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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사랑이야기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노래 「이별의 노래」 김성태 작곡, 박목월 작사 김청자 노래 백남옥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로 이땅의 아이들에게 동심을 키워준 동요시인 박영종, 그리고 청록파의 3가(歌)시인으로 가장 많은 명편의 시들을 써냈으며 당시에 문학지가 없고 더구나 시전문지가 없어 후배 시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재산가도 엄두를 못내는 시절에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토록 30년을 이어오도록 큰 몫을 해낸 시인 박목월(1916.1.6~1978.3.24)에게도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6.25 전쟁 중 대구로 피난 내려가 있던 1953년 봄. 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문학소녀 자매를 교회에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매 중에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는데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서울로 이사 올 무렵에 언니가 결혼을 했다. 서울 E여대 국문과 학생이던 동생 H가 목월에게 뜨겁게 다가섰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 소녀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어린 애절한 시선으로 거의 매일같이 목월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이형기의『박목월 평전』) 초봄부터 그들은 서울의 밤거리를 자주 함께 거닐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때 39살이었던 목월에게 자책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목월은 가까이 지내는 시인을 불러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에 있는 ‘문예싸롱’ 다방으로 나온 그 여학생은 설득을 하려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막무가내였다. 1954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H와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했다.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 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를 찾아간다. 목월의 부인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보퉁이에는 목월과 여학생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생활비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H는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끝내 목월은 H와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창되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그 H를 두고 지은 것이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詩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습니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 예는 가을 속으로... - 목월의 시세계(2003. 1월 중앙일보) 한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어 가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근배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뻐꾹새」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 효자동 종점 근처 가까운 하숙집 창에는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모든 것이 안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혹은 사람의 목숨도. 목월의 시 ‘뻐꾹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도 일찍 깨어 울던 그 시절에 쓴 것이다. ‘이별의 노래’도 이 여학생과의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 사연 있어 쓴 시는 더 깊고 아름답다. 이렇게 쓰여진 ‘이별의 노래’는 6연 24행의 긴 시이다. 그중에서 부분 부분을 발췌해서 새로운 노랫말이 만들어졌는데 노랫말로 바뀐 부분들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이들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과 이별의 아픔, 그 아픔을 해결하는 과정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냈으리라. 이들의 사랑을 놓고 우리가 윤리적이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을 사연들이 도리어 노래의 의미를 더 깊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 이상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산중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플라톤은 말했고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이다. 조국도 혁명도 종교도 가난도 배신도 모두 시 속에서는 사랑의 모습으로 꽃피워진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사랑에 빠지면 어떤 시를 낳는가를 우리는 박목월에게서 배운다. 목월은 '문장'지에 추천을 받을 때 평소 좋아하는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의 아호인 수자에서 나무목(木)자를 따고 소월(素月) 김정식에서 달월(月)자를 따서 木月이라고 지은 것이 본명 영종(泳鍾)을 누르고 그의 이름으로 굳혀져 있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중학 3학년 때 열여섯살 나이로 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 '통딱딱 통딱딱'이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경주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때 기차여행에서 만난 공주 처녀 유익순이 우연하게 직장 동료의 처제여서 불국사에서 다시 만나는 기연으로 혼 담이 싹터 결혼하게 된다.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고 아홉 식구의 가장이어야 했던 목월이 6.25 전쟁을 전후한 궁핍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왔는가를 1964년 시 '가정'에서 차마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된다. 여백의 미를 좋아한 박목월 시인의 눈물이 그 빈자리에 찰랑 거리는 듯 하다. 이 시의 클라이막스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얽힌 시인의 아가패적 비련을 알고 나면 더욱 이 시의 뜻이 애틋하고 아름다워 진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 에는 이별의 노래에 얽힌 사연이 실려있다. 주인공의 신분과 이름, 만난 계기나 시기는 고백하지 않았으나 그 여인에 대한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오월의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첫 대면을 하고 눈발이 내리던 거리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를 세 번째 해후한 날은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이 비친 맑은 날이었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인, 소복한 여인은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주길 박목월 시인에게 청했다. 병실에서 두 사람은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하며 이별의 노래를 조용히 읊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라는 표현은 낭만적인 것 같지만 그는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린 기분'이라고 당시의 비애를 표현했다. 시인 박목월의 본명은 박영종이다. 1916년 경남고성에서 출생했으나 부친이 전근하면서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2리로 이사했다. 그는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했는데 청록파 시인은 이 제목에서 유래한다. 빛나는 재질과 향토적인 서정으로 시의 형식과 내용에서 미학을 추구한 그는 시단에 금자탑을 세우고 1978년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산중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이 붙여진 것은 박목월 시인의 그 여인이 임종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이다. 박 시인이 대구에서 작곡가 김성태를 만난 것은 1952년 11월로 날씨가 싸늘한 늦가을 밤이었다. 당시 김성태씨는 해군정훈악대를 조직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박목월 시인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 온 길이었다. 두 사람이 어스름한 저녁 술집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가, 문득 박 시인이 새로 지은 시라면서 '이별의 노래'가 적힌 쪽지를 김씨에게 내밀었다. 그 시를 속으로 읽는 순간 김성태씨의 가슴에는 뭉클하는 감동이 솟구치면서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한 시상에 빨려들어갔다고 그는 말했다. 작곡가 김성태씨는 그 날 박 시인과 헤어져 여관에 돌아온 즉시 시의 감흥을 멜로디로 나타냈다. 오선지가 없어서 백지에 오선 줄을 긋고 악보를 그리면서 그 가곡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곡은 작곡 후 많은 성악가들이 다투어 독창회에서 불렀고, 특히 가을 독창회에서는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작곡가 김성태 선생은 1910년 11월 서울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합창단원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훗날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 후 홍난파, 현제명, 채동선 등에게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는 연전 졸업 후 도쿄 고등음악학교 (현 일본 국립음대) 작곡과에 유학했다. 그는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이다. 집안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음악공부를 반대해 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소망을 아는 부인이 부모 몰래 패물을 팔아서 준 돈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아내가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감사해 한다. 참고문헌;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1988) 한국문원' 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는 당시 여대생과의 6개월간에 걸친 사랑의 도피 끝에 제주 부두에서의 이별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는 요지이다. 홍혜경 노래 ㄱ.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을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ㄴ. 터져 나오라 애 슬픔 물결 위로 한 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끊이 사라져 나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ㄷ.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는 배 오! 설운 이별 임 보낸 바닷가를 넋없이 거닐면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 가곡 ‘떠나가는 배’ (작사 양중해, 작곡 변훈)의 주인공은 1978년 타계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라는 것과, 50년대 중반의 그와 한 여대생의 ‘제주 잠행’ 생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왔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 (77, 시인, 전국문화원연합 제주도지회장) 시인은 목월이 50년대 중반 잠시 제주에 머물 때 시와 술을 나눈 절친한 친구 사이. 양 시인은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왔으나 끝내 이별하게 됐으며, 제주 부두에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시로 옮긴 게 바로 ‘떠나가는 배’”라고 말했다. 양 시인은 지난해 7월 제주문화원에서 열린 한 문학강좌에서도 ‘떠나가는 배’에 대해 “목월의 아픈 이별을 담은 시”라고 거론한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목월이 당시 머물렀던, 지금은 사라진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 가족들에 따르면 목월은 한국전쟁 막바지에 제주에 왔으며 여대생(당시 홍익대 재학)과 함께 6∼7개월간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목월과 함께 온 여인의 성은 한씨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근처 서부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고, 몸이 아플 때는 목월이 직접 부축하거나 업고 갔다. 이 여인은 아주 깔끔해서 빨래가 잦은 편이었고, 식사도 여관에서 내주는 음식 대신 직접 지어 목월에게 내왔다. 또 아이들을 좋아해 과자와 과일을 자주 나눠줬고 튀김 등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여관에서도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늘 목월 곁에 앉아 경청하곤 했다. 여관집 아들 이창주 (64, 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그 여자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으며, 지금의 여느 탤런트보다도 예뻤고 몸도 호리호리했으나 자주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았다”고 기억했다. 또 “목월에게 ‘이름이 왜 목월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어느 날 밤 나무에 걸린 달이 너무 고와 ‘영종’이라는 이름 대신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목월과 여자가 이별할 무렵 여관에 있던 짐을 도둑맞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데 이 여인은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진첩만 찾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범인이 이미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린 후여서 몹시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짐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목사인 이 여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왔고, 가지 않겠다는 딸을 이틀 밤낮에 걸쳐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 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 나갔으며 여인과 목월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미뤄 우는 것 같기는 했는데, 우리 쪽으로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요. 아마도 정인(情人)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이씨는 “여관에 있는 동안 이런 정 저런 정 많이 들어 그때 무척 울었다”며 당시 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 선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눈물의 Fairy 흐릿한 봄날은 문득 맺은 인연의 달무리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나들이 온 눈물의 훼어리 (손아귀에 쏙 드는 하얗고 가벼운 손) 그도 나를 사랑했다. 옛날에, 흔들리는 나라꽃 한송이... 긴 목에 울음을 머금고 웃는 눈매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즉시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이던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다. 그동안 기록(잡지 ‘시인세계’ 등)에 따르면 목월과 이 여대생은 시인과 문학소녀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결국 제주도로 잠행했다. 그때 두 사람은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인품에 목월이 반성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나며, 이로써 목월에게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는 내용만 나와 있을뿐이다. 원문출처 [서울신문] 2004-04-21 '내마음의 노래' 편집 작곡가 김성태씨의 회고 작곡가 김성태씨는 <이별의 노래> 작곡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부산에서 대구의 박목월 시인을 만나러 갔다. 학(鶴)과 같은 박 시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여름이었다. 박 시인은 “기다리고 있었소”하고 그를 반가이 맞았다. 박 시인은 전할 것이 있다고 했다. <이별의 노래>였다. 예술은 감동이다. 김성태씨는 “그 시를 읽고 무척 감동했습니다”하고 그때의 감동을 되새겼다. 그는 그날 밤 곧 작곡에 착수했다. 그런데 희맑고 쓸쓸한 이 아름다운 가곡은 몹시 산문적(散文的)인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분지인 대구의 여름 더위는 살인적이다. 그는 여관방 모기장에 드러누워 떠오르는 악상(樂想)을 다듬어 갔다. “모기장 빛깔은 핑크였죠” 김씨는 쓴 웃음을 짓는다. 20년전 한 밤을 샌 여관방 모기장 빛깔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별의 노래>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이 가곡의 작곡 과정은 그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박목월씨는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김성태씨와 헤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에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오버랩 되어 이 시가 만들어졌죠”라고 시가 쓰여진 동기를 이야기 한다. 이런 배경 아래 작곡된 <이별의 노래>가 처음 연주, 발표된 곳은 부산이다. 김씨가 지휘하던 해군 군악대와 대학생들로 만들어진 합창단이 이 가곡을 연주, 합창했다. 그 시대 감정을 표상하는 것 같아선지 이 가곡은 금방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봉선화에서 무덤까지> (지철민-심상곤 공저, 무궁화사, 1973) 가사는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2절)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3절)로 이어진다. '아, 아-'로 시작되는 후렴구에서 그 차원이 좀 느껴지긴 했지만, 그때에는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의 사랑을 쓸쓸한 가을날에 추억하는 노래로 여겼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청록파 박목월 시인이 실제로 겪었던 자신의 사랑의 아픔을 담은 것이다. 그것도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녀까지 둔, 40을 바라보는 나이의 가장으로 자신을 지극히 사랑한 여대생과의 사랑이고, 이별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마무리가 부인의 현명한 대처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별의 노래>는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김성태와 헤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에 나의 개인적인 제험이 오버랩되어 이 시가 만들어졌죠" - 목월 -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박목월은 경주의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하고, 1938년에 유익순 여사와 결혼하였다. 1939년 목월은 <문장> 9월호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들어섰다. 1946년에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마흔을 넘기며 목월은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955년에 첫 시집 『산도화』를 내고, 1956년에는 홍익대 교수가 되어 자작시 해설서인 『보랏빛 소묘』도 발간하였다. 1959년에 한양대 교수,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을 지내며, 시집 『난․기타』를 출간했다. 이후 한국시인협회와 한국기독교문인협회의 회장, 시잡지 『심상』창간 등 문단 활동도 하였다. 목월은 마지막으로 H를 만나고 20여 년이 지난 뒤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63세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 사랑도 쓸쓸하게 마감하게 되었다. -출처 <목월의 시전집> 이남호 역음 민음사, 2003년 그러나, 목월은 30대 후반의 그 사랑을 잊지 못했다. 이별의 아픔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가을 깊고” “한낮이 끝나면” “사랑도 저물고”, “눈이 쌓인 밤에” ”홀로 울리라” 가슴을 태우면서, 사랑도 인생도 모두 떠나가는 것이라고 달관하듯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하고 반복해서 노래했다. 목월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기 얼마 전에, 늙은 그녀의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적었다. 방문(訪問)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방문했다. 이제 내개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는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 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은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應答)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팔푼쯤 잔에 차 있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 맙시다. - 1962. 3월 「현대문학」에 발표 「방문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 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중에서> 죽을 즈음에도 20여 년 전의 사랑은 식지 않았고, 사랑의 이별은 이승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픔으로 가슴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강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은 벌을 주고 싶게 된다. 그러나 벌을 받는다고 사랑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목월의 부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가 감싸 주었다. 본부인으로서의 참으로 쉽지 않은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평생을 못 잊어 하면서도 헤어진 것이다. 사랑은 어떤 사랑이든 위대한 것이다. <밤에 쓴 인생론> 우리의 결혼 생활은 순탄했습니다. 그다지 큰 풍파를 겪지 아니하고 순조롭게 살아 왔습니다... (중략)... 한번 남편이 30대 말기에 여성 문제로 나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남편이 감정적으로 한동안 설레지만 종국에는 가정으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 의지해서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 후 모든 물결이 잠들고 남편이 환한 얼굴로 돌아왔을때. 나는 새삼스럽게 가정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가 가정안에 바쳐온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마지막 시련을 참음으로써 이겨낸 것이라 믿습니다. 남편은 나의 머리요, 몸의 구주시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새기며, 그가 가정에서 멀어졌다하더라도 남편에 대한 나의 신뢰로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달갑게 받아 참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 (1929~1997)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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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 박목월 시인의 이야기는 많이 읽었는데 새로운 것도 있네요.
문협의 소식은 전혀 없고 선배님 옮긴글만 있으니 ... 이래가지구 전국을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을 내려야겠네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