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생명의 계절이라잖아요."새댁이 창밖을 보며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감나무 잎이 진초록으로 반짝이고, 들판엔 곡식들이 제 키를 키워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생명이 찾아와야 할텐데."남편이 대답했다. “때가 되면 찾아 올거야.” 결혼한 지 세 해가 되어, 귀농한 젊은 부부를 어른들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손에는 작은 플라스틱 상자가 들려 있었다."얘야, 이거 누에 고추씨다. 아랫목에 좀 놓아두렴.""네...? 이게 뭐예요?""누에. 며칠 지나면 살아서 꿈틀거릴 거다. 잘 키워서 고치 만들면 큰 돈이 된다."며칠 뒤, 상자 안에서 정말 눈썹보다 가는 누에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얘들아... 정말 이제 시작이네."시어머니가 누에를 위해 지은 창고형 잠사에 새댁은 매일같이 나가야 했다."아침저녁으로 뽕잎 주고, 낮에는 뽕따러 가자. 애들이 하루 종일 먹기 바쁘다.""예... 알겠어요."남편도, 시아버지도 뽕잎 따는 일에 동원되었다. 시어머니는 매일 뽕보따리를 이고 들어왔고, 새댁은 하루 종일 체반을 갈고 똥을 치우며 누에를 돌봤다."이게 그냥 돕는 수준이 아니네요...""그렇지. 다 같이 매달려야 해. 얘들은 눈 깜짝할 새 다 먹어치워."새댁은 처음엔 짜증이 났다.'논밭일도 버거운데, 누에까지 사람 잡네...'먹이는 하루에 두 번, 배설물도 수시로 치워야 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정신이 없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사각… 사각…"소나기 지나가는 듯한, 파도치는 듯한 그 소리. 여린 누에가 아주 작은 턱으로 열심히 뽕잎을 먹어치우는 소리였다. “사각 사각”그 소리를 들으며 새댁은 생각했다.‘얘네는...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그날 이후, 누에들의 열정이 새댁의 마음속에도 들어왔다."굶길 수가 없어요. 오늘도 뽕잎 보따리 가져와야겠어요."그렇게 새댁은 아침엔 그 생각으로 눈을 떴고, 밤엔 뽕잎 자르다 잠이 들었다.시간이 흘러 누에들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먹지도 않았다. 노란색으로 변한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가만히 있었다."이게 왜 이러지요, 어머니?"“5령의 누에로 자라서 그런거야” “알에서 께어나면 1령, 한 달 동안 다 자란 성체가 5령이라고 한단다”"이제 고치 만들려고 더 이상 먹지 않는단다. 속에 실크가 가득 든 거야."“보통 누에 한 마리에는 1kg의 실크가 들어있다고 하지” 시어머니가 짚으로 만든 섶을 가져와 고치 만들 공간을 마련했다. 누에를 하나씩 올려놓자, 누에들이 입으로 실을 뽑아 자기 몸을 두루기 시작했다.하루, 이틀. 말없이 자기 몸을 비단실로 감싸며 고요히 고치 속으로 들어갔다."정부에서 수매한다더라. 값도 좋다는구나.""정말요?""응. 이번 돈으로 뽕나무밭 하나 더 사자."시어머니 얼굴에 처음으로 여유 같은 것이 비쳤다. 그리고 고치보따리는 농협에서 수매가 이루어졌다. 남편이 수십 개의 누에 고추보따리를 조합에 팔고 돈을 챙겨왔다. 시어머니가 목돈을 나눠주며 “수고들 많았다. 너희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며칠 뒤, 남은 고치 몇 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어머, 저거... 나오려는 건가 봐요."새댁은 눈을 떼지 못했다. 고치가 갈라지고, 작고 얇은 날개를 가진 나방이 조심스럽게 나왔다."우와… 날개가 이렇게 나오는구나. 주름 많은 번데기가 나방이 되다니"나방은 유리창에 몇 번 부딪히더니, 무거운 몸을 새댁의 손 위에 내려놓았다. 새댁은 조심스럽게 채반에 다시 올려 놓았다. 몇 마리의 나방이 서로 교미를 했다. 몇 일 후엔 알을 낳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새댁은 속삭였다."너희 덕분에 알았어. 세상에서 너희들만큼 식성이 좋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애들은 없을 거야." “생명체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압축해서 너희가 잘 보여 주었어” 잠사 일에 바쁘게 매달리다 보니, 남편도 일에 재미를 붙였고, 누에고추를 한 마음으로 키우는 사이에 가족들의 웃음이 커져갔다. 새댁은 한동안 누에들이 뽕잎을 먹는 사각 사각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남편도 “사각! 사각! 진수성찬을 먹는 소리”라고 했다.
첫댓글 우와~ 대단합니다! 이야기가 정말 재밌네요!
책장이 저절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멋진 하루 되셔용~!!
감사합니다. 멋진 응원의 말씀을 남기셨군요.
아직은 스켓치로 쓰고있습니다.
이 글들을 마음에 담고 삭히다 보면
단편소설이 되는 날이 있겠죠.
곰님의 칭찬에 힘을 내봅니다.
훗날 꼭 책으로 묶어 보내드릴께요.
곰님은 최고의 독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