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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 까닭 없는 사랑 . 등 )
*** 05:13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22:30 조명연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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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까닭 없는 사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사랑할 까닭에
매이지 않는
오직 늘
까닭 없는 사랑
사랑 못할 까닭에
매이지 않는
오직 늘
까닭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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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18 05:06
- 나의 정체성은?
오늘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것입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을 왜 사랑하고,
천벌을 받아 죽었으면 좋은 사람을 위해 왜 기도하냐고.
지금까지 이런 물음에 그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주로 대답해 왔습니다.
사실 원수가 있는 것보다 원수가 없는 것이 낫지요.
원수가 있다는 것은 나의 불행이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미워하는 나보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더 완전하고 성숙합니다.
그러니 나의 행복과 나의 완성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해온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만
오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왜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보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이라는 각도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왕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왕족의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답게 하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더 그러겠습니까?
원수는 미워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고 세리나 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 말씀하시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무척 경멸하는 존재였잖습니까?
이렇게 세리와 비교하면서 너희도 세리처럼 되겠냐고
오늘 주님께서는 도전하시며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일깨우시고,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녀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듯
선인과 악인 가리지 않는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오늘 주님 도전하시는데
그 도전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이라도 먹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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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4.06.18 06:27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으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을까요? 처음에 기계공으로 시작해 에디슨 회사의 기술 책임자에 올랐다가 나중에 자기 공장을 세운 것입니다. 만약 기계공으로 있을 때, ‘지겹다, 힘들다’라는 생각만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자기 일에 흥미를 갖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세계 제일의 자동차 생산 기업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초콜릿, 사탕 등을 좋아하지만, 저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제가 싫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사탕 나눠주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 아이들과 친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제가 사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다, 좋다”를 외치다 보니 사탕 나눠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일도 또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싫다, 싫다”라고만 한다면 자기 일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왜 이렇게 지루해. 신앙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어?” 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가장 쓸데없는 일을 하는 ‘어리석은 나’ 정도로만 여길 것입니다. 당연히 기쁨도 행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나를 바라보고, 삶 안에서 피곤하지도 또 힘들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율법을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내용을 확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뜻과 맞지 않아 반대하는 사람을 원수 취급합니다. 본인의 부정적인 마음이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며 ‘싫다, 싫다’라는 생각만 하니 원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이를 사랑해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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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죽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며, 죽음이 여기 있을 때는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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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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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라」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미처 사랑하지 못할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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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라
https://cafe.daum.net/rara63/bmQo/5254
raphael 24.06.18 07:42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라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아내가 될 수도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처를 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병이 되고 미움이 쌓여서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원수가 아니더라도 미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부터 벌렁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 사람과 저 사이에 사랑이 통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저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사로잡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원수든 친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들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형제요, 이웃입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미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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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머무르다
https://cafe.daum.net/rara63/bmQo/5255
raphael 24.06.18 07:44
반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홀로 머무르다 내덕동 주교좌성당 반영억 신부
이른 아침, 맑고 청아한 아름다운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뜨거운 오후에는 메타세콰이어 나무 숲을 거닐며 더위를 식히며 고마워했다. 걷다 보니 “스스로 일깨우는 자 되어라.” 는 플래카드가 눈에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캄캄한 밤에는 풀벌레 소리의 합창을 들으며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 매혹적인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찾으며 별처럼 빛나는 새날을 희망하였다. 휴식은 참으로 소중하다.
천주교회 수도자나 성직자는 의무적으로 ‘피정’(避靜)이라는 휴식을 갖도록 하고 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情念)의 줄임말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머무르며 수양하는 것이다. 이는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고요한 시간을 갖는 마음의 수행이다. 알폰스 성인은 이 휴식으로 초대하며 말한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홀로 머물러라,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스스로 일깨우는 자 되어서 잃었던 나를 찾고, 고삐 풀린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운 내일을 설계하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소중한 쉼이다. 우리는 바쁘면 바쁠수록 잠시 멈추고 쉬어야 한다. “우리는 불행이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는”(성 안또니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잎사귀는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킬 용기가 있는지 돌아본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동안거’(冬安居)라 하여 음력 시월 보름날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 날까지 승려들이 일정한 곳에 머물러 수행에 몰입한다. ‘하안거’(夏安居)는 승려들이 여름 장마철 동안 외출하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며 수행하는 일을 말한다. 출가하여 수행을 시작할 때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정 기간 기도하며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아주 귀하게 여겨왔다. 이렇듯 휴식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유흥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쉼이어야 한다. 시끄러운 외부의 소리 대신 자연의 소리를 듣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고요 속에 머물게 될 때 참 평화를 누리고 행복하게 된다. 휴식은 자신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의료공백의 장기화가 풀리지 않고 있다. 전공의들의 파업, 의료계의 ‘집단휴진’ 선언, 환자와 그 가족들의 불안과 두려움, 국회 개원과 상임위 배정에 대한 갈등, 북한의 오물 풍선 등등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야말로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할 때이다. 바깥 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홀로 있는 쉼을 통해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지금은 서로 뜻이 안 맞는다고, 서로의 주장이 틀렸다고 서로를 비난하고 힐책하고 싸울 때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돌아보며 새롭고 신선한 마음을 충전해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이 일한 것이고 큰일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건성으로 하지 말고 안으로 자신을 살피는 일은 꼭 챙겨야 한다. 자신을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한다면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 동안 일을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는 일은 양보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살핌으로써 어둠을 몰아내고 마음을 맑고 밝게 빛나게 해야 한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하고 마는”(로마7,19)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성찰해야 한다. 기쁨인가? 슬픔인가? 소중한 인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묵은 먼지를 닦아내야 하겠다.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의미를 채우는 삶으로 감사한 하루를 보내길 희망한다. 지금은 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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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기서 ‘하느님의 성전’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유품을 보관한 박물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뜻하는 것도 아닙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코린토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에게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우상숭배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신앙인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르는데, 에덴동산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동산이라고 표현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에덴가든’이라고 합니다. 동산과 가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산은 울타리가 없습니다. 가든은 울타리가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천주교회로 간다며 개신교 목회자들이 걱정한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은 그 원인으로 개신교회의 울타리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목회자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식었다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져서 신앙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울타리가 견고해야 세상 사람들이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었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 칼로 울타리를 쳤다고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수도자성소도 줄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도 현저히 줄고 있습니다. 박해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팬데믹 때문도 아닙니다. 사제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벗고, 기도 시간을 줄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이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수도복을 벗고 순명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의무와 직분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신앙인들이 울타리를 세우고 믿음의 횃불을 높이 든다면, 사제성소도 수도자성소도 늘어날 것입니다. 아합왕은 잘못했지만, 회개의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왕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의 울타리를 치웠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스스로 울타리를 치우곤 했습니다. 기도의 울타리, 나눔의 울타리, 섬김의 울타리를 치웠습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울타리를 치워서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울타리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울타리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울타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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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눈, 코, 입 다 달리고, 사지 멀쩡하고, 말하고 듣고, 웃고 우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언제나 천사처럼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상냥하고, 매일 같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만을 베푸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인가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앞에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신 분, 어떠한 위로도 사랑도 필요하지 않으신 분. 이라고 알고 있지요.
하느님과 같은 완전함의 모습, 그 모습을 오늘 독서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독서에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을 열심히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독서의 마지막에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오로는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은총을 받고, 또 받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바로 예수님께서 가난이라는 십자가로 그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은 그것을 짊어졌으며, 그 십자가로 인해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하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사람,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영광을 얻은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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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무엇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한 손에는 특별한 물건이 있습니다.
이것과 같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가격은 비쌉니다.
세상에 단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손에는 꾸준한 물건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함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시나요?
특별한 것? 꾸준한 것?
저는 꾸준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특별한 것도 언젠가는 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꾸준하기는 특별함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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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닮의 여정”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된다”
요즘 눈에 자주 띄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입니다. 누구나에 공통된 하늘 같은 하느님 안에 살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웬만한 책들은 도서실로 보내지만 감명깊었던,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들은 방에나 집무실에 보관합니다.
‘메르켈 리더십’이 그런책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무려 16년간 재임했던 분인데 퇴임후로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 사실도 참 놀랍고 멋집니다. 재임중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책, ‘메르켈 리더십’의 마지막 문장도 잊지 못합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 지 묻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이 사실이 메르켈을 대변하고 있다.’
알베르크 슈바이처가 쓴 바흐 전기에서 다음같은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슈바이처가 묻고 바흐가 대답합니다.
“어떻게 자기 예술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수 있습니까?”
“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다산의 삼근계三勤戒>
그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참 반듯한 천재의 특징은 “부지런한 천재, 노력하는 천재”임을 깨닫습니다. 상담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참으로 죄를 찾아보기 힘든 한결같이 성실한 분들도 간혹 만납니다. 이런 참 좋은 성인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의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있습니다.
감쪽같이 합법적으로 자행된 아합과 이제벨 합작품의 완전범죄와 같은 나봇의 살인에 대한 사실이 폭로되는 오늘의 제1독서 장면은 흡사 지옥의 심판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눈에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격적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심판이 참으로 단호하고 준열합니다.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져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아합에 이어 이제벨에 대한 천벌도 예고됩니다. 사가의 아합에 대한 평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엘리야의 선언에 회개한 아합에게 당장의 재앙은 보류되지만 그의 아들대에 가서는 에누리 없이 재앙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제1독서가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면, 오늘 복음은 천국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사명을 수행하며, 사랑하며 살기만으로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해도 더욱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더욱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뿐이기에 남는 기도문은 “주님,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하나 뿐일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친히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지금부터의 삶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단호한 결의와 선택으로 바로 지상천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답은 하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주님의 제6 대당명제인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사랑뿐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기도뿐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과 존중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와 박해자에게도 자기탓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사정이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의 악의 희생자일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참 많을 수 있습니다. 무지에 기인한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왜곡된 시선이나 생각으로 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아,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편협한 이기적 사랑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사(聖事)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결코 동호회원들이나 친목회원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있는 모든 존재가 살 권리가 있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이요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통절히 깨닫는 다면 전쟁의 악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난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물인생에 부여된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이런 평생숙제를 목전에 둔 우리들 도대체 죄지을 시간이, 세상 헛된 일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여기서 사랑의 완전함(perfectin)이란 대자대비하신 그분을 닮은 사랑의 너그러움(generosity), 온전함(wholeness)을 뜻합니다. 말그대로 둥근 마음, 둥근 삶의 둥근 사랑입니다. 어제 문화영성대학원 전례 강의 중인 원장수사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도 소개합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오늘로 종강입니다.”
“종강! 축하드립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1학기 강의였네요!”
마지막 강의 주제가 십자가라니 참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모두가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수렴되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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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계단을 올라가시어 우리를 덕의 최정점에 올려놓으셨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나씩 세어 봅시다.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첫 계단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가 당한 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 둘째 계단입니다. 셋째 계단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얼마나 향상 되었는지 확실히 아시겠지요? 따라서 그 상 또한 영광스럽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오감은 “출입구”입니다. 이 출입구를 통해 영혼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세계가 영혼에게로 다가옵니다. 영성의 대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의 힘은 자신의 선한 이익을 위하여 영혼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 영혼의 힘은 항상 무언가를 되돌려 줍니다. … 나는 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설령 악한 것을 만나더라도, 그들은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고, 악한 자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선한 일을 만나면 그들은 그 일이 자신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18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주 예수님, 당신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죽음과 어둠의 그늘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는 당신을 흠숭하며 애원하나이다. 오소서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오시어 어둠을 몰아내소서! 전쟁 · 불의 · 미움 · 폭력 · 속임수가 있는 곳에 빛을 비추어 주소서.
제가 빛이 되지 못해 이 세상이 더욱 어두워진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당신 앞에 제 안에 있는 모든 어둠과 죄, 당선을 모시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이제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의 마음이 빛으로 오시는 당신께 열려 있게 하소서 .
0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모든 민족과 나라를 비추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56)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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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5,48)
저는 완전한 사람도 아니며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또한 제가 부족하고 못난 아들이라는 사실도 압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듯이 제 삶에 피할 수 없는 원수가 생기고, 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다 보면, “원수를 사랑하여라.”(5,44)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영적 영웅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제게 그저 오늘의 복음 말씀 가운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라는 가르침은 너무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완전함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결함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이시고 용서이시듯 자녀인 우리도 사랑과 용서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권고의 말씀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저를 잘 아는 데, 사랑이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적하시고 나무라시는 것처럼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인사하고”(5,46) 관계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의 뜻을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저를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저를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나가지 못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저희 수도회 박도세 신부님은 “그렇게 살아야 함에도 그렇게 살지 않은 게 바로 죄”라고 하셨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확실히 죄인입니다.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은 죄, 용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않은 죄 말입니다. 물론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점은 원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원수이더라고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며 기도하지도 않은 제가 누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라는 하느님의 제한 없는 사랑의 햇살을 지금은 누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마음의 양산으로 그 사랑의 햇살을 가리고서 스스로 칙칙한 그늘 속에 살았다면, 이젠 양산을 내려놓고 그 사랑의 햇살을 쐬면서 사랑의 온기를 만끽하고 싶습니다. 비록 햇빛 알레르기를 갖고 있지만, 주님 제게 사랑을 주시기보다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간청할 뿐입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용되어 죽어가면서도 기도했던 사람들이 실천한 사랑을 저도 살 수 있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오 주님, 선한 의지의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의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고통의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러한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하는 자들이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될 때, 우리가 맺은 이러한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라벤스부룩’ 수용소의 벽에 쓰여 있는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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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복음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분이시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완전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의 완전함은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6,3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아합 임금과 같은 악인도, 자신을 낮추고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완전해져야 합니다.
완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원수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사랑과 용서는 자비하신 하느님과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또한 자비와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 미움과 원망 속에 휩싸인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은 자신에게 계속 상처를 냅니다. 그래서 다른 이에 대한 자비와 용서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 시작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마음이 완전히 풀렸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는 행위’는 ‘완전한 용서’를 향하여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 자비로운 마음에서 시도한 이 용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지배하던 분노를 녹이고, 연민과 사랑을 자아내며 마침내 완전한 용서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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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6985&menu=4770
박윤식 [big-llight] 04:31 ㅣNo.173423
■ 사랑의 끝자락엔 언제나 용서가 / (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고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이에게도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그분께서는 악인도 선인에게도 당신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도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만 사랑하겠느냐?”
열심히 일했는데도 윗분이 알아주지 않거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시부모님 반응이 시큰둥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인지상정으로 마음을 닫고플게 뻔하다. 그러나 마음을 여는 행위가 이해의 첫 단계이니 결코 닫아서는 안 된다. 이해를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말자. 이렇듯 이해는 작은 행위서 비롯된다. 마음을 열고 미소를 띠고서 다가가자. 사실 미움의 출발도 이 ‘하찮은 것’에서가 대부분이다. 상대를 잘 몰랐기에 생겨났단다. ‘알았다’ 하여도, 잘못 알았을 수도 있기에.
그러니 ‘새 출발’을 해야만 한다. 자, 지난날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랑하고 또 기도하라.’라고 하신다. 서운하고 섭섭해도 마음만은 닫지 말자. ‘그런 행동’이 쌓여 미움이 되기에. 그러므로 이해의 출발이 용서요, 이는 닫힌 마음을 여는 행위이다. ‘비워서 여는 순간’ 은총의 기운이 들어간다. 마음을 열면 이 잠재된 용서가 작동되게 될게다.
예수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사랑이요, 그를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낸 게 바로 원수사랑이다. 부부간에 흔한 말인 ‘이 원수’이다. 원수는 원한이 맺힌 이로 언젠가 외나무다리서 만나리라. 하지만 그런 이가 그다지 많지 않다. 한쪽은 원수라 여기도, 상대는 아니라 생각도 하기에. 쌍방 모두 원수로 여기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단다. 말만 원수였지 실은 미운 이였을 뿐. 미움을 털면 또 이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사실 자신이 받은 큰 상처와 피해가 여전히 고통 속에 지울 수 없게 남아있는데,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큰 미움이 없어야만 할 게다. 미움은 한순간 형성되는 건 아니다. 어떤 미움도 그렇게 되기에는 원인과 시간이 있었다. 가는 세월에서도 그 미움이 크게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 용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만큼이 아니면 그 반만이라도 있어야만 할 게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덤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단다. 이는 용서에 대한 무지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를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이를 사랑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랴! 그건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이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게다. 그렇지만 원수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핵심이면서, 가장 성숙한 열매이라나. 내가 비록 가까운 이도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할지언정, 이 사랑의 계명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면서,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닮아 갈 수 있어야만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사랑의 끝자락에 언제나 용서가 와 닿는다는 걸 명심하라. 그러니 무조건 지금의 미움을 우선 사랑하고 보자. 용서의 때는 반드시 온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그 무언가도 한 몫을 톡톡히 할 거니까. 원수 같은 그자들이 둘러싸도 증오와 보복이 아닌 용서의 길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그 길을 몸소 보이시려고 오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 제자답게 이 길만이, 참 행복의 길임을 믿으면서 당당히 걸어가야만 하리라. 그분께서 가셨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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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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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 표현을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없기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사랑은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미움도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계명은 보통 명령법 문장인데
미움을 해야할 의무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원수를 미워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은데
미워해야한다는 표현은
마치 우리가 심판자가 되어
상대방에게 미움이라는 벌을 줘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상대방을 미워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 사람 위에서 그를 심판하는 식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나와 같은 한 사람이며
나의 눈에는 그렇지 않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나에게 향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향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막을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하느님처럼 조건 없이 그 사랑을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과정 속에 있지
이미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과정이라는 것은
미워할 수 있음을 포함합니다.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기에
내 안에 올라오는 미움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미움의 감정이 인정될 때
오히려 미움의 감정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너 때문에'라는 표현은
우리가 여전히 상대방을 심판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화살을 상대방에게 돌리지 않고
그냥 단순히 내 감정을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한 과정으로 미움이 줄어들 때
우리도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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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수 사랑의 비결, 주님 현존 안에 지속적인 머뭄!
우리 한국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박해의 순간을 잘 넘기고 놀라운 순교의 영예를 누리게 된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고민과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비결은 인간의 힘에 있지 않고 주님 현존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 순간 주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그분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은 절대로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비결은 일상의 작은 기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대별로 이루어지는 아침저녁 기도, 삼종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충실하게 하는 것. 특히 틈틈이 수시로 바치는 묵주기도는 주님 현존 안에 살아가기 위한 더없이 좋은 도구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 일정을 촘촘하게 기도로 짜고 또 짤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그런 상태에서만이 순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요구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 44)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냥 맨정신으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묵주를 쥐고, 하루 온 종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 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오고 연장시키는 탁월한 도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영예로운 순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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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가 된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한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모실 수 있고, 참으로 누릴 수 있으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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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도하면 저절로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이유
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요? 기도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안 되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여인이 기도의 힘으로 무엇을 얻었는지를 말하며,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마쿨레 일리바기자의 『로사리오 기도: 나의 생명을 구한 기도』를 덴버 가톨릭(Denver Catholic)이라는 블로그에서 “감히 용서하라!”라는 제목으로 정리해서 쓴 글입니다.
임박한 죽음의 고통이 "천 개의 바늘처럼" 임마쿨레의 몸을 찔렀다.
그녀는 "어떻게 죽는 거지?" 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그녀가 다른 8명의 여성과 함께 숨어있던 3x4피트 크기의 화장실 밖에서, 그녀는 총과 마체테와 창을 든 남자들이 집을 수색하기 위해 다가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까?"
의심과 분노, 용서할 수 없는 그녀의 치열한 내적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 그랬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만약 내게 신의 힘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순식간에 모두 죽일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는 르완다의 두 주요 부족인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오랜 정치적,
민족적 긴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박한 비극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나왔는데, 성모 마리아는 1981년 키베호라는 작은 마을에서 슬픔의 성모라는 제목으로 세 소녀에게 나타나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바꾸고 하느님을 따르지 않으면 르완다에 피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투치족을 몰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계획된 종족 말살 사건은 1994년에 대통령의 헬리콥터가 격추된 후에 시작되었다. 투치족을 비인간화하기 위한 수년간의 마케팅 노력 끝에, 이제 그 메시지는 라디오에서 공개적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바퀴벌레를 끝장내라! 아이들을 잊지 마라. 나라를 깨끗이 해야 한다!"
투치족인 이마쿨레 일리바기자는 겨우 십대였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묵주를 주고
이웃집으로 보내 숨게 했다.
그 이웃은 반대 부족의 일원이었지만 정직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91일 동안 피에 굶주린 남자들이 대낮에 수천 명의 투치족을 학살하는 동안 나머지 8명과 함께 작은 화장실에 숨어 지냈다.
이마쿨레의 증오와 용서의 신앙적 갈등은 그녀가 숨어든 지 불과 며칠 만에 시작되었다.
발각될 가능성에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로 "문을 열어라, 고문을 끝내라! 어쨌든, 놈들은 널 죽일 거야." 그러나 다른 목소리가 그녀에게 "문을 열지 마라.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기회가 있다."
그때 그녀는 인생을 바꾸는 약속을 한다: "하느님, 저는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당신을 찾을 것입니다.
다시는 당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인지 집을 수색하던 남자들은 화장대 뒤에 잘 숨겨져 있는 화장실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를 도와주는 남자에게 성서를 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으로, 그는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성서를 주의 깊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순수한 사랑으로 자신을 창조하셨고
천국의 축복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하늘나라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 가려면 예수 말씀과 계명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천국의 영원성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나 이마쿨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따끔한 현실에 직면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용서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나는 내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느님은 내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셨다."라고 이마쿨레는 회상했다.
대신 그녀는 아빠가 준 묵주로 눈을 돌렸다. 기도하면서 그녀는 새로운 것, 즉 깊은 평화를
경험했다.
그녀는 이 평화를 꽉 붙잡았다.
그녀는 매일 총 27번의 묵주기도와 14번의 하느님 자비의 기도를 바쳤다.
이것만이 그녀가 분노와 절망의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 하느님의 온화한 손길이 다시 한번 용서로 그녀를 이끌었다.
성부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라는 구절이 너무 불안해서 아예 생략하기로 했다 — 적어도 하느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그녀는 다른 음성이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예수 자신도 이 기도를 바치셨고, 그분은 실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때 처음으로 항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제게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내게 주어라.'라고 하실 때 '좋아, 기도는 하겠지만, 아직도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하느님의 도움이 왔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의 싸움은 십자가 밑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라는 예수 말씀을 읽었을 때 끝이 났다. 이마쿨레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순간 저는 진정으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예수 예수님께서 제게 용서의 공식을
건네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하길, '너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그들에게 닥칠 결과를 측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처럼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게서 배워라!"
그녀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 증오의 편에 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야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월 만에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 은총에 의해서만 그녀는 부모, 형제, 사촌, 친구들을 포함하여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끔찍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임재는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몇 년 후 그녀는 르완다로 돌아와 자기 가족을 죽인 모든 사람을 직접 용서했다.
이마쿨레와 함께 키베호와 키갈리로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은 그녀가 기뻐하며 한 남자를 껴안고 돌아서서 "그의 오빠가 내 오빠를 죽였다."라고 말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용서하지 않음의 고통과 피해를 알고 있다."라고 말한 이마쿨레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니 간청하노니 감히 용서해 달라. 하느님을 붙잡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경을 읽고, 미사에 가고…. 용서에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감히 도전하라!"
[출처: ‘Dare to forgive: Immaculée Ilibagiza & radical reconciliation’, Denver Catholic]
기도는 성령을 받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받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면 점점 그것과 어긋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가장 큰 것이 미움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랑받는다고 믿는 이상 기도 안에서 미움은 성령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결국 하느님과 있는 행복을 택하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기를 택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스테파노 성인처럼, 모세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음이 믿어지고 더 행복해집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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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일인데, 사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편 가르기,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일,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 등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어떤 부상자를 고쳐 주신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당신의 계명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루카 22,49-51).”
칼을 뽑아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 사람은
베드로 사도이고(요한 18,10), ‘대사제의 종’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온 군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사용한 것인데, 상대방의 귀를 잘라버린 것은
아마도 칼이 빗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칼을 사용하는 것을
막으셨고, 그 다친 군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일은, 원수를 사랑하신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전혀 저항하지 않고 체포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 전체 군대보다 수가 더 많고,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속 사람들의 방식으로
일하셨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힘이 없어서
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약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어느 정도라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힘없는 약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의와 선이 짓밟히고, 인권이 탄압 당하고,
약자들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럴 때에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만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가?
그럴 때에는 공동체가(교회가) 나서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고, 정의와 선과 인권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어야 합니다.
4) 자기 자신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위치에만
놓고서, 그 계명은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 자신’이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고,
그 누군가는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는 그 어려운 일을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의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죄의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들(죄인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은 ‘바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다.” 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이웃을 향해서는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자비와 사랑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악인, 불의한 이’가 곧 ‘나’ 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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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8.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인 ‘원수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유래한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을 “원수를 사랑하라”는 더 큰 계명으로 ‘확장’시키십니다. 제가 ‘확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께서 말 그대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이웃’의 개념을 같은 민족,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좁은 범위로 한정해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게 당연한 이들, 즉 ‘원수’나 ‘죄인’ 같은 이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아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인습법이 되었지요. 즉 원수에 대한 증오를 합리화하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가려서 사랑하려 드는 그들의 좁은 마음에서 비롯된 잘못된 전통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웃’은 ‘호불호’라는 내 좁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일부’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만의 편협한 기준으로 이웃과 원수를 가르고 사랑에도 차별을 두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잡으시고자, 그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극단적인 권고를 내리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라면,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자녀라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차별과 차등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그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하고 약한 이들 중에 ‘사도’를 뽑으신 것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것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먼저 부르시는 것도 다 사랑을 ‘필요’라는 기준으로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 ‘먼저 사과해야 한다’는 조건을, ‘회개’라는 자격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을 본받아, 내 멋대로 ‘원수’라는 굴레를 씌운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는 처음부터 원수였던게 아닙니다. 그를 원수로 만든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마음이 이해와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편, 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부족하고 약한 피조물일 뿐이니,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상처 받는게 당연합니다. 또한 나말고 다른 이들도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을 ‘완벽’이라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빈틈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버거운 완벽이라는 굴레를 다른 이들에게 씌우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약함을 내 사랑과 자비로 채워줌으로써 함께 ‘참된 완성’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해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바치는 그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온전히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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