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에서 악양까지는 장강 물줄기를 따라 260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그 중간에 우리에게도 ‘적벽대전(赤壁大戰)’으로 익숙한 적벽(赤壁)이 있다. G4번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한참 달려가자 장강의 한 지류에 있는 적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적벽으로 가는 입구에는 제갈량이 화공을 위해 동남풍을 불렀다는 배풍대(拜風臺)가 있었고 그 건물 뒤로는 제갈량이 쓴 전후 '출사표'가 중국의 전쟁영웅 악비(岳飛)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배풍대를 지난 다시 산굽이를 지나자 '적벽대전기념관'이 나왔다. 기념관에는 조금 조악스럽기는 했지만 삼국 당시의 정세나 문물 등을 잘 정비해 놓았다. 기념관을 지나 작은 숲길을 따라 올라가자 붉은 글씨로 '적벽'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높이 10여미터의 붉은 암벽이 보인다. 이 암벽을 감고 돌아 나가는 물살이 세서 조조의 군대는 배를 이을 수밖에 없었고, 제갈공명의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삼국시대 최고의 전쟁터 적벽
적벽대전은 나관중(罗贯中)의 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儀)에 나오는 관도대전(官渡大戰, 조조와 원소가 벌인 큰 전투) 및 이릉대전(夷陵大戰, 유비와 손권이 벌인 큰 전투)과 함께 3대 대전중의 하나인데, 이 3대 대전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멋진 전쟁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적벽대전을 꼽을 것이다.
삼국연의에 따르면 강북을 평정한 조조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침입했으나 수전에 익숙한 오의 정예 5만명과 유비의 5만명 합계 10만명의 오촉연합군에게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전한다. 적벽대전의 클라이맥스는 방통이 연환계를 써 조조의 배를 묶어두고,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게 하여 화공으로 조조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마지막으로 패퇴하던 조조가 화용도(華容道)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가 진실인지 아니면 허구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많은데, 나관중(약1330-1400)이 비록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삼국지연의를 저술 하긴 했지만 소설이 갖는 상상력과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소 부풀려 서술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예로 당시 위, 촉, 오 인구를 감안했을 때 조조군이 100만이었다는 것은 많이 과장된 것으로 적벽의 규모로 보나 당신 인구 분포를 감안했을 때 조조군이 오촉연합군 5만의 약 네 배정도인 20만정도였을 것이라는 것이고, 방통의 연환계나 화용도의 이야기는 저자가 극중 재미를 살리기 위해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적벽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위에는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周瑜)의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주유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원대한 구상과 뛰어난 지모를 가졌던 인물이었지만 평생 제갈량을 넘어서진 못했다. 그가 죽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듯 뱉은 말은 너무도 유명하여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既生瑜、何生亮” (하늘은 어찌 주유를 낳으시고, 또 다시 제갈량을 낳으셨단 말인가!)
영원한 이인자의 비애, 그러나 그는 그 이인자조차도 되어보지 못한 우리네 범부들의 애환을 알까?
적벽을 내려다 보고 있는 주유동상을 뒤로하고 그의 아내이자 친언니인 대교와 함께 오나라 2대 미녀로 칭송 받았던 소교(小喬)의 무덤이 있는 악양루로 향했다. 악양에 도착하니 어느 덧 저녁이다. 주선(酒仙) 이태백이 즐겨 마셨다는 검남춘(劍南春)을 안주로 하여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야경을 보러 동정호(洞庭湖)로 갔다. 동정호는 파양호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로 호북성과 호남성을 나누는 ‘호(湖)’가 바로 동정호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악양루(岳阳楼)로 갔다. 악양루 입구는 춘절(구정)을 맞이하여 악양루를 보러 온 관람객들로 만원이었고, 차가 많아서 주차할 곳을 마땅히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할 수없이 악양루 근처의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악양루로 들어갔다. 악양루는 자연경관이 중국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동정호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더욱 이름이 알려져 있다. 동정호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 잡은 악양루는 고대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곳이다.
악양루는 동오(東吳)의 명장 노숙(魯肅)이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볼 목적으로 세운 열군루(閱軍樓)를 716년 당나라 때 악주 태수 장열(張說)이 수리하여 다시 세우면서 악양루(岳陽樓)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악양루 역시 여러 전란을 거치며 파괴와 복원을 거듭했는데 현재의 악양루는 1880년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높이 20미터의 삼층 목조건물이다.
악양루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자 그 동안 중건한 악양루의 모습들을 작은 미니어처로 만들어 정원의 작은 호수 둘레에 세워놓았고, 그 주위에 수많은 문장가들이 쓴 악양루와 동정호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글들을 모아 비석에 새겨 세워놓은 것이 보였다.
악양루 2층에 오르자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가 새겨져 있었다. 악양루기 중 '먼저 천하의 걱정을 근심하고, 이후 천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라(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맨 마지막 구절은 지도자로서의 높은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실천하며 살았던 청백리 범중엄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지도자들에게 실천하며 살 것을 주문하는 실천강령이었다. 또한 이 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따르는 높은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를 강조했던 중국의 총리 주용기가 즐겨 사용하여 각광을 받기도 했다. 중국인들이 이 구절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춘절을 맞이하여 악양루를 찾는 관광객들 중 범중엄의 ‘악양루기’를 외우는 사람에 대해서는 입장료 80위안을 무료로 해주고 있었는데, 그 전체 문장이 결코 짧지 않아서인지 다 외우고 무료로 입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악양루 앞에서
악양루 3층에는 모택동이 쓴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가 세워져 있었다. 강남 삼대명루에는 각각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시인들이 한 명씩 있다. 중국인들은 이를 가리켜 “황학루의 시인은 최호(崔顥, 704-754)이고, 악양루의 시인은 두보(杜甫, 712~770)이며, 등왕각의 시인은 왕발(王勃, 647-674)이다”라고 한다. 두보는 비록 미관말직에 머물렀고 일생을 전란에 떠밀리어 유랑 생활로 떠돌았으나 왕성한 창작욕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두보는 59세에 병든 몸으로 한 척의 배 위에서 불우하게 생애를 마감했지만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애환을 시(詩)로 승화시켜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었다.
누각의 한 켠에 기대어 끝없이 넓은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자 1200여년전 이 자리에 서서 표류공주(漂流空舟)와 같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읇었을 노시인의 감회가 마음에 다가 온다.
▲ 악양루 3층에 있는 모택동이 쓴 두보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 / 두보(杜甫)
석문동정수(昔聞洞庭水) 오랜 전에 동정호에 대하여 들었건만
금상악양루(今上岳陽樓)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게 되었네.
오초동남탁(吳楚東南坼) 오와 초는 동쪽 남쪽 갈라 서 있고
곤건일야부(乾坤日夜浮) 하늘과 땅이 밤낮 물 위에 떠 있네.
친붕무일자(親朋無一字) 친한 친구에게조차 편지 한 장 없고
노병유고주(老病有孤舟) 늙어가며 가진 것은 외로운 배 한 척
융마관산북(戎馬關山北) 싸움터의 말이 아직 북쪽에 있어
빙헌체사류(憑軒涕泗流) 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네.
예전에 아름답기로 이름난 악양과 동정호가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현재의 하동군 악약면은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던 당나라의 소정방이 그 곳의 지리를 보고 “호남성의 악양과 닮았다”고 감탄한 이후 ‘악양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고 하며, 요즘에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의 동정호와 악양루에서 많은 전통문화행사가 열린단다.
악양루에서 내려와 차를 세워 논 곳으로 가는데 내 차주위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아서 어째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가보니 도둑놈들이 운전보조석 창문을 깨고 차 안에 있던 7년 된 컴퓨터와 여권이 들어 있는 내 가방과 핸드폰이 들어 있던 아내의 가방을 훔쳐갔다. 다행히 지갑은 들고 갔기에 현금이나 카드와 같은 귀중품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컴퓨터와 여권을 잃어 버려서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좋은 경찰관을 만나 복잡한 여권도난신고를 비교적 쉽게 처리한 후, 깨진 유리창을 고치고 나서 혹시라도 여권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그날 장사로 가려던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 더 악양에 머물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내 여권을 찾았다는 소식은 없었다. 비록 여권과 오래 된 내 친구 컴퓨터를 잃어 버렸지만 앞으로 차 안에는 아무것도 놓고 다니지 말라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長沙)로 향했다.

▲완전히 부셔진 통통이의 유리창
상강(湘江) 대교를 건너 장사시내로 들어섰다. 장사를 가로 지르는 상강은 호남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외자로 호남성을 표시할 때 상(湘)자를 쓴다. 호남은 중국에서도 인물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우선 주희(朱熹), 왕수인(王守仁), 왕부지(王夫之), 증국번(曾國藩) 등은 물론이고 중국 교육의 선구자 양창제(楊昌濟), 그리고 현재의 신중국을 세운 모택동(毛泽东), 류소기(刘少奇), 팽덕회(彭德懷), 주용기(朱鎔基) 등 수 많은 인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우리는 장사시내에 호텔을 정한 후 상강 한가운데 있는 귤자주(橘子洲)란 이름의 모래섬 위에 세워진 공원으로 갔다. 장사란 이름은 모래톱(沙洲•사주)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길이 5㎞, 폭 100m의 이 섬은 귤나무가 유명해 귤자주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철새들의 쉼터였던 모래섬은 현재 불세출의 혁명가인 모택동의 성지로 바뀌었다. 장사시는 2007년에 귤자주에 높이 32m, 길이 83m, 폭 41m의 청년 모택동의 초대형 흉상을 건립했다.

▲ 귤자주공원에 있는 모택동 흉상
귤자주공원에서 나와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악록서원(岳麓書院)이 있는 호남대학으로 갔다. 악록서원은 장사시 악록산의 청풍협(淸風峽) 아래에 있으며 북송(北宋)의 개보년(976년)에 지어졌다.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이곳에서 '성즉리설'(性卽理說, 성품이 곧 진리라는 학설)을 강학했으며, 양명학의 대가 왕수인(王守仁, 1472-1528)도 여기서 ‘심즉리설(心卽理說, 마음이 곧 진리라는 학설)’을 가르쳤다고 한다.
호남대학은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없어서 인상적이었으며, 정문을 들어서 한참 안쪽으로 가자 악록서원이 나왔다. 악록서원 입구의 양 기둥에는 ‘유초유재, 어사위성(惟楚有材,於斯爲盛, 초나라에 인재가 있어 이곳에서 번성하라)’ 는 대련(對聯)의 문구가 쓰여져 있어 이곳이 2000여년전 초나라 인재의 산실이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호남대학 경내에 있는 악록서원
서원의 대문을 들어서자 중국 철학의 향기가 물씬 뭍어 난다. 비전공자인 나도 그 향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하물며 중국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한 이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그 황홀감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이곳의 역사가 중국철학사라 할 만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토론하고, 저술하고, 강의했다고 한다. 대문을 지나 조금 더 걷자 강당(講堂)이 나왔는데 좌우에는 주희가 쓴 충(忠), 효(孝), 염(廉), 절(節) 네 글자가 고고한 자태로 학당을 지키고 있었으며, 정면 위에는 강희제가 쓴 '학달성천(學達性天, 배움으로 하늘의 성품에 이르다)’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 악록서원의 강당에 있는 강희제가 쓴 학달성천 편액
신중국을 세운 모택동 역시 공산주의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악록서원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하며, 특히 그는 이곳에서 초반기 정신적 스승이자 장인인 양창제를 만났다. 모택동을 시작으로 수많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선도자들이 악록서원의 철학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호남대학을 나와 다시 상강의 줄기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오늘은 철학과 문학은 물론이고 역사와 정치까지 섭렵하는 화려한 하루였다. 내일은 장사를 떠나 마지막 일정인 강서성의 성도인 남창에 있는 등왕각까지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