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과학자들을 기리는 조각상 ⓒJi-Elle
왼쪽부터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독일의 세 지질학자 베르너, 폰 부흐, 훔볼트. 1538년에 설립된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연구지향성이 강한 대학으로 1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베르너의 논문 <광물의 외부 특징에 대해> 1774년 초판
광물학 발전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저작중 하나. 체계적으로 광물학을 기술한 최초의 시도였다. 도구 없이 표본을 정확하게 식별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색상, 광택, 형태, 줄무늬, 경도 및 비중 등의 모든 외부 특성들을 정확하게 정의했다.
*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
Abraham Gottlob Werner 1749-1817
지질학자이자 광물학자. '지구 전체가 완전히 보편 대양에 잠겼던 때가 있었고, 모든 암석이 물에서 퇴적되어 만들어졌다'는 수성론(Neptunism)을 주장했다. 화성론을 주장한 제임스 허튼과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성경 속 홍수(노아의 방주) 기록과도 일치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기에 수성론이 18세기까지 학계 주류의 입장이었다. 열정적인 교수였던 그는 훔볼트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양성했다.
제임스 허턴 James Hutton 1726~1797
영국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허턴은 창조론, 수성론이 주류였던 학계에 화성론(plutonism or vulcanism)을 던졌다. 화성론은 물체가 가열되면 팽창하듯 지각 하부에서 가열된 암석이 융기되어 균열을 만들며 이곳을 통해 마그마가 뿜어져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는 열에 의해 상승한 지층이 비바람에 침식되고, 침식·퇴적된 물질이 다시 열에 의해 굳어지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여러 층의 암석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조산운동의 기초적 개념을 제시하는 동시에 화산을 비롯한 화성 활동의 중요성을 최초로 제기한 주장이었다.
스코틀랜드 시카포인트(Siccar Point)의 부정합 구조 ⓒLysippos
허턴은 현재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과거 자연계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다는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도 주장했다.
1788년, 그는 스코틀랜드 시카포인트에서 침식·퇴적·융기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시카포인트 부정합은 퇴적층이 거의 수직으로 융기했다가 다시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후 다시 융기함으로써 형성된 대표적인 부정합 구조다. 이러한 부정합 지층에서 인간의 관찰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한 세월을 감지한 허턴은 당시 지표의 변화 속도를 대입했을 때 지구의 나이가 까마득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추정했다.
당시 학자들은 성경을 기반으로 지구의 나이를 6천 년으로 계산했고,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허턴의 주장에는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의 사상은 스코틀랜드 앵거스에서 태어난 찰스 라이엘에 의해 사후 계승되어 지질학 연구의 기본원리로 정립되었다.
침보라소 봉우리 앞에 있는 훔볼트와 봉플랑 (1810)
* 알렉산더 폰 훔볼트
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지리학자, 자연과학자.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훔볼트 해류, 훔볼트 펭귄 등 그의 이름은 행정구역, 학교, 동물, 식물, 광물 등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779년, 훔볼트는 프랑스 식물학자 봉플랑과 함께 남아메리카로 탐사를 떠났는데 그의 남미 탐험은 약탈과 식민지배를 위한 지도제작 목적이 아닌, 거의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위한 탐험이었다.
그는 최첨단 과학측정기구들을 짊어지고, 사람 발자취가 닿지 않는 깊숙한 열대밀림까지 탐사했다. 1802년, 당시 최고봉으로 알려졌던 에콰도르의 화산 침보라소(Chimborazo 해발 6,300m)를 5,600m까지 등반하고 실측했는데, 이때 경험으로 고산병에 대한 기록을 최초로 남기기도 했다.
훔볼트는 이전까지 서로 독립적으로 여겨져 왔던 동식물의 분포와 위도, 경도, 기후 등 지리적 요인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근대 지리학의 대작인 『코스모스』 (Kosmos)를 썼다. 그리고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소와 기상학 연구소를 세우는 등 지리학 외에도 동식물, 천문, 기후, 광물, 해양 등의 분야에 다양한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자연 그림(Naturgemälde, 나투어게멜데)
- 훔볼트의 침보라소 맵(최초의 인포그래픽)
"기후는 생명의 구성원리로서, 상이한 고도 및 위도에서 식물과 동물의 독특한 군집을 형성한다."
"자연은 죽은 집합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전체이다."
훔볼트는 침보라소와 다른 산에서 발견한 것들을 집대성하여 방대한 그림책으로 출간했다. 침보라소 단면도에 상이한 식생대를 표시하고, 좌우의 여백에 고도, 기온, 습도의 측정치 등을 서로 연관지어 정리했다. 지구온난화 분석에 주로 사용되는 이 그림은 실제로는 다른 화산인 안티사나의 식생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침보라소 맵의 디테일
괴테, 쉴러와 함께 있는 훔볼트 형제 (1794)
왼쪽부터 프리드리히 쉴러, 빌헬름 폰 훔볼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요한 볼프강 괴테. 빌헬름 폰 훔볼트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친형으로 독일의 정치가, 교육가, 언어학자로 유명하다.
"훔볼트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깨달은 것이, 나 혼자 몇 년 동안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찰스 다윈
바다에서 바라본 마데이라, 카보지랑(Cabo Girão).
- 라이엘의 스케치 (1853)
* 찰스 라이엘
Charles Lyell 1797-1875
영국의 지질학자. 1830년~1833년에 걸쳐 3권으로 출판한 <지질학의 원리>는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이엘은 여기서 허턴의 '동일과정설' 이론을 단호히 확립하고, 세계가 독특한 재앙과 초자연적 사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작고 지속적인 지질학적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원리』 .
표지 그림 속 기둥은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 있는 서기 2세기 로마 세라피스 신전의 유적이다. 베수비오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포추올리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으로, 세 기둥은 1750년에 해안가에서 발굴되었다.
1828년 이탈리아 탐사여행을 간 라이엘은 신전 기둥들의 중단부, 구멍이 뚫려 있는 검은띠를 보고 전율했다. 나폴리만 전역에서 발견되는 리토파가 조개(그리스어로 '돌을 먹는 자'라는 뜻)'들이 뚫어 놓은 구멍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상에 세워졌던 신전이 오랫동안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이에 세라피스 신전은 지질학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고 런던 지질학회가 수여하는 라이엘 메달에는 그의 초상화와 함께 이 신전이 새겨졌다.
1820년 12월, 베수비오 화산폭발
괴테가 1786년부터 1788년 5월까지의 여행을 기록한 『이탈리아 기행』에는 그의 광물과 지질에 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여행한 곳의 지형과 암석, 대기의 분위기 등을 관찰하고 기록했던 괴테는 베수비오 화산을 네 번이나 등반하기도 했다.
* 괴테의 일기 (1787년 3월 20일 )
- 나폴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또다시 용암이 분출해 오타야노(베수비오 산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 쪽으로 흘러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베수비오 화산을 세번째로 등정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는 원추형의 분화구 아래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증기 속으로 용감하게 전진해 들어갔다. 그런 뒤에 증기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통과하자 마침내 푸른 하늘 아래 용암이 거친 증기 구름 사이로 꿈틀대며 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수천번 들어온 광경이라도 그 고유한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그 모습을 직접 보는 길 밖에 없다. 용암은 기껏해야 열자를 넘지 못할 정도로 폭이 좁았다. 그러나 완만하고 비교적 평탄한 지면으로 흘러내리는 용암의 모습만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티에라델푸에고 제도, 원주민의 환호를 받고 있는 비글호
1831년 비글호 탐사를 떠나기 전,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는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한 22살의 찰스 다윈에게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 1권을 선물한다. 다윈은 5년간의 항해동안 이 책을 탐독하며 비글호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리는 동안, 육지의 지질을 조사하고 자연물을 수집하며 보냈다.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사이의 여러 섬을 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을 세밀하게 관찰한 다윈은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된다. 라이엘의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종의 기원』 초판 (1859)
초판 1250부가 첫날 모두 팔렸고, 1872년까지 여섯 개 판본을 내놓았다. 현재와 비교하면 200만부 정도의 판매량으로 동시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 진화론을 반대했던 피츠로이 선장은 자살하고 만다.
베수비오 화산 (Mount Vesuvius) ⓒPastorius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의 성층화산으로 현재까지 활동하는 활화산. 1944년 분출을 끝으로 현재는 분출을 멈춘 상태이다. 청동기 시대의 인간 발자국을 남긴 아벨리노 분출, 로마 제국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파괴한 79년 분출이 유명하다.
이구아수 폭포 (Cataratas del Iguazú), 아르헨티나 측에서 헬기로 본 모습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경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포(유네스코 세계유산). 1억 2천만년 전, 외핵에서 수퍼플룸(super plume)이 올라와 곤드와나 대륙의 남미와 아프리카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때 남미쪽에 남은 흔적이 바로 이구아수 폭포다.
이구아수 폭포 상류 파라나 고원은 현무암 용암대지로 단층운동이 일어나는데 단층으로 인한 고도 급변 지점에 폭포가 형성된 것. 이러한 지형적 특성과 엄청난 유량때문에 폭포는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고 있다. 약한 부분이 쉽게 침식되면서 폭포가 점차 상류 쪽으로 이동하는 두부침식(혹은 역행침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100년간 약 30㎝씩 상류 방향으로 후퇴하고 있다.
베게너의 판게아부터 현재까지 대륙의 이동
화이트샌즈 국립공원 (White Sands National Park)
미국 뉴멕시코주 남쪽, 세계에서 가장 큰 석고모래 들판. 서울시 면적보다 더 넓다. 원래 얕은 바다였다가 융기하여 고원지대가 되었고, 다시 가라 앉아 분지가 되었다. 분지에 형성됐던 호수가 증발하고 물속에 녹아 있던 석고가 풍화작용으로 모래같이 작아지면서 흰 석고모래 언덕이 생겼다. 사실상 모래와는 전혀 무관하다.
석고모래의 확대사진 ⓒMark A. Wilson
지리산
한반도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는 편마암은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기반암의 연대는 19억년 전이다. 지리산, 오대산과 같은 흙산에는 이때의 암석이 많다. 지리산 일대의 편마암은 20억~18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땅 가운데 하나인 영남지괴의 일부이다.
지리산의 산세는 북한산이나 설악산 등과 같은 화강암 산지의 산세와 확연히 구분되는 육산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편마암 때문이다. 편마암은 수평적으로 매우 치밀하고 단단한 구조라 수분이 쉽게 침투하지 못한다. 침식과 풍화 작용이 활발하지 못해 다양한 암석 경관을 찾아볼 수 없다.
이 편마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표층에서 수평으로 고르게 침식과 풍화를 받으면 산지 전 사면에 일정한 두께의 피복물이 쌓인다. 그 결과로 기반암이 적게 노출되어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평탄한 느낌의 육산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지리산 일대는 식생이 안착하기 쉽고 그 밀도와 영속성이 높아 울창한 삼림지대가 될 수 있었다. (출처: NGII)
북한산
중생대 이전 한반도는 단일한 땅덩어리가 아니었다. 중생대 초에 북으로 이동하던 남중한판과 북중한판이 충돌하며 현재의 한반도가 형성됐다. 이 시기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규모 교란 운동(송림조산운동)이 일어났다.
중생대 중기,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어, 해양판이 대륙판 밑으로 파고드는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이때 땅속 깊은 곳에서 화강암이 광역 생성되었다(대보 조산 운동). 북한산, 금강산은 이때 생성된 화강암 위를 덮고 있던 편마암이 오랜 시간 깎여 나가면서 드러난 것이다. (출처: NGII)
한반도의 대표암석 ⓒNGII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암석은 대이작도 편마암으로 25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
한반도 특이암석 분포지 ⓒNGII
한반도 지질사 ⓒNG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