽을 때 그의 유일한 혈육인 요가 너무나 어렸으므로 아우 황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강왕이 불과 1년 만에 죽으면서 누이동생 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신라는 무슨 까닭에 진덕여왕 사후 233년 만에 다시 여왕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더구나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의 형편은 국운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진성여왕은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처럼 혈통의 신성성과 왕통의 정당성이 보장된 성골(聖骨)도 아니었다. 그때는 백년 넘게 이어져온 진골들의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난국에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은 ‘숙부인 김위홍(金魏弘)과 간통하고, 위홍이 죽자 미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악평을 듣기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도둑들이 설치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데 임금 자리에 앉아서 쾌락만 추구하다가 나라를 망쳤다는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과연 틀림이 없는 것인가.
진성여왕의 즉위는 선왕인 정강왕의 유조(遺詔)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정강왕 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 여름 5월. 왕이 병이 위중하매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독해지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 불행히도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법(骨法)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옛일을 본받아서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자식이 없어서 누이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인데, 정강왕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누이동생이 천성이 총명하니 임금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골법, 즉 체격이 사내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셋째는 옛날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도 여자로서 임금 노릇을 한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와 셋째 이유는 그렇다고 쳐도 둘째 이유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뼈대가 사내처럼 굵직굵직하게 생겼다는 것이 왕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는 진성여왕 즉위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세력이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리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를 들먹인 것도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즉위 때의 사정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헌안왕 5년(861년) 정월에 왕이 위독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불행히도 아들이 없어 딸만 둘을 두었노라. 우리나라 옛일로 선덕왕과 진덕왕 두 여왕이 있었으니 이는 가히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따를 수는 없도다. 내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성한 덕을 갖추었으니 그대들이 임금으로 모시고 섬긴다면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것이니라.”
이처럼 경문왕은 장인인 헌안왕이 ‘여왕이 임금노릇을 하는 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위의 자격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경문왕의 아들 정강왕은 이와 반대로 누이동생이 비록 여자이지만 총명하고, 또한 체격이 사내 같으니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다.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지독한 여성 혐오자였다.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이 매우 못마땅했던지 노골적으로 악평을 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2년 조의 기록을 보자.
- 왕이 그 전부터 각간 위홍과 더불어 간통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위홍으로 하여금) 언제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토록 하여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고 했다.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했다. 그 뒤로부터 미소년 두세 명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정사를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날뛰고, 재물로 뇌물을 먹이는 짓을 공공연히 했으니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풍기와 규율이 문란해졌다. -
김부식은 이에 앞서 선덕여왕 조에서도 여왕의 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쏟아냈다.
-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안방으로부터 튀어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주역>에는 이르기를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
김부식의 이 글은 헌안왕이 죽기 전에 사위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한 말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까. 헌안왕이 말하기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던 것은 가위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덕여왕의 악평을 고려하면 헌안왕이 했다는 이 말도 사실은 김부식이 헌안왕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학자 김부식은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을 천대하고 비하했다. 게다가 신라 상류사회의 개방적인 성 풍조가 너무나 못마땅했기에, 또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근친혼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를 음란으로 단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부식도 신라 왕실의 모든 근친혼 사실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소태후(只召太后)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공주로 숙부인 김입종(金立宗)에게 시집가서 진흥태왕을 낳았다.
이런 김부식이 자식 교육은 잘못하여 자기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인종 때 내시 노릇을 하면서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워 매를 맞지를 않나,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감악산으로 도망쳤다가 무신들에게 잡혀 죽어버렸던 것이다.
신라 당대의 성 관념에 따르면 숙질간, 사촌간, 심지어는 이복 남매간의 혼인과 연애는 보통이었다. 근친혼을 두고 불륜이니 뭐니 하고 떠들지도 않았다. 사실 고려시대 초기만 해도 황실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숙질이나 이복 남매간의 근친혼을 오히려 장려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화랑세기>에서 말한 이른바 ‘신국(神國)의 도(道)’였다. 진성여왕 당시 신라 사회의 성 도덕이 근친혼을 혐오하는 분위기였다면 진성여왕이 ‘남편’으로 섬긴 숙부 위홍에게 혜성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위홍은 단순히 조카 진성여왕과 불륜관계에 있던 숙부가 아니라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다. <삼국유사>는 위홍이 부호부인의 남편이라고 하면서도, ‘진성여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 추봉한 혜성대왕’이라고 분명히 썼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떳떳한 부부관계였다.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의 유모라고 했으니 신분이 당연히 진성여왕보다 아래였고, 또 정부인의 자리도 여왕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진성여왕에게는 아들도 있었다. 그것도 둘 이상이었다. <삼국유사>에 진성여왕이 ‘막내아들 양패(良貝)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패가 위홍의 아들인지 다른 남편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진성여왕이 정말로 음탕하여 대신들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면 11년 동안이나 왕좌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에 진지왕이 정사는 제쳐두고 여색만 밝힌다는 구실로 폐위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오해에 따른 진성여왕의 악의적 평가는 재고되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다.
<경제풍월> 5월호
==============================================================-====================================
첫댓글 강한 논지에 비해 뒷받침하는 근거가 약한 듯 싶습니다. 첫째, 골격이 남자 같다는 말이 어째서 진성여왕 즉위에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둘째, 진성여왕 즉위 이후에 펼쳐진 역사를 보면 진성여왕의 실정이 단순히 김부식 개인의 혹평에 의한 것으로 보기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위홍이 진성여왕의 남편이었고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했다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의 평가는 정말 악의적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고려초까지 왕실의 근친혼은 당연시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대목을 편찬한 점 때문에 진성여왕의 치세가 전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이분법적인 생각이 아닐런지요. 세상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단순하게 구분 지어질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보는 근거로는 부족합니다..진성왕에게 책임 전가는 잔인하지만 망국의 책임이 없다 할 수는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