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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투자와 시간을 할애하신 부분은 아무래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일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여기저기 몸이 아프면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집니다.가장 기본적인 것,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다 보니 만사 귀찮아집니다.
육체가 시들시들해지다 보니,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병들어갑니다. 점점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점점 소멸되어가니, 그것을 견디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분의 하루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처럼 희망하라>
복음: 마르코 6,53-56
어렸을 때 들었던 뉴스인데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버스 추락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남편이 며칠 뒤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여인이 없으면 못 살겠다는 순정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잃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과 욕망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병이 치유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하지 않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포기가 빠릅니다. 아이가 엄마 옷자락을 잡고 이것저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것은 사 주고 저것은 사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금방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희망하는 대상이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못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희망은 바라기도 잘하지만,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곧 포기하고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그렇게 큰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영조와 신하들의 등쌀 밑에서 자랐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놀리기까지 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정조의 숙원사업인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이 짓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조의 노력을 싫어했던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력을 몰아낼까 궁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것이 천주교입니다. 정조가 키운 남인과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엮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배교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정조는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절망할 수도 있는 정약용은 계속 살길을 모색하지만, 이번엔 더 큰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작 그는 배교했음에도 그의 가문은 벼슬길이 막히는 폐족이 되고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좌절했을까요? 그는 18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는 엄청난 책들을 씁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이룬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무려 500여 권에 달합니다. 약 2주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입니다.
그가 온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썼기에 복숭아뼈가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앉아서는 책을 쓸 수 없어서 일어서서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문에 폐족이 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희망하며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늦게나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항복하겠다고 고려의 세자가 황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40년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황제에게 노쇠한 임금의 아들이 대신 간 것입니다. 이때 몽골의 황제는 죽고 두 인물이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세자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앞으로 황제가 될 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황제가 되는 중요한 입지를 주는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도 이것을 이용해 고려는 원나라의 변발과 같은 것을 따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항복하는 중에도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희망해야 할 것은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희망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갖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줄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제로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는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30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첫째 딸을 얻었을 때, 다른 친구들에게 얼마나 딸 자랑을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쁘지 않냐고, 너무 똘망똘망하지 않냐면서 웃으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었지요.
“정말, 딸 바보다.”
30년이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이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30년에 우리에게 보여줬던 딸 바보의 모습이 생각나서 물었습니다.
“그 예쁘고, 똘망똘망한 따님은 잘 계신가?”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웬수 때문에 내가 환장하겠다.”
관점이 바뀌면 인간을 보는 눈도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다 아름답고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투고 나면 어떨까요? 그렇게 아름답지도 또 멋지지도 않습니다. 나의 원수로만 보입니다.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로 사랑이라는 감각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멋지게 보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관점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왔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옷자락 술은 예부터 유다인들이 몸에 착용한 ‘성구갑’과 건물 문설주에 붙이는 ‘메주자’와 더불어 일상에 녹아 있는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이제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자~ 이제 내 옷자락 술에 손을 대어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려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만이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기를 낮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에머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창세 1,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와 작은 빛물체로
우리의 낮과 밤을 다스리시네.
그리고
별들을 만드시어
어둠 속에서도
그 영광이 빛나도록
우리 앞에
모범으로 세워놓으셨으니
그 별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별이고
모세와 다윗의 별이며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별이고
에제키엘과 다니엘의 별이며
사도들의 별이고
성 프란치스코와 성 베네딕토
그 밖의 모든 성인성녀들의 별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교회는 구원을 위한 발걸음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크고 화려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되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현세대와 지나간 역사의 세대가 하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
어제와 오늘이 만나고
오늘과 내일이 또 만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그리고 제 삶 속에서 만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는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손을 댄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은 절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또 다른 형태의 특혜이고 선물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10.월.'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사람의 출발지는
분명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웃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고
사람은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파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치유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픈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사람들의
도움이
우리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서로를
치유하길
바라십니다.
치유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아픔을 모르는
치유가 없고
고통을 모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에는
인격의 여정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아픔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실을
하느님께
진실로
맡기는 것입니다.
전부를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사람의
오늘이란
하느님께
내맡기는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내맡김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