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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항아리
쇳소리 나던 바위에서 흰흙으로 수 천 만년
마침네 물을 만나 몸을 얻고 지옥불 속에서 살아나온 너
촛불 아래 뭉쳐놓은 한 아름 목화송이 같구나
서른 즈음 여인네 속살처럼 매끄럽구나
그렇게 때 묻고도 이렇게 깨끗하구나
그렇게 나이 먹고도 이렇게 아름답구나
다 안으려고 다 비웠구나
-되돌아 가보고 싶은 시대
텔레비전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되돌아가보고 싶은 시대는 별로 없었다.그런데 사십 중반에 도자기 귀신이 살짝 들어오고 이십여년 지난 요즘엔 돌아가고 싶은 옛날이 몇군데 생겼다.
서화를 즐길 줄 알고 아랫사람의 비판과 충고에 즐겨 귀 기우릴 줄 알았다는 고려 인종때로 돌아가고 싶다. 전라도 강진의 관요 소속 도공으로 환생해 청자 종주국 송나라 사람들이 깜짝 놀란 천하제일 비색청자를 구워 보고 싶다.
(인종(1122-1146) 장릉 출토 청자참외형화병(높이22.8cm)
조선시대라면 세종과 성종,그리고 영조 시대로 가보고 싶다.세종은 문화와 과학을 아는 지도자로 특히 백자에도 관심이 깊었다.15세기 관요백자 특유의 엄정하고 단아한 형태와 눈같이 흰 색깔로 백자의 나라 조선을 만든 일등 공신인 도마리 가마의 물레대장 보조쯤 되어 천.지.현.황(天地玄黃) 대접을 빚어보고 싶다.
성종때로 돌아간다면 충청도 공주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자락 분청사기 가마골에 태어나 걸쭉한 분바른 술병에 누치,쏘가리 신나게 그려 보고 싶다.경국대전으로 반듯한 기강 세워 보이스카웃처럼 규율과 질서 잘 지키는 양반들이 많이 사는 서울 수도권은 반듯하고 엄숙한 세상이었는지 몰라도 시골 백성들은 타고난 성정대로 낄낄거리며 재미지게 살았던 시대였음에 틀림없다.혹시 의심스러우면 물고기와 새와 온갖식물이 춤추고 노래하는 계룡산 분청철화 도자기들을 보시라.
(분청사기철화어문병,15세기말,높이29.5cm도쿄국립박물관)
한 시대 한 곳만 가 볼 수 밖에 없다면 영조 때로 가보고 싶다.영조 때는 반상의 규율이 엄혹했던 전시대의 봉건적 신분구조가 많이 이완되어 계층이동이 가능했다.주산업이었던 농업의 혁신은 임란으로 65퍼센트이상이 줄었던 농지가 세종때 수준으로 확장 되었고,농사법도 혁신적인 이앙법(移秧法)이 도입 되어 논에 볍씨를 바로 뿌려 추수하던 직파법(直播法)방식에 비해 훨씬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다.
그런 사회 경제적 변화에 힘입어 조선중화 사상으로 무장한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인들이 문화군주 영조의 후원아래 전방위적인 조선고유색찾기 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시사회(詩社會)가 활성화 되면서 중인 중심의 여항문학이 꽃피어 시조.가사.판소리가 발달하였고, 천년 동안 중국의 화본에서 맴돌던 화풍을 벗어나 조선의 실경을 조선적인 필치로 그린 정선일파의 진경산수가 예원을 압도하였다.
2000년 한국도자기역사상 최고의 기술력과 예술성을 자랑하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의 금사리분원 또한 그런 사회 문화적 토양 위에서 생긴 것이다.
영조는 세자 시절 분원의 책임자 직책을 맡을 정도로 도자산업의 최일선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능해 직접 도자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금사리백자,금사리달항아리는 어느날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문화는 줄기고 예술은 꽃이다".최완수선생의 말이다.금사리 달항아리가 만들어지던 시절 영조 때로 가보고 싶다.광주군 남종면 금사리 가마에 가서 금방 구워낸 달항아리가 어떤 모습일까 지금 보는 색깔과 어떻게 다를까 보고 싶다.
-백항아리, 달항아리되다
2005년 8월 국립고궁박물관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 이후 달항아리는 확실하게 떴다.예고편도 있었다.1년전엔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전시된 10점의 40cm급 '달'들이 애호가들에게 안복(眼福)을 나눠준 바 있었고, 더 몇 년 전엔 인사동 모화랑에서 달항아리 7점이 공개된 적도 있었지만, 국립고궁박물관 개관기념 특별전의 기획의도와 출품된 9점의 작품성,전시장이 갖는 의미는 기존에 있었던 전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보여 준 문화행사였다.
출품작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문화재로 7점의 국보.보물을 비롯, 영국과 일본에서 온 2점,합쳐서 9점이었다.
(가운데 '리움의 달'을 비롯 45cm내외의 크기와 조형,색깔등 일당백의
'백자 달항아리전' 출품작들)
물론 그 전에도 공,사립박물관은 물론 도자기 애호가라면 누구나 달항아리 한 점 갖기를 꿈 꿀 정도로 인기있는 품목이었지만, 2005년 여름 광화문 거리에 관람객을 줄세울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던 그 전시 이후, 달항아리는 명실공히 조선백자의 대표선수로,한국미의 아이콘으로 공인받게 되었다.
-달항아리! 넌 누구냐?
학자들은 주로 백자원호,백자대호,이바닥 고참 상인들은 지금도 그냥 백항아리라고도 부르는 달항아리는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 되어가던 1900년 전후,조선인 일꾼들을 앞세운 일인들에 의한 무차별 도굴로 시작된 소위 '청자의 전성시대'에는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다. 웬만한 백자용충 정도는 골동가게의 노끈이나 보자기 보관통으로 쳐박혀 있었을 정도로 백자가 별다른 주목을 못받던 시대였다.
친일거두 박영철,항문외과로 돈 많이 번 박창훈,마지막 내시 출신 대수장가 이병직,명필로 서화 감식안으로 유명한 위창 오세창,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오늘의 간송 미술관을 만든 전형필,문제적 정치인 장택상등이 수집에 열중했던 일제 강점기에서 60년대까지만 해도 번듯한 소장품 리스트에 들지는 못한 물건이었다.
고미술에서 골동이라 하면 '서화골동'에서 서화를 뺀 것인대 주로 도자기를 의미한다.청자,분청,백자,백자중에서도 '고소메'로 통하던 15,6세기의 청화백자와 눈같이 흰 소문(素文)의 주병,항아리,대접등 설백자와 상감백자,17,8세기의 추초문항아리와 각병,화준,용준,19세기 전반의 청화백자항아리,고급 필통,연적등 문방구와 양각 주병,고급 제기등 수집가들이 선호한 골동 족보에 백자달항아리는 없었다.
(백자청화초화문호 높이 27.4cm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백자항아리라고 해도 궁중의례 때 꽃꽂이 병이나 술항아리로 쓰였던 기록이 확실한 화준이나 용준 등 문양과 색갈이 뛰어난 청화백자,철화백자 항아리도 아니고,지저분한 '간장물' 얼룩이나 남아 있는'백항아리'가 골동의 반열에 낄 수 없었던 것은 당시대인들의 미학적 기준에서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달항아리에 빠진 사람들
(버나드 리치,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
집단자학증과 패배감에 젖어 있던 조선인들에게 조상들의 지혜롭고 평화로웠던 민족성,자연친화적 공예관과 일상용기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내선일체의 신민화 정책과 그에 따른 경복궁,광화문 훼손 등, 일제의 야만적 식민통치 방식에 돌직구로 비판한 일본의 대표적인 친한 지식인이자 불세출의 공예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모든 장식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기교과잉에 빠지는데, 조선의 도자기는 단순으로의 복귀,자연미에 대한 신뢰라는 흥미로운 예외를 보여준다면서 그런 특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정(情)과 화(和)가 조선미의 핵심이라고도 했다.
야나기는 그 이유를 선교(禪敎)에서 나온 말인 불이심(不二心)에 의한 불이미(不二美)에서 찾았다.'불이'란 어느 곳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으로 선택에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순응 할 수 있고 어디에도 집념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불이심이야말로 조선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그러므로 불이심으로 만든 조선인의 모든 생활용품에는 저절로 불이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불이미는 무심미(無心美)나 자재미(自在美)로 표현되고 그 속에서 조선사람의 마음과 자연의 본성인 정(情)과 화(和)가 살아나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미의 특징으로 특히 조선 도자기의 본성이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자세한 내용은 <조선과 그 예술>참고)
(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그런 미학적 안목으로 192,30년대 당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소반과 목기, 민화등 소위 '민예품' 수집에 열중해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로부터 허접하고 잡스런 물건에 미친 이상한 사람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그 야나기가 조선도자의 본성이 집대성 되어 있는 달항아리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한 구체적인 흔적을 아직 못 봤다.
고교생 무렵 도쿄의 어느 골동가게에서 모란항아리에 반해 학생신분으론 거금인 3엔을 주고 구입한 야나기는 십여년 후 조선땅을 밟자마자 부산의 어느 고물상에서 17세기 백자철화항아리를 사기 시작하면서 조선 공예품 구입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그런 야나기가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입수 가능했을 그의 수집품 목록에 달항아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미스터리다.
야나기의 미감에 들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휴대하기에 만만찮은 크기 때문이었을까,좋은 달항아리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걸까,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혹시, 수집했었는데 소실됐거나, 지금도 어딘가 안전하게 소장돼 있는 데 나만 모르고 이처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고 있는건가 생각할수록 궁금하다.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압기를....
야나기와 함께 서구예술과 동양미학에 대해 연구하고 평생 절친으로 친교가 두터웠던 버나드 리치(1887-1979)라는 영국인 도예가는 현대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백자가 가르쳐 주고 있다고 했을 정도로 조선백자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버나드 리치의 달항아리 사랑을 보면 그와 절친이었던 야나기의 달항아리와의 인연이 더욱 궁금해진다.
버나드 리치는 경성에서 연 자신의 작품전을 마친 1935년, 지금은 대영박물관 한국관에 있는 달항아리 한점을 수집해 귀국하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는 말을 남겨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바 있다.
(버나드 리치가 소장했던 달항아리, 제자 루시 리가 물려 받았다)
버나드 리치의 그 말은 달항아리는 물론 해외반출 문화재를 거론할 때면, 그 좋은 보물을 외국인은 쉽게 알아보고 거저 줍다시피 챙겼는데 우린 곁에 두고도 못 알아봤다는 부끄러운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아뭏튼 그의 달항아리 수집은 동서양 공예미학에 정통한 이론가이자 도예가로서의 뛰어난 안목이 뒷받침 되었음은 물론,당시 달항아리의 가격이 부자가 아니어도 감당할 정도로 크게 비싸지는 않았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당시 조선경매구락부의 고미술품 경매가격은 왠만한 청자주전자나,18세기 금사리 청화백자 한점에 가회동 기와집 한채 값이었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난 달항아리는 평생 버나드 리치 곁을 지키다가 그의 도예 수제자 루시 리에게 물려져 평생 그녀의 품에서 보내게 된다.
1995년 루시가 죽자 '버나드 리치의 달'은 원래 주인이었던 버나드의 딸에게로 돌아갔다가 1998년 딸이 사망하자 마침내 경매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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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에 있는 '버나드 리치의 달'이다.사진이 시원찮다.키높이45X몸통지름43.5X입20.5X굽15.5cm)
마침 대영박물관에 제대로 된 한국관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한빛문화재단 한광호 이사장이 낸 100만 파운드의 기부금을 갖고 있던 박물관이 우리돈 1억2천만원으로 달항아리에 응찰하지만 5억을 부른 응찰자에게 밀리고 말았다.그러나 모든 물건엔 임자가 따로 있는법,때마침 한국의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응낙자가 낙찰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다.그 바람에 한기업인의 좋은 꿈은 다시 현실이 되어 버나드 리치의 '달'은 현재 대영박물관 한국관의 대표 유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비슷한 크기의 달항아리가 청담동 호텔 프리마에 있는데, 2007년 뉴욕크리스티 경매에서 약15억에 낙찰받아 온 것이다.
'호텔 속의 뮤지엄,뮤지엄 속의 호텔'을 지향하는 이상준 대표의 집념과 열정의 결과였다.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던 물건이 7,8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프리마 호텔의 '달'.푸근하고 너그럽다.높이 48cm)
아뭏튼 세계를 다 뒤져도 고려 불화처럼 몇십점 찾을 수 있을까 말까한 귀한 유물인 달항아리의 귀환은 한동안 화제의 문화계 뉴스였다.
어디 달항아리 뿐이겠는가. 아름다움에 눈 뜬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조선시대 목공예품, 자유로운 회화적 독창성이 피카소 뺨치는 민화 등,미학적, 문화재적 가치를 몰라 헐값으로 외국에 흘려보낸 문화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가.타국을 떠돌던 소중한 유물들이 귀환하는 뉴스가 자주 들려왔으면 좋겠다.온나라가 국력 국력 하는데 어떻게 보면 국력은, 외국에 나간 모든 상품이 외국인에게 좋은 대접을 받는 힘과 함께 외국에 있는 자국의 문화재가 많이 그리고 쉽게 돌아오게 하는 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다.
(항아리 귀신이 붙은 화가 김환기와 도상봉)
1940년대 달항아리에 빠진 대표적인 예술가는 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다.성북동 산비탈 그의 집 작은 마당에 하얗게 빛나는 백자항아리 곁에서 담배 한대 지긋이 문, 흐뭇한 표정의 사진을 보면 그의 항아리 사랑이 가슴을 울린다.도자기,특히 백자 마니아였던 김환기는 하루가 멀다하고 항아리를 사다 날랐다는데 항아리 값이 가난한 화가가 예상한 것 보다 늘 싸게 생각되어서 살때마다 흐뭇했다고 했다.백자 항아리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친구 최순우관장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찌하여 사람이 이러한 백자 항아리를 만들었을꼬...."감탄하고,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있다.굽이 좁다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가 틀림없는 한쌍이다."라는 시를 읊으며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두부살처럼 보드라운 백자,쑥떡같이 구수한 백자'를 그렇게 좋아하고 아꼈다.
화가는 파리시절 친우에게 쓴 편지에서도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다"고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그렇게 모은 자식같은 항아리들이 부산 피난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보니 폭격을 맞아 몽땅 사금파리로 변해 있었다.그러나 백자의 공동묘지가 된 사금파리 무더기 앞에서 마음 한편으로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니 항아리 마니아 김환기의 억하심정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1950년대 김환기화백의 '여인과 달항아리')
'백항아리'로 불리던 싱거운 명칭에 '달항아리'라는 멋진 이름을 달아준 사람은 '영원한 박물관장'으로 불리는 최순우 관장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달항아리를 부잣집 맏며느리처럼'너무도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대를 이은 김원룡 관장은 달항아리의 무심한 미학을 열거한 뒤 이론을 캐고 따지지도 말고,그냥 느껴야지 느끼지 못한다면 아예 말을 말라고 야단?을 칠 정도로 달항아리의 자연친화적 미감을 상찬하였다. .
6,70년대 한국 서양화단의 파워맨이었던 도상봉화백도 항아리 화가라 할 정도로, 달항아리와 거기에 곁들인 라일락이나 안개꽃을 많이 그려 한국의 미감이 넘치는 정물화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그의 달항아리 그림은 오늘날 고도자기에는 큰 관심없는 서양화 애호가들에게도 큰사랑을 받고 있다.
(1960년대 도상봉 화백의 달항아리)
명륜동 그의 집에 김환기화백이 오면 그림 얘기는 제쳐놓고 항아리 애기로 밤새는 줄 모를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작고한 김환기와 함께 경매시장의 양대지존 이우환 화백의 백자와 달항아리 사랑도 만만찮다.
"몸통보다 좁고 높다란 굽에 나지막이 크게 벌린 입.하앟게 윤기 도는 부드러운 감촉에,팽팽함과 느슨함을 함께한 억양의 리듬을 지닌 둥근 모습, 아득한 세월을 떠올리게 하는 무수한 희미한 얼룩이며 상처자국,흙과 사람과 시간이 어떠한 서로의 부름과 거부를 펼쳐오면 이런 조선백자가 된단 말인가"
-이우환의 글 '예감의 항아리'중
'백자부'라는 불후의 도자예찬시를 남기기까지한 초정 김상옥 시인도 잊을 수 없다.이 양반은 도자기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백자연적에 꽃혀 전셋돈을 아끼없이 갖다 바친 미친전설의 주인공으로,아자방(亞字房)이라는 상호로 고미술 가게를 운영한 적도 있다.승용차 뒷자석에 넘칠 정도로 거대한 달항아리를 사갖고 그렇게 흐뭇해 했는데 그 달항아리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등, 시인의 끔찍한 달항아리 사랑은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 회자 되고 있다.
사방탁자에 달항아리와 계룡산철화 주병,청화 백자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방에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국적 정한을 가장 잘 표현한 대표시인이자 전각,그림, 글씨,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우리시대 예원의 최고수의 사진속 표정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통도자기 재현 전성시대의 달항아리
70년대 여주.이천에 불어닥친 전통도자기 바람은 일본인들의 고려다완 열풍과 비교적 싼 값에 도자기라는 공예품으로 주방과 거실을 장식할려는 중산층의 욕망에 힘입어 단기간에 여주.이천을 도자기의 고장으로 변모시켰다.
광주분원의 가마의 불꽃이 사그라던 1900년을 전후로 생계를 위해 이주한 사기장들의 후손들과 유명,무명 도예가들로 여주,이천은 제2의 분원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봄날은 짧았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생활 환경, 새로운 세대의 미감에 부응하는 새로운 한국 도자기 창조에 성공하지 못한 결과,한국도자기는 싸구려 도자기의 대명사로 전락,한국도자산업의 그늘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전통도자기의 재현이라는 관점에서만 봐도 이렇다할 실적을 못보였다는 점이다.
유근형,지순택,안동오,등 7,80년대 이천도자기붐을 일으킨 주인공들은 잊혀져가는 전통도자기 재현에 평생을 받친 장인정신의 표상으로 각종 미디어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고 그에 따른 사업적 성공은 거두었지만 백자 특히, 달항아리 재현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 없는 이유를 어떻게 봐야 할까.
(지순택,44cm 옥션 단,2013 경매 150만원)
소위1세대 도예가들은 주로 비색청자와'고비끼'로 불리던 분청다완이나 '이도다완',그리고 '고소메'로 불리던 초기청화백자 재현에 관심이 많았다.유근형의 청자,안동오의 백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도예장인이 되었다.한복에 멋진 수염을 기른 도예가와 그의 작업 모습은 훌륭한 한국의 미로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스컴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그들의 도자기들은 좀 산다하는 사람들의 사무실과 거실을 장식하는 자랑스런 작품이 되었다.거기에 발맞춰 국가는 인간문화재로 지정,국가공인 도예가로 만들어 주었다.이천은 그들의 도자기 공방을 중심으로 도예촌이 형성되었고 박물관까지 갖추는 큰 성공을 거둔 경우도 생겼다.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세대 도예가들이 고려청자의 비색과 조선백자의 좋은 색깔을 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비색과 유백색 재현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남았다.특히 유백색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되는 달항아리 재현은 시도는 있었지만 변변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분청은 숨을 곳이라도 있지만 백자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말이있다.그만큼 백자의 좋은 색을 내기가 어렵다는 말인데 아무 도안도 없는 그 큰 몸통을 색깔로 승부해야 하는'백항아리'는 장인과 요업 경영인을 겸하고 있던 그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저런 상황을 이해는 하면서도 학자나 문인 화가들보다 한발 먼저 아니,그들과 함께라도 달항아리의 미학과 독창성을 알아봤더라면,그래서 조상의 빛나는 도자유산을 되살려 보자는 열정에 불이 붙었다면,1세대 도예가들의 기술력과 잘 가꿔진 요업시스템으로 어쩌면 18세기를 넘어서는 20세기의 달항아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아쉬운 대목이다.
(1970년 여름의 백자항아리 전시회 포스터)
(한익환의 '달')
다행히 1세대 도예가들 중에 소정 한익환(1921-2006)이 있었다.
그는 요업을 과학적으로 배운 도예가다.광복후 국영 요업연구소에서 도자기의 기본부터 배운 그는 평생을 백자의 백색을 찾는데 바쳤다.
2001년 연말 노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들은 도자 애호가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온갖 기형의 순백자, 청화백자 중에서 풍부한 양감과 눈부신 색택으로 빛나는 달항아리들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익환 아트박물관)
용인 백암의 가마에서 수천 조각의 시편(試片)에 번호표 붙여 가며 백색과 전쟁 치른 30년 내공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공인 받는 자리였다.
이상적인 백자의 색은 투명한 셀로판지 포장을 뚫고나오는 흰 담배갑 색이라고 했던 소정 한익환.그는 백색의 최상의 수치를 100이라 한다면 조선백자의 최고치는 92-93 정도인데 자신의 백색은 91-92 수준이라고 자평한 바 있다.덧붙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진 않지만 당대에 나 한익환을 능가할 사람도 없을 것이란 자부심도 감추지 않았다.
백색의 수치로 따지자면 그의 자평에 딴지걸기가 어려울 것이다.그만큼 한익환의 백자 색깔은 백색의 순도로는 경지에 올랐다할 수 있겠다.단지 그만한 백색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백자의 색은 수치로도 평가될 수 있겠지만 백색이야말로 백가지 색이고 색감이란 무엇보다 미적,관능적 대상이므로 마음의 눈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유교성리학적 취향과 미학이 투영된 초기백자의 설백자와 조선적 미감과 감성이라는 토양을 바탕으로 탄생한 유백의 달항아리는 마음에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한익환의 '달'은 설백에 가깝게 간 것으로 보였다.물론 금방 가마에서 나온 것과 2.3백년 세월의 때와 수만번 사람의 손길을 겪어낸 유물과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다.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사리 항아리도 삼백년 전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는 지금 한익환의 항아리처럼 보였을런지도 모르니까...
(박영숙의 '달')
박영숙의 달항아리도 봤다.인사동 그의 도자기 전시장엔 5,60센티급의 달항아리가 여러 점 있었다.
박영숙 도예가는 지금은 삼성박물관 리움에 있는 국보 209호 달항아리의 원 주인이었다.이십여년 그 항아리와 함께 봄볕을 쐬고 동지섣달 설한풍을 지냈다고 했다.한낮의 밝은 햇빛, 어스럼 여명, 환한 형광등, 아늑한 촛불 아래서 함께 했다고 했다.계절과 날씨와 빛에 따라 그 항아리가 어떤 모습으로,얼마나 황홀한 색감으로 감동을 주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백자와 달항아리 작업에 매진하게 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기본 동력은 도자계의 최고 권위 정양모관장의 권유와 방향제시,이우환화백과의 공동작업에서 나왔다고 하겠다.동시대 사계대가들의 도움은 작가와 작품홍보와 마케팅에 결정적인 변수인데 도예가 박영숙은 그야말로 행운의 인맥을 가졌던 것이다.거기에 18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 달항아리 창조라는 캐치프레이즈와 그에 따른 제작과정과 작품의 형태와 색의 차별화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 하겠다. 행운의 여신도그의 편이었다. 한국의 대표 도예가로 1999년 영국여왕 방한 때 소개되고, 그후 대영박물관,로열 앨버트을 비롯,세계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는 성과가 줄을 이었다.그의 달항아리 가격이 억대를 호가하는 성공의 기반이 된 것이다.35cm 내외의 18세기 골동 달항아리의 거래가격이 몇 천만원에서 1억원,금사리 연대로 형태와 때깔이 출중해도 2,3억 될까말까한 요즘 고미술시장에서 현대작가의 신작이 억대를 호가하고 실제 그 가격에 거래된다면 골동의 저평가 현실이 안타깝긴하나 박영숙 달항아리의 성공은 축하할 일이다.골동 도자기건 현대도자기건 모든 미술품은 작품성과 시장성으로 평가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박영숙 도예가의 달항아리)
이우환 화백의 박영숙의 달항아리에 대한 평가다."조선백자가 한발 물러나 있는 여인이라면 박영숙의 달항아리는 앞으로 나와 '왜 불만 있어?'라고 말하는 현대 여인인 듯하다"
박영숙작가의 달항아리는 우선 엄청난 크기와 티끌하나 안보이는 흰색으로 시선을 압도했다.대단한 작업을 해냈구나 놀랍기도 했다.찬찬히 보니 백색은 너무 창백하고 광택은 과하게 느껴졌다.조선여인의 따뜻한 순정적 분위기보다 가부끼 배우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너그럽고 원만한 선조들의 심성이 녹아 있는 듯한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결핍은 현대에 제작되고 있는 대부분의 백자와 달항아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보는데 박작가 또한 그벽을 넘지 못한 듯하다.우리가 달항아리에 환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제일 큰 이유 하나를 대라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18세기 금사리 가마의 유백색이 주는 지극히 자연스런 분위기와 마음의 평화라 하겠다.그리고 달항아리 제작에 힘쏟고 있는 모든 도예가들은 그 신비스런 색을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그러나 형태는 18세기 달항아리에 가까운데 색깔은 영 아닌,달항아리 복사품 제작이라는 결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확인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물론 박영숙도예가는 18세기 '달'의 모사가 아닌 21세기 '달'의 창조를 지향한다고 스스로 제작의도를 밝힘으로써 왜 18세기 달항아리하고 다른가라는 의문이나 비판에서 자유롭다.즉 제작기법과 제작의도가 전통의 백자달항아리와 전혀 다른데 왜 골동 달항아리보다 터무니없이 크냐, 색이 왜 그러냐 할 이유나 근거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조선백자의 현대적 재창조에 성공한 대표적인 도예가로 유명한 김익영작가처럼 박영숙의 백자는 그냥 박영숙의 백자고 달항아리일 뿐이다.그런데 과문의 소치인지 모르지만 김익영은 달항아리를 만들지 않는다.왜 안 만들까?짐작되는 바는 있지만 기회가 되면 물어 보고 싶다.
(권대섭의 '달')
그만둔지 20년도 넘었는데 "우리 각하께서 어쩌구,우리 장관님께서 저쩌구"하는 전직 영부인,사모님이 대부분이다.똥깨나 뀐다는 사람들 부인들 중에 방송 인터뷰에서 자기 남편 얘기를 할 때 "남편께서 어쩌구""식사를 하시고 저쩌구" 하지 않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다.나이 지긋하고 워낙 대단한 일을 하셨던 분이라 같이 방귀 트고 살아 온 부인이라도 존경의 념을 금치 못해 몸에 벤 습관으로 그러는구나 못난 백성이 알아서 새겨들어야지 어쩌겠나.요즘엔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민간인(?)들도 다들 그런다. 어쩌다 평어체를 쓰면 그 당연한 언어예절에 듣는 나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갑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 예술가라는 사람을 평가하는 내나름의 기준 중에는 이런 게 있다.자기 작품을 제 '작품'이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 앞에서는 일단 배알이 꼴린다는 것이다.반면, 소설이든,회화든, 내 글, 제 그림이라고 하면 괜히 믿음이 가고 좋아진다.겸손한 것 같고 성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나만의 잣대일 수있다
권대섭을 모르고 권대섭을 만났다.2007년 초여름이었다.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단산 자락 이석리라는 돌많은 작은 동네였다.일행은 편고재(片古齋)이규진선생과 석경고미술연구소 황규완선생,필자 포함 셋이었다.이선생은 책을 비롯 다방면에 해박한 분으로 특히 많은 도편수집.연구로 도자기분야 숨은 고수다.석경선생은 고미술 수집과 거래 경험이 풍부한 분으로 일찌기 70년대말에 이병철 회장의 도움으로 신세계화랑에서 '조선백자항아리전'을 기획.전시한 경험이 있을 정도다.특히 달항아리에 매료돼 달항아리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깊은 선생은 마침내 2000년대 중반부터는 달항아리 그리기에 정진 중이다.당시 필자는 정년 2,3년 남겨놓고 업무에서 비켜나 답십리와 인사동에 들락거리는게 한창 재미있을 때였다.두 분은 초짜인 필자에게 이런저런 지식과 정보를 전해주는 '싸부님'같은 존재였다. 권대섭의 '달'과의 만남도 그분들 덕분이었다.그때까지 나는 권대섭이 얼마나 대단한 도예가고 얼마나 알아주는 달항아리 작가인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흙일 때문이었는지 피부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도공 권씨는 잔잔한 눈웃음이 편안한 농부같은 인상이었다.권대섭은 자신을 도예가나 작가라 하지않고 그냥 도공이라 했다.그는 자기 작품을 '제작품'이라고 호칭하지 않았다.그가 만든 달항아리를 가운데 두고 차와 맥주를 마셨다.색깔이 편안하고 생긴게 흐뭇했다. 취향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맛 볼 수 있는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왼쪽부터 황규완선생,필자,이규진선생,권대섭도예가)
그 후 권작가의 전시가 한다하는 미술관과 화랑에서 이어졌고 대부분 가봤다.그는 요즘 많은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최상의 평가를 받는 달항아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권작가의 '달'은 주둥이와 굽이 다 다르고 몸통과 키의 비례가 다 다르지만 작품마다 균형과 조화를 갖추고 있다.형태미는 균형과 조화에서 나온다.그는 서양화 전공의 미대생 시절 인사동에서 본 백자 항아리에 꽂혀 도예의 길로 진로를 바꾼 사람이다.광주일대 200여곳의 도요지를 누비며 사금파리를 줏어 보고 흙과 불의 마술과 씨름해온 30년 내공이 작품에 알박혀 있음을 확인한다.
수치로 계랑한 백색도만으로는 한익환.박영숙에 못미친다 하겠지만 그분들에게 결핍된 따뜻하고 온화한 질감이 권대섭의 '달'에 있다.결국 전체적인 형상은 중기 달항아리에 가장 가까이 간 것 같다.요즘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는 권대섭의 '달'은 신작 달항아리의 대세가 된 느낌이다.
-달항아리에 빠진 2000년대 화가들
(고영훈의'달')
달항아리처럼 단기간에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미의 상징이 된 예가 있을까?지난 50여년, 조선의 자연과 조선의 마음을 가장 자연스럽게 빚은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한발 앞서 알아본 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연구와 재현에 힘입어 달항아리는 21세기 들어 가장 인기 있는 미술품의 상징이 되었다.1960년 전후,김환기와 도상봉이 달항아리를 그린지 50년,그후40년간 달항아리를 그린 화가가 없었다.참 이상한 일이다.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와서 특히 2006년 고궁박물관 백자달항아리전 이후 '달 을 그리는 화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2006년 가을부터 시작된 미술시장의 활황은 이런 저런 화가들의 달항아리 그림이 새로운 불루칩으로 떠오르는 호기가 되었다.단연 일등은 고영훈작가였다. 이미 '돌'과 '책'시리즈로 잘나가던 고작가의 극사실 달항아리 100호짜리는 간단히 억대를 넘어섰다.가나 아트측의 주문을 받고 시작한 고영훈의 달항아리 그리기는 대성공이었다.
고작가는 모델로 가져온 달항아리를 닷새 동안은 만져볼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엄청난 가격 때문이었다. 고영훈은 달항아리를 보면서 거대한 우주를 담고있는 신비한 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보고 있는 자신의 마음까지 비춰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라고 느꼈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놓여 있지만 수많은 것을 담아내는 모습에 감탄해 그 앞에 절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그렇게 그린 달항아리가 진품 달항아리 가격을 넘 볼 정도가 되었으니 엄청난 성공이라 하겠다.도예가 권대섭과는 대학동기동창이다.권대섭의 도자기 달항아리 보다 고영훈의 그림 달항아리가 작품가에서는 일단 앞서 있다.
(강익중과 최영욱의'달')
강익중의 달항아리 그림도 2007,8년 메이저 경매장의 단골로 나왔고 수십점 팔렸다.강작가는 광화문 이전공사 가림막에 온갖 종류의 항아리를 그려 제대로 팬서비스를 한 바 있는데,그의 캐릭터화 된 듯한 달항아리는 열렬 팬을 키워 그 기세가 시장까지 이어진 것이다.비교적 소품 위주인 그의 '달'또한 호당 백만원이 넘었다.강익중의 '달'은 달항아리의 형태적 특징만 취하고 보라색 갈색 노랑색 푸른색등,원색을 과감하게 구사해 현대적 미감으로 변용시킨팝 아트적 창조성이 두드러진다.
비슷한 연배의 최영욱도 주목 받고 있다.빌 게이츠 재단 건물 오프닝 행사때 80호짜리 3점이 걸려 뉴스가 된 적 있는 최작가는 소년기를 인사동에서 백자와 항아리를 많이 보며 자란 기억을 바탕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달항아리에 올인하고 있다.
(최영욱의 달항아리 '카르마')
극사실적인 형태와 몸체의 질감을 마티에르로 표현, 세월의 느낌과 한국적 풍광을 아스라이 보여주면서 많은 공력이 소요된 빙렬같은 수많은 선들은 인간과 인간,인간과 자연의 인연과 교감을 상징한다고 했다.그밖에도 고재를 캠퍼스로 목리를 살려 달항아리의 현대적 감성을 추구하는 김덕용작가를 비롯 많은 화가들이 저마다의 '달'그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달항아리의 미학
(감상용이었을까?)
방병선 교수는 조선색이 강조 되던 문화 중흥기 사대부들의 창의성과 성리학적 미감이 반영돼 주역의 태극을 형상화한 달항아리가 제작되었으리라는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달항아리중 많은 작품들이 상하좌우와 몸체가 팔각 형태로도 보이는데 이는 천지음양의 조화를 입체화한 팔괘를 상징하는 형태로 일종의 감상용 도자기였다는 근거로 보는 연구가들도 있다.
조선 중화사상에 입각, 문화 각 분야에서 조선 고유색 찾기에 심취했던 진경시대 사대부들의 미의식이 달항아리의 생산.유통에 호의적인 작용은 했겠지만,원시 시절부터 태양과 함께 가장 가까운 천체로 신비와 숭경(崇敬)의 대상이었던 달에 대한 조상들의 오랜 호상(好尙)이 달항아리라는 형태로 구체화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둥근달과 원형에 대한 선호는 따지고 보면 꼭 우리 민족만의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없는 인류 공통의 정서요 형태라 해야 할 것이다.다만 도자기에까지 그 형태를 끈질기게 추구하여 '달항아리'라는 유일한 백자 항아리를 만들어낸 민족이 없다는 점에서 창의성과 독자성을 평가받는 게 아닐까.
형태로만 본다면 달항아리보다 백여년 앞선 17세기초부터 달항아리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철화백자항아리가 민요에서도 양산되어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다시 말해 유백의 40cm가 넘는 대형은 아니지만 30cm내외의 둥근항아리가 이름없는 지방의 도공들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달항아리가 숙종.영조 진경시대에 갑자기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달항아리가 의례나 감상용 기물로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합리적 공감을 얻기 위해선 위에 든 사실 말고도 몇가지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대표적인 의례기인 제기나 연회용 항아리에서 보듯 일정한 규격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다시말해 달항아리는 얼핏 봐서는 다 똑같은 것 같지만 조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보면 원도 다 같은 원이 아니고 주둥이와 굽의 모양과 크기도 제각각이다.
50cm에 가까운 백자대호에서 알항아리로 불리는 30cm 이하까지 달항아리처럼 크기가 다양한 기물도 없다.주판알 모양의 형태가 있는가하면,정원(正圓)의 형태도 있고,약간 길죽한 모양도 있는가하면,아랫도리가 지나치게 퍼진 것도 있는 등, 다양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이러한 개별적 특징과 개성이야말로 그것이 숙련된 도공의 무심한 기술의 결과든,의도된 디자인의 결과든,아니면 너그러운 당대인들의 기물관의 결과든,현대의 후손들이 달항아리를 마주하며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굽과 주둥이의 비례도 제각각으로 주둥이에 비해 작은 굽을 가진 항아리는 날씬한 상승감으로 그야말로 보름달이 둥실 떠 있는 느낌을 주지만 주둥이와 굽의 크기가 같아 안정감은 좋으나 상승감이 부족한 작품도 많다.
주둥이의 모양도 다양한데 구연부의 형태는 제작연대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로 통한다.고수들이 "주둥이가 발랑 드러 누웠다"고 묘사하는 낮은 굽으로 예각을 이루는 주둥이를 가진 항아리가 가장 앞선 시대 즉 17세기 말에서 18세기 극초반으로 통한다.
1703에서 1719년 사이에 제작된 연령군 주방명 '달'을 위시해,리움의 '달'과 중박의 '달',호림의 '달'을 비롯,대표적인 명품 중에 이런 형태가 많다.물론 1710년대의 궁평리 관요산으로 일본인들이 추정한 동양도자미술관의 44cm 높이의 달항아리처럼 일자형 주둥이도 있다. 고참 상인중에 일자형 주둥이는 드러누운 주둥이보다는 조금 늦은 18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사람도 봤지만 동양도자미술관'달'의 제작년대 추정을 무시할 수 없다면 일반화 하기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주둥이의 형태보다는 높이가 시대구분의 중요 포인트로 보는 것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한마디로 주둥이 높이가 길면 정통 달항아리 시대를 벗어났다고 본다.대부분의 고구마 항아리와 원형의 몸통에 주둥이가 높고 큰 항아리,주둥이 끝부분을 가락지 끼운 것처럼 궁글린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굽도 오똑한 십일자 형태가 약간 도립삼각형의 굽보다 앞서는 연대로 알려져 있다.17세기 말 18세기 중반의 달항아리는 약간 벌어진 십일자형의 비교적 낮은 구연부에 수직 굽을 가진 둥근 항아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감상용이나 의례기가 될려면 색깔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 모양새일 터인데 대부분의 달항아리는 주둥이와 굽이 비대칭을 이루어, 태극이나 팔괘가 형상화 되었다고 하기엔 어려울 정도로 정연한 비례감을 깨트리고 있다.
따라서 당시 사대부들의 기물(器物)에 대한 자세와 미적 취향,지금까지 알려진 용도에 비추어 볼 때 사대부들의 미적욕구에 부응해 감상용으로 달항아리가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엔 공감하기 어렵다.
(17세기 백자철화용문항아리,형태상으론 18세기 달항아리와 같지만 태토와 유색 등에서 양난(兩亂)으로 피폐해진 요업수준을 보여준다)
달항아리의 원래 용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똑 부러진 자료가 없다.리움의 달항아리 표면의 갈색 얼룩을 위시,tv쇼 진품명품에서도 진한 액체가 스며들어 변색된 얼룩을 지닌 달항아리가 출품 되면 감정위원이 늘 '간장물'이 들었다고 한다.상류층의 각종 밑반찬과 요리에 두루 쓰였을 간장중의 귀한 간장,씨간장을 보관하는데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 통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물건이 모 경매장에 나와 눈길을 끈 바 있다.유백색의 주판알 형태인 그 항아리의 굽에 정각(釘刻)으로 연령군겻주방이라고 새겨진 달항아리였다.영조의 배다른 동생이었던 연령군의 주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로 달항아리가 적어도 초기엔 주방에서 사용했던 실용기였다는 귀한 자료다.
(연령군겻쥬방 명(延齡君,1699-1719)백자항아리,높이37.2cm,몸통40cm.숙종 말기에 제작된 원조 달항아리.높이보다 넓은 몸통의 볼륨감이 풍부하다.서울옥션)
재일동포 건축가로 크게 성공한 유동룡선생은 40여점의 달항아리 수집가로도 유명한데 그는 달항아리에 오동나무 씨앗 기름을 보관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어떤 상인은 경옥고같은 액상의 한약재를 넣어두는 용기로 사용했다고도 했다. 귀한 간장,귀한 보약,귀한 기름 모두 다 보관했을 거라 보는게 맞을 것 같다.정확한 용도를 적시한 확실한 기록은 1931년에 출판된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에 나온다.
"대항(大缸)이라 하는 커다란 둥근 모양의 항아리가 있다.이 대항에는 백자에 철사로 용이나 화초 등을 그려넣은 것이 있고 무늬가 없는 것도 많다. 이것은 게[蟹] 젖갈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용즉미(用卽美))
조선시대 생활 도구는 실용적인 미의식에 의해 제작과 사용이 결정되었다.거기엔 당시의 사상(思想)도 포함되었다.이를 용즉미라 한다.
모든 기물은 공간의 지배를 받고,모든 장인은 공간의 요구에 호응하여 제작한다.달항아리가 감상용으로 제작된 것이라면 우선 그 정도 크기의 도자기를 안전하게 두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궁궐의 침소나 거실을 빼고 40cm가 넘는 도자기를 적정거리에 놓고 감상할 만한 공간이 가능한 실내 구조가 떠오르지 않는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가와 부속 공간을 떠올려 보면 달항아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안전하고 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은 찬방(饌房)이나 대청마루가 제일 적당할 것 같다.
(1919년 출판된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이스의 조선풍경 중 한 폭.오른쪽 뒤주 위에 청화백자항아리들이 보인다)
(같은 화집의 조선말의 주막풍경,찬장에 35cm내외의 달항아리가 보인다)
(숙종때 건축된 논산 윤증 고택의 안채 대청마루,달항아리가 300년 전 쯤 이런 공간에 있었으면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검은 기와집을 떠받치는 흙갈색 기둥과 서까래,그 구조물을 연결하는 흰 벽채와 흰 창호문,검은 윤이나는 우물마루,그 위의 손때와 기름때로 깨끗하게 찌든 시커먼 목가구,그 위에 떡하니 앉아 있는 허연 달항아리를 떠올려 보라. 흑과 백의 대비가 빚어내는 칼칼한 눈맛, 조선의 멋이 그 곳에 있다.300년 전에 태어난 현대적 형상의 이 우람한 도자기는 대문을 지나 마당 한가운데,기단, 댓돌 위,앞툇마루 등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아도 눈길을 빼았는 훌륭한 설치미술이 되어,대표적인 한국의 미를 연출할 것이다.
다른 곳에 달항아리가 있는 모습,이를테면 사대부들의 생활 공간인 사랑방에 놓여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다.
(포의풍류도와 함께 단원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김홍도 이십대의 작품.18세기 후반,선비의 방 분위기를 보여준다)
선비의 검박한 생활 철학에 맞게 간결하고 소담한 가구들과 연적,필통,지통 등 작고 앙증맞은 문방구들은 그들의 생활 용품이자 애완의 대상이었기에 미적 욕구가 반영 되었지만 그것도 아주 은근하고 최소한에 그쳤다.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이성과 정신의 가치를 추구하여 물욕에 초탈할 것을 생활의 기본 자세로 여겼던 선비 사회에서 자신들의 생활용구인 문방구도 아닌,한아름이 넘는 커다란 도자기를 사랑방에 끌어들였을 것 같지않다.
완상의 대상으로 사랑방이나 안방에 두고 보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달항아리의 원만하고 풍부한 형태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유백색이 조선색을 추구하던 사대부들의 미적 취향에 잘 맞았을 것이다. 달항아리가 비록 생활용기이긴 했지만 집안의 주인인 사대부들의 미감에 거슬렸다면 눈에 띄는 곳에 자리 할 수 없었을 것이고,구입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달항아리는 당시에도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해져온 달항아리는 200년이 훨씬 지나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미감이 다양해지면서 현대적 디자인과 단순한 색깔이 주는 미니멀리즘적 매력으로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달항아리를 향한 거대한 대중적 관심과 사랑의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우리나라는 세계도자사에 빛나는 귀중하고 다양한 도자유산을 가진 도자왕국이다.그러나 일반인이 그 자랑스런 왕국에 발을 들여 놓기는 그렇게 만만치 않다.우리 국민은 누구나 고려청자의 미적 우수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쉽게 쉽게들 입에 올린다.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보고 들은 결과 그렇게 머릿속에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한걸음 더 들어가 비색과 상감기법이 얼마나 다양하고 어떻게 아름답고 왜 소중한지 이해하고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분청과 백자로 오면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진다.분청의 다양한 기법과 그에 따른 다종다기한 유물은 일반인의 눈에 썩 친연성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백자도 마찬가지다.깨끗하고 예쁜 현대청화백자에 길들여진 눈에, 낡은 느낌 외에는 비슷비슷한 문양과 색감의 조선청화백자가 현대인들의 미감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특히 고도자기의 청화 색깔은 공부가 전혀 안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엔 시대의 구별이나 미적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측면에서 보면 골동적인 색깔과 문양이 전혀 없는 달항아리의 단순하고 자연스런 형상이 오히려 골동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호감을 갖고 접근할 수 있게 하는 큰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그 결과 200년 이상을 변변한 이름 없이 그저 백항아리라 불렸던 저장용 항아리에서 불과 몇 십년만에 조선백자의 대표,한국 미의 상징이라는 평가를 받는 달항아리라는 이름의 '국민문화재'로 등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세종 때 어기로 지정된 후 백자는 각종 의례와 행사의 공식 기명(器皿)으로 왕조말까지 사용돼 왔다.조선 후기의 각종 진찬도나 의궤도를 보면 용준(龍樽). 화준(花樽). 사준(砂樽)으로 불리는 큰 항아리들이 여러점 보인다. 용준은 물론 청화로 그려진 용문 항아리로 가화(假花)를 꽂아 행사의 주인공인 왕의 좌우에 배치되거나 술항아리로 사용되었다.용문양이 없는 순백자항아리는 사준이라 했다.이때 사용된 항아리들은 청화, 혹은 철화로 주로 운룡문이 그려져 있는 키큰 항아리들로 실용적 구실과 함께 행사장을 치장하는 설치미술 역할도 했다. 실용과 장식을 겸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장식을 겸한 도자기는 광의의 감상물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혹시 방교수가 '국박'에 있는 백자청화용문호를 두고 내린 가설이라면 논의가 있을 수 있겠다.'국박' 소장의 백자청화용문호는 금사리 계통의 달항아리에 삼조룡(三爪龍)이 반추상으로 그려져 있는 희귀한 유물로 형태와 청화의 발색,바탕색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희귀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청화용문항아리,높이35cm)
이런 수준의 항아리면 충분히 궁중행사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아직까지 의궤도에서 이것과 비슷한 달항아리 형태의 화준이나 용준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안보인다고 300년 전에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진찬도의 용준이나 화준(50cm-60cm의 키큰 항아리)을 받침대인 주형(酒亨) 위에 배치한 것과,국박의 '청화달'(35cm급)을 꽃으로 장식하거나 술을 담아 주형에 배치한 모습을 비교해서 상상해 보면 '달'은 우선 키와 형태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훨씬 큰 45cm 내외의 큰 달항아리가 궁궐이나 관청의 큰행사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생활철학과 기물관에 비추어 볼 때 달항아리가 상류층의 취향과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식용(감상용)으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무리라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다.
(달항아리시대의 대표적 의례용(장식용) 항아리)
양난 이후,국제정세가 개편되고 조선또한 거기에 맞춰 변화와 개혁을 실시한 결과 숙종 후반에는 왕권과 국력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정치경제적 변화는 국가기간산업이었던 요업에도 많은 개선과 발전을 가져와 회백색의 거칠고 조악했던 도자기 제작기술이 임란 이전의 수준을 넘어 조선중기백자의 진수로 일컬어지는 유백자를 생산할 수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조선중기 대표항아리중 하나로 꼽히는 이대 박물관의 백자철화포도문호다.
잘 수비된 백토로 거대한 항아리 형체를 위아래 접합하였는데 당당한 어깨가 원형을 그리다가 허리께에서 늘씬하게 곡선을 이루어 바닥에 우아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거기에 농담이 절묘하게 표현된 능숙하고 문기있는 포도송이와 이파리의 배치는 도화서의 일급 화원의 솜씨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포도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오랜 화재(畵材)로 왕비의 처소나 왕비와 연관된 행사를 장식했던 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철화포도문호, 높이 53.8cm,이대박물관)
누가 봐도 천하명품이요 어디로보나 미의 극치인 감상용 도자기라 하겠다.모든 명품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다. 이 명품엔 해방정국을 분탕질했던 한 정객의 탐욕과 그에 맞서 일확천금을 노렸던 힘없는 한 골동상인의 처절한 죽음이라는 극적인 드라마까지 있어 더욱 유명하다.이승만의 하수인으로 친일청산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부산정치파동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장택상은 국부라고 떠받들던 이승만에 맞서 대권을 꿈 꾼 바람에 자금에 쫒겨 이 천하명품을 김할란의 이대박물관에 넘기게 된다.
동시대에 태어났지만 이런 물건들과 비교하면 달항아리는 흙 속의 진주였다고 할 수 있다.골동계 은어로 '출세'가 늦었다.왜 그랬을까.한마디로 출생의 문제다.달항아리는 동시대의 장식용 도자기나 실용과 장식을 겸한 의례용 도자기가 아닌 순수한 실용기로 태어났기 때문이다.그래서 돈과 권력이 횡행하는 골동상과 수장가들이 저마다 일생일점 확실한 명품을 향해 무한 도전을 하던 구한말 이후 백여년 동안, 달항아리는 묻혀있는 진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은 그들의 족보에 없었고 족보에 없는 골동은 돈이 안됐기 때문에 잇속에 빠삭한 그들의 이목을 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세한도 환수스토리로 유명한 서예가이자 고서화 컬렉터였던 손재형은 도자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 또한 항아리 종류와 대접등 주방용품은 진정한 골동,즉 미술품으로서 가치가 없다며 거들떠 보지 않기로 유명했다. 당대 고미술 시장을 움직였던 수퍼 파워들의 인식이 그랬던 시절에 '버나드 리치'들이 더러 더러 나타나 이항아리 참 좋다고 얼싸안고 가는 걸 봤지만 그건 조선 골동의 진미를 모르는 외국인의 이국취향쯤으로 여겼고,이런저런 '최순우'와 '김환기'가 백자의 맛이 어쩌구 자연의 멋이 저쩌구 하는 말 역시 비싼 골동을 손에 넣기 힘든 가난한 서생들의 영양가 없는 소리쯤으로 치부했던 것 같다.
달항아리가 골동가게 구석에서 거미줄치고 앉아있던 그 시절 골동계에서 잘나가던 대표적인 항아리들을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미의식의 변화가 읽혀져 자못 흥미롭다.
(기타 의례용(장식용)항아리들)
(높이55.2cm+몸통43cm로 거대한 왕실 의례용 백자청화용문호.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소장)
(백자청화당초문호.높이49cm로 당초문으로 전면을 꽉채운 장식성 강한 항아리)
(백자청화시문호.유백의 어깨위에 아껴쓴 청화시문의 청초한 발색이 선비들의 미감을 보여준다.높이 36.8cm)
(18세기 후반 조선백자를 대표하는 백자청화진사연화문호.사도세자 원찰인 수원 용주사 불단을 장식하고 있었고,그래서 단원의 그림이라는 설을 가진 불후의 명품.높이 44.6cm.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정양모관장의 '달'사랑)
"1960년대 초부터 18세기 백자달항아리에 대하여 여러모로 끊임없이 생각해 왔다.큰 달항아리(높이 40cm 이상)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루만져보고 들여다보고 실측하고 사진찍고 구부(입,주둥이 아가리 구연부)와 몸체,굽다리 등을 면밀하게 비교 분석해보고 그려보고 또 다른 여러 항아리들과 비교해 보기를 수없이 거듭하였다.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가슴에 담아서 내 가슴에 있는 조형을 종이에그려보기를 수만 번도 넘게 했다. 대부분의 미술품이 그렇지만 항아리도 보면 볼수록 전에 미쳐 보지 못햇던 새로운 조형적 특성과 세부의 생김새,형태가 눈에 들어오고 이들이 서로 매우 흥미있게 어울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한두 번 가지고는 되지 아니하고 수십 번 수백 번을 보아도 그래도 미진한 구석이 있다. 아무 문양도 장식도 없는 상황에서 발산하는 숨겨진 아름다움과 그 시대정신을 가슴에 담아야 비로소 달항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중략) 달항아리는 내면적으로는 18세기의 시대정신을 함축하고 있으며 외형적으로는 18세기가 지향한 모든 아름다움을 집약하여 기막히고 훌륭한 조형으로 탄생한 것이다.다시 말하면 18세기 우리의 총 조형 역량을 달항아리로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달항아리에 대한 많은 미술사학자,도자연구가,미술평론가들의 논평 중에서 정양모관장의 평가만큼 큰 울림을 주는 글을 보지 못했다.정관장의 짧은 글은 긴 세월, 대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철저한 관찰을 기울인 열정의 결과로, 한국의 미와 달항아리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깊은 애정이 넘친다.
(정양모관장이 수 백번을 보고 또 봤다는 달항아리의 지존 '리움의 달')
달항아리
한때는,부서지는 흙이라서
젖으면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 몸
광염의 불길을 헤치고 나오니
마음 속 요동치는 물도 담겠네
- 임승진
(이우복선생의 달항아리 숭배)
많은 컬랙터 중에서 이우복 회장을 "옛 그림의 마음씨"-애호가 이우복의 내 삶에 정든 미술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수필집에서 만났다.김우중씨와 중학,대학동기로 대우그룹을 창업하고 성공하여 세계경영을 꿈꾸다 대우가 몰락하기 전에 물러난 이회장은 신입사원 시절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지옥같은 기업현장을 살아오며 미술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었고,그 힘으로 느긋하고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분이다.
돈과 안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동네 일반적 통설은 이선생한테는 비켜간 것 같다.이선생은 겸재의 "박연폭",단원의 "포의풍류도"등 한다하는 컬랙터들도 일생에 한 점이 어렵다는 명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이선생의 그림 보는 안목을 '본태적 심미안'이라고한 미술사학자도 있고,'풍류정신의 승리'라고한 작가도 있었다.유홍준교수는 한 서양 미술사학자의 말을 빌려 이선생을 "뛰어난 애호가는 말없는 미술사가"라 했다.
이우복선생의 책에 달항아리 이야기가 있다.1979년 단골화랑 주인의 소개로 그림을 보러 한 소장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림이 아니라 둥근 백자항아리였고,보는 순간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그때까지 주로 그림만 샀지 변변한 도자기는 산 적이 없었고 전문적인 지식도 없었던 그는 다짜고짜"하나 물어 봅시다.저 도자기 파는 건가요?"했고,주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팔수도 있다면서 거액을 불렀다.엄청난 가격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황홀한 첫인상 때문에 포기가 안돼 그 물건이 18세기 '달항아리'라는 것도 모른 채 샀단다.그 후 몇 년 동안 그 항아리를 안방의 보료 옆에 두고 살면서 새벽에 잠이 깨어 볼 때와,퇴근 후 전깃불 아래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춘하추동 계절마다 다르고,마음의 날씨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봤다.
이우복선생은 달항아리의 멋을 "오묘한 빛깔과 둥근 기형에 있다.둥글되 기계적인 원형과는 다른 게 달항아리의 형태다. 달항아리는 열이면 열 모두 다른 선을 보여준다.컴퍼스로 그은 원형이 아니라 몸체 좌우의 선이 다르고,살짝 일그러진 듯한 그 선에서 여유와 자연성이 배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흙을 빚던 도공의 손길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하고,주둥이보다 굽이 작아서 불안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커다란 항아리를 사뭇 가뿐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이우복선생의 신령 달항아리.높이 42cm. 책을 찍은 사진이라 영...)
그렇게 달항아리와 사랑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평소 보다도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었다.어슴푸레한 여명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는데 늘 그렇듯 먼저 문갑 위의 달항아리에게 시선을 옮겼는데,그 자태가 몹시 장엄하고 황홀하여 순간 벌떡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순간의 마음으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돌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이였다는 것이다.
"그후 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저 항아리에 필시 어떤 신비한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달항아리를 마음속의 '신령(神靈)'으로 대하게 되었고,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간 다음에는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하여 달항아리를 모셨다.신령님은 다른 잡다한 것들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꾸미고 여초선생의 5500자에 달하는 금강경 병풍을 신령님 뒤편에 펼쳐 놓았다.그리하여 달항아리는 금강경 병풍을 배경으로 단정한 소반 위에 좌정하게 되었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가치있는 일에 제대로 미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살맛나는 세상으로 느리게나마 다가가지 않겠는가.그러나 현실은 이념이나 종교,명예와 권세에 미친 자들이 생산하는 온갖 추태와 독소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날로 허접해져가는 세상에서 평생을 한국의 미에 미쳐 마침내 달항아리 신령까지 접신할 정도로 아름답게 미친 이우복선생같은 분이 그래서 더욱 멋지고 귀하게 느껴진다.
나무이우복보살마하살!
나무달항아리보살마살!
(이토 이쿠타로의 달항아리 예찬)
"하나의 위대한 정신이 미리 예고된 듯한 빛깔을 띠며 본연의 모습으로 조용히 그 곳에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 도자기의 세계적인 보고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이토 이쿠타로 관장이 처음 이 달항아리를 만났을 때의 감격을 쓴 글이다.
(오사카 동양도자 미술관 소장 달항아리 높이45+몸통42.4+주둥이21.2+굽15.9cm)
"어느 때는 도다이지(東大寺) 관음전의 가장 신성한 곳, 어느 때는 서울의 유서 깊은 양반 집 사랑방,또 어느 때는 뉴욕의 초고층 빌딩 사무실 장식장,어느 때는 런던 교외의 별장 난로 옆 등 다양한 곳에 조선 중기 백자대호가 놓여 있다"
어느 때는 사하라 사막 오아시스의 푸른 대지, 어느 때는 앙코르 와트의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 이 항아리가 마치 오랜 옛날부터 그 곳에 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이러한 상상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의 황홀한 예찬은 세계 도자계의 명품과 대비되면서 더욱 구체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중국 청나라의 현란하고 호화로운 다채항아리,독일 마이센의 정교한 기술을 응집시킨 정교한 장식항아리,일본 중세 백자대호 등은 보관할 장소만 얻을 수 있다면 주위 공간과 잘 어울리는 매력있는 존재감을 발휘한다.그러나 대부분의 도자기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을 선택하는 듯하다.그에 반해 조선 중기의 백자대호는 놓여진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이토 관장은 달항아리는 변환이 자유로운 기적 덩어리와 같은 조형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리고'변환이 자유로운 이 기적 덩어리'는 손으로 만든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든 '마음의 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형태와 색깔로 본 다양한 달항아리들
(원형(圓形)달항아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은 40cm 이상의 크기와 금사리 계통의 유백색 피부는 물론,키와 몸통의 둥근 비례와 입과 굽의 조화 즉, 입지름이 굽지름보다 20%이상 커서 가볍게 서있는 느낌을 주어 달항아리라는 이름에 걸맞는 미감을 갖춘 공통점이 있다.요업공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달항아리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조선백자 전체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이 형태에 집중 되어있다.
(리움의 '달' 형태와 색깔,균형과 조화,제작공정과 미적가치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달항아리이자 조선백자의 아이콘(높이44.5+몸통42+입21.5+굽16.5cm)
(남화진의 '달' 국보.높이45+몸통44+입21+굽17cm)
(국립중앙박물관의 둥근'달' 보물.높이41+몸통40+입20+굽16)
-원형으로 크기와 색깔 다좋은데 입과 굽의 크기가 비슷, 안정감은 우수하나 날렵함이 부족한 달항아리들.
(아모레 박물관의 '달'보물.높이44.5+몸통43.5+입18.2+굽17.7cm.입과 굽의 크기가 비슷,약간 둔한 느낌)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의 '달'.궁평리가마 제작 추정,입과 굽이 비슷한데 단아한 여성적인 곡선이 아름답다.높이44 cm)
(최상순의 '달' 높이47.8+몸통45.5+입19.5+굽18cm.입과 굽의 크기가 비슷해서 상승감이 부족한 느낌)
(팔각형 달항아리)
-이런 팔각형태의 달항아리를 두고 주역의 팔괘가 응용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런 철학적 의도보다는 요업공학적 필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즉 고온의 번조과정에서 몸통이 녹아 무너지는 현상을 최대한 막기 위해 힘을 좀 더 많이 받을 수있는 각진 형태로 조성했다고 보는 것이다.달항아리 재현에 매달리고 있는 현대 도예가들도 이런 형태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같은 원리에 있다고 생각된다.그 결과 전체적으로 팔각형의 비대칭이 주는 자연미와 남성적 분위기가 원형달항아리와는 또 다른 미감을 풍긴다.
(우학문화재단의'달'.팔각형의 대표,最大 크기를 자랑하는 국보.높이49+입20.1+굽15cm)
(대영박물관의 팔각형 '달'버나드 리치의 일화로 유명)
(높은 어깨 날렵한 아랫도리가 강한 남성적 이미지와 현대적 미감,물씬한 팔각형 '달'.높이 46.5+입 22+굽 16.5cm,덕원미술관)
(접합부의 힘찬굴곡과 주둥이와 굽의 조화가 당당하고 우아하다.금사리 특유의 노리끼한 피부가 따뜻한 봄볕같다)
(주판알(은행알)형 달항아리)
-몸통지름이 높이보다 넓어 감항아리로도 불리는 주판알 형태로 몸체가 빵빵하다.17세기 철화백자항아리의 모습이 남아있는 달항아리의 초기형태로 생각된다.
(연령군겻쥬방 명으로 제작년대(1699-1719년)가 확실한 달항아리., 높이 37.2cm 몸통지름 40cm.서울옥션)
국립고궁박물관의 '달'이다.주판알(은행)형,높이43.8+몸통44cm)
(프리마의 '달''감'형태.몸통의 선명한 물레자국과 우람한 볼륨이 매력.높이48cm,몸통지름50cm로 입과 굽의 높이를 감안하면 엄청 빵빵한 모습)
(전형적인 주판알 형태의 '달'이다.'구로도'라고 불리는 골동고수들은 이런 주판알 형의 물건을 '소로반 가다'(주판알형태라는 일본어)라 하여 최고의 달항아리 형태로 친다.연령군겻주방 명 항아리와 유사.높이37.5 몸통지름42cm,서울옥션,5억)
(일본 고려미술관의 감형 달항아리.따뜻한 유백의 피부와 무르익은 여인을 연상케하는 곡선미가 일품.높이 42.5cm)
중국 백항아리
(중국 명나라 때인 15세기 초기 백자호. 푸른색이 조금 끼어 있는 상아색 백자 유약,평굽에는 시유가 안 됨.주둥이는 투박하게 말려있고 목이 어중간하게 길다.문양이나 채색이 없고 전체 크기도 달항아리하고 비슷한데 굽이 없어 상승감이 전혀 없다.이래서 우리 달항아리의 고유한 창의성이 두드러진다.높이 48.3,몸통넓이 53.3cm 2013년 9월 크리스티 21만 달러낙찰)
그 밖에 눈에 띄는 달항아리들
(달항아리의 미덕을 다 갖춘 이름없는 '달' 깨지고 금가고 고생이 많았던 '달'.이런게 달항아리 멋과 맛의 정수가 아닐까.)
(달항아리의 특징이자 한국미의 특징인 좌우 비대칭의 넉넉한 미감이 좋다)
(일본 정가장 문고의 작은 '달'.무엇이 들어있었기에 몸통에 이런 추상화를 남겼을까.높이 30cm)
(알랭 드 보통과 존 암스트롱 공저<영혼의 미술관(2014)>에 소개된 달항아리.'이 항아리가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는 최상의 도자기로 그들 눈엔 보였단다.잔뜩 때 뭍고 지저분한 색깔에 어리숙한 형태나 유약처리등 제작의 무심함이 오히려 각박한 현대인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고 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보이면 좋을만한 태도를 깨닫게 해준다'고 칭찬하고 있다.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의 말로 짐작된다.서양 도자기에서는 절대적으로 만날 수 없는 조선 항아리의 미학과 미감을 2014년 40대 유럽의 지성인들이 확인하고 있다.사실 달항아리로서는 제작년대나 형태 색깔등 그닥 우수한 놈으로 평가 받기 어려운 수준인데...정말 제대로 된 달항아리를 봤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아뭏튼 세계적 베스트 셀러 미술서적에 공예품으로서는 드물게 언급 된 것 만도 고맙고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매장의 달항아리들)
(높이 41.3cm 몸통지름 42cm, 서울옥션 6억 낙찰)
(높이34.2+몸통32cm 서울옥션 2.2억 낙찰)
(높이35.5+몸통34.4cm 1.85억 낙찰 서울옥션)
(높이 35cm 1.8억 낙찰 크리스티)
(높이 32cm 1.5억-)
(높이 30cm 서울옥션 1.5억-)
(높이 31cm 서울옥션 1.2억-)
(높이 42cm 서울옥션1.2억-)
(높이33.5+몸통32cm 8000만원-)
(높이34.2cm 7000만원-)
(높이26cm 7000만원-)
(높이 25cm 6500만원 낙찰 k옥션)
(높이31cm 6500-)
(높이33cm,6100낙찰,마이 아트 옥션)
(높이34cm ,6000만원-)
(높이28cm,입지름15+굽12cm,5500낙찰 아이 옥션)
(33.5cm,4200만원-)
(높이25cm 4000만원 낙찰)
(높이 32cm,4000만원-)
(높이32+몸통32cm 서울옥션 3550만원 낙찰)
(높이 34.5cm 3000만원-)
(고구마항아리로 불리는 19세기 백자 항아리,높이35cm.300만원- 옥션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