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시대의 서예개관과 서예가
唐(당)나라는 통일국가로서 약 300년의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 문화적 업적을 쌓으며 번영하였다. 주변의 여러 작은 국가들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문예와 과학을 발전시키는 등 국내와 국외로 그 세력을 떨쳤다. 중국역사에 존재하고 중국인 스스로 인정하는 통일과 분열의 규율은 어김없이 찾아와 결국 다섯 왕조와 十國(십국)으로 분열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唐(당)나라가 멸망하는 징조는 安史(안사)의 난에서부터 여러 지방의 반란, 唐僖宗(당희종)의 黃巢(황소)의 난(880)은 당나라가 멸망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부터의 중국역사는 50여년 동안 다섯 왕조와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五代十國(오대십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五代(오대)는 後粱(후량 907~923), 後唐(923~936), 後漢(947~951), 後周(951~960)로 洛陽(낙양)과 開封(개봉)을 번갈아가며 도읍으로 삼았던 국가이다.
五代十國(오대십국)의 서예는 대부분 唐(당)나라 시대의 유민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오대의 서예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가는 楊凝式(양응식)이다.
楊凝式(양응식 873~954)은 지금의 협서성 화음현 출신으로 字(자)를 景度(경도)라 하였다. 양응식은 隋(수)나라 시대부터 唐(당)나라 시대까지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매우 총명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문장력이 뛰어나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唐(당)나라 昭宗(소종 889~905)시대에 진사에 급제하여 秘書郞 直史館(비서랑 직사관)을 역임하였으며 五代(오대)의 다섯 왕조에서 禮部尙書(예부상서), 太子大傳(태자대전), 少傳少師(소전소사) 등의 관직에 올랐다.
唐(당)나라 후기의 해서는 初唐四大家(초당사대가)의 영향으로 고정된 법칙 속에 있었으며 행서는 왕희지의 테두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양응식의 해서는 법칙을 훌훌 털어버리고 독특한 필법과 결구로 새로운 書風(서풍)을 창조하였으며 개성이 있으며 풍취가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그의 行書(행서)는 狂草(광초)의 筆意(필의)와 結構(결구)를 첨가하여 왕희지 서풍에서 벗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그의 作品(작품)으로는 墨跡本(묵적본)으로 〈神仙起居法帖 신선기거법첩〉〈夏熱帖 하열첩〉등이 있으며 〈夏熱帖 하열첩〉을 行書(행서) 작품으로 북경의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神仙起居法帖 신선기거법첩〉는 草書(초서)작품으로 서기 948년에 쓴 작품이다. 神仙(신선)의 일상생활과 음식에 관한 내용으로 道敎(도교)의 중요한 비결을 오언십이구로 기록하였다. 현재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李煌(이황 937~978)은 南唐(남당)이 건국될 때 태어나 25세 때 남당의 왕권을 계승한 인물로 “李後主(이후주)”로 불린다. 이황의 字(자)는 重光(중광)이고 호는 鍾隱(종은)이라 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후 개명하여 煌(황)이라 하였다. 南唐(남당)이 宋(송)나라에 멸망하면서 포로가 되었고 宋(송)나라의 太平興國(태평흥국) 3년(978) 사약을 받았다. 그는 詩(시), 書(서), 畵(화)와 음악에 모두 뛰어났으며 詞(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李煌(이황)은 柳公權(유공권)의 서예를 배웠으며 필획이 가늘고 단단하여 굳세고 예리하나 수려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李煌(이황)은 書畵(서화)작품을 모으고 감상하기를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높은 안목과 뛰어난 문사로 훌륭한 평론을 하였다고 전한다.
李煌(이황)의 생평이나 문예에 관한 기록은 많으나 그의 作品(작품)은 매우 적게 전해지고 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趙幹(조간)의 그림인 〈江行初雪圖 강행초설도〉에 쓴 畵題(화제)만이 墨跡(묵적)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