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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 (원종천 지음)
◆제1장 서론
교회 역사에 나타난 신앙의 전통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이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감성주의이다. 중세시대에 이성주의는 스콜라주의로 나타났고, 감성주의는 신비주의로 나타났다. 둘 다 장단점이 있는데 스콜라주의는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여 정리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그것이 지나쳐 신앙의 내용 모든 것을 이성과 논리로만 이해하려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신비주의는 감정과 체험을 중시하여 하나님을 신선하고 색다른 각도로 이해하게 함으로 스콜라주의의 문제를 보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부 신비주의는 영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확실한 구별을 하지 못하고 신과 인간의 본질적 혼합 형태가 나타나면서 문제가 초래되었다.
중세교회는 성경적으로 복음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고,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 구원론 이해의 혼란은 더욱 심화 되었는데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하여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으로 잘 정리되고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으로 더욱 건전하게 성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잘 형성되었던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그 다음 세대로 가면서 붕괴되어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먼저 이성주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개신교 스콜라주의 또는 정통주의라고 불린다. 17세기 경건주의는 이런 상황 가운데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신앙의 내면성과 신앙적 체험을 강조했고 성경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고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접근을 하여 성경이 우리의 심령과 삶에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경건주의도 부분적으로 지속되기는 했지만, 18-19세기를 거쳐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잃어갔고 신앙의 뼈대인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이 점점 무너지고 신앙의 내용을 인간의 감정과 체험으로만 판단하는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를 이루는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중세에도 건전한 신학과 풍부한 영성을 가지고 교회에 큰 도움을 주었던 한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이다. 12세기 전반에 활동한 버나드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형성되기 전 시대 사람으로 어거스틴의 전통을 이어간 마지막 교부라고 할 수 있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 성경의 진리가 피폐해진 중세교회에 어거스틴 전통에 입각한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회복시키어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동시에 그는 수도원주의와 신비주의를 건전하게 보급시킨 중세의 대표적 교회 지도자로 당대의 교회를 이끌며 정통신학을 고수하고 신비주의 수도원 영성을 보급했다.
◆제2장 신비주의 개념
"신비주의"는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이며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체험주의라는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비주의는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신비주의의 입장은 이성주의자가 우리를 사물의 본질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신비주의는 표상적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순수한 영적 이해를 통하여 절대자를 보려고 열망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과의 합일(연합)이 복음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현존의 직접적 의식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죄성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과 그리스도를 회피하여 하나님과 합일하는 내용이거나, 하나님 안에서 인간 정체성의 존재론적 상실로 여겨질 때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
중세 신비주의는 대체적으로 다이오니시안(Dionysian), 라틴(Latin), 게르만(German)등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다이오니시안 신비주의는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특징이다. 다이오니시우스는 감추어진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강조를 했다. 라틴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사랑, 의지, 실천적 경건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깊이 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키는 신비적 연합을 그 핵심으로 한다. 게르만 신비주의는 지성을 강조하고 명상과 하나님의 지적 환상을 강조했다. 신비적 연합에서는 그리스도보다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본질주의적이다. 성 버나드는 바로 이 라틴 신비주의의 대표자로 건전한 신비주의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제3장 중세 서방교회 신비주의 배경과 역사
4세기에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되어 박해가 종식된 후, 수도원 삶은 실질적인 순교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완전한 신앙고백으로 믿어졌다. 박해가 사라지면서 그리스도인의 수도원 삶이 순교를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원주의는 믿음의 수호를 위하여 문자 그대로 죽지 않는다면 금욕적 자기 부정을 통하여 자신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었다. 수도사들에 의하여 행해진 신비주의 명상은 완전한 자기 망각, 육신의 영적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수도원주의는 매우 단순한 기독교적 금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같이 자기들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각했다. 개인적 금욕주의가 공동체 성격으로 발전하여 최초로 형성된 베네딕트 수도원은 극심한 개인적 금욕주의를 적절하게 조정했다. 수도원주의가 발전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제도화된 기독교를 탈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313년 밀란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격상시키면서 기독교의 형편이 완전 달라졌는데 이것은 기독교에 편안함은 제공하였지만 동시에 정신적 긴장감과 신앙적 역동성은 사라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의 정신을 보존하는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중세12세기 버나드는 수도사가 되어 인간에게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키어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유럽 기독교회 초기부터 거의 800년 기간 동안 신비주의는 수도원적이었고, 금욕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존 카씨안, 성 어거스틴, 교황 그레고리 1세등을 들 수 있다. 존 카씨안은 모든 형상과 감각을 초월한 하나님을 제시하며 우리 기도는 어떤 형상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고, 수도원 삶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합일이었다.
카씨안, 어거스틴 그리고 그레고리 1세등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수도원주의, 금욕주의, 명상, 그리고 신비주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기초를 형성했다. 그레고리 1세 후에 베네딕트 수도원주의는 서방 유럽을 장악했다. 그러나 수도원은 교회와 더불어 9세기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서방기독교 제국에 대한 바이킹 족들의 공격은 제국과 교회를 황폐케 했다. 910년 클루니에서 새로운 베네딕트 수도원이 시작되면서 거의 3세기 동안 신앙적 삶을 지배하던 서방 수도원주의에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클루니 개혁운동은 힘을 잃어갔다. 개혁에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중세 유럽 기독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은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였다. 버나드의 기본 성향은 보수적이었다. 버나드는 철학, 신학, 윤리, 개인적 경건이 잘 융합되어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2세기 신비주의는 시스터시안 수도원 운동으로 말미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스터시안 수도원 설립자들은 세 가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시적인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기, 조직과 합리적인 기관의 추구, 적극적인 확장의 정신이었다. 비록 이것이 나중에 중세 사회의 현실과 충돌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분명하고 타협하지 않는 수도원의 이상도 이 수도원의 성공의 원인으로 보았다. 버나드는 당시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어떻게 버나드가 수도사와 신비주의자로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 수도사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영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세상에 그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었는가? 그것은 12세기 유럽이 거의 영적 가치에 의하여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수도사와 신비주의자로서 당시 영적 가치를 구현화하는 존재로서 나타났고, 그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통하여 그 이상과 가치들을 전개해 나아갈 수 있었기에 당대를 이끌어 나아가는 지도자로서 촉망를 받았던 것이다.
◆제4장 버나드의 인간론과 그리스도론
당대의 이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그의 신학을 통하여 그의 신비주의를 어떻게 표출하고 있는가? 신학의 중심 요소인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신비 체험, 실천론 등을 통하여 신학과 신앙적 체험이 융합된 버나드의 신비주의 사상을 이끌어 내어보자. 버나드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구별하여 보았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인간론에는 다행히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거스틴의 인간 타락을 전제로 하고 있는 버나드가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구원론적이고 신약적인 시각으로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을 볼 때 전체 구조에 있어서는 성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1)
교부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구별하는 버나드는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고 "하나님의 모양"은 완전히 상실했다고 가르친다. 버나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과 자유의 두 가지 개념으로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을 상실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인간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상실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은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1) 보존된 "하나님의 형상"
버나드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로 여겨지며 유지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유 선택"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는 "자유 선택"에서 "자유"의 의미를 의지와 연결시켜서 이해한다. "자유"는 의지와 연결되어 있고, "선택"은 이성과 관련이 있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버나드는 타락과는 상관없는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상실된 "하나님의 모양"
버나드가 말하는 상실된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인가? 첫째는 죄로부터의 자유가 상실된 것이다. 버나드는 "하나님의 모양"을 상실한 인간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둘째는 불행에서부터의 자유가 상실된 것이다. 이것은 죄와 불행의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불가피함으로부터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보존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불가피함으로부터의 자유"는 버나드의 구조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모양"의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버나드는 결론적으로, 원래 세 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 "불행(슬픔)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불가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분명히 할 것은 "불가피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연 영역에서 생각해야지 영적 영역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3) 자유선택
버나드는 인간에게 "자유 선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자유 선택"은 완전하지 못하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발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시사한다.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자연 영역이고 발휘할 수 없는 영역은 영적 영역이다. 자유선택이라는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 이 두 가지가 합하여 구원을 이룬다. 여기서 이 두 가지가 합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동일한 위치에서 구원을 위한 원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구원의 대상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구원을 일으키는 힘과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4) 신비적 체험의 인간론적 근거
버나드가 추구하는 신비주의와 그가 언급하는 명상가의 신비적 체험은 그의 인간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버나드는 인간이 상실한 "하나님의 모양"은 하늘나라에서 완전히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그 맛을 즐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명상의 시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성령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의하여 저 세상의 맛을 보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유를 저 세상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경험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버나드 신비 체험의 인간론적 배경이 된다.
2.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2)
1)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버나드는 그리스도와 인간 영혼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인간이 다 성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당연히 위대함과 의로움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형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과 그리스도 양자 간에는 의로움과 위대함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을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형상 그 자체와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차이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비록 의로움과 위대함이 공통적으로 부여된 것이기는 하나, 우선 분량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아가서 버나드는 분량과 아울러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버나드는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형상의 또 하나의 차이점을 말한다. 그것은 내용의 차이이다. 의로움과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하나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차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버나드는 먼저 인간이 하나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그 차이를 없애려고 갈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버나드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의 근원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지만 동시에 그분과의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분과 가까이 하려는 애절한 갈망이 바로 그것이다. 버나드는 인간이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서 의로움은 상실했으나 위대함은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하늘나라를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앙망한다고 생각한다.
2) 하나님의 모양
버나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이 그리스도와 유사한 것을 세 가지로 본다. 단순성, 불명성, 선택의 자유이다. 버나드는 "하나님의 모양"을 인간 본질의 자연적 단순성에서 발견한다. 이 단순성은 이간이 존재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버나드에 의하면 인간은 또 하나의 "하나님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불명성(영혼불멸성)이다. 이 불멸성도 그리스도와 유사하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참된 불멸은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멸은 모든 점에서 불변하시고 변화의 그림자도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불멸처럼 완전하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은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존재의 단순성과 생명의 불멸성이다. 단순성과 불멸성은 상실될 수 없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즉 버나드는 인간의 단순성과 불멸성은 자연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고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버나드는 자유 선택을 하나님을 닮은 또 하나의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 선택은 선과 악, 삶과 죽음, 빛과 암흑 등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말하는 것으로, 자유의지에 의하여 실행된다. 버나드는 자유 선택에서 인간의 공로를 유추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 선과 악을 가리고 어떤 일을 하고 하지 않는 등의 모든 일들은 공로로 돌려진다. 버나드에게 이 자유 선택이란 결국 이성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런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지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에 의한 지배가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의한 지배였다. 즉 의지는 의지 자신을 노예화 한 것이다. 의지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단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때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버나드는 이것이 자연의 상태를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이 자연 상태의 자유이다. 그러나 영적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이상하게도 자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방법으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 자유하다. 자유가 있는 만큼 죄책이 있고, 죄책이 있는 만큼 노예가 되어 있고, 그러므로 자유가 있는 만큼 노예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3) 인간의 죄성
그는 인간의 영혼이 세 가지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성, 의지, 그리고 기억이다. 이 세 가지가 합하여 영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버나드는 이 세 기능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총체적으로 부패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받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가 순수성과 온전성에서 얼마나 부족한가를 확실히 인식한다. 이성이 판단에서 오류를 범하고, 의지가 혼란 속에서 동요되고, 기억이 지속적인 망각으로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전체적 타락은 인간에게서 찾아야지 인간 밖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의 이 세 가지 기능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인간에게는 고상한 부분이 남아 있기에 소망은 남아 있다고 버나드는 생각한다. 또한 버나드에게 인간의 육신을 부정적으로 다루는 부분을 종종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육신이라는 물질적 존재 자체의 악을 의미하는 헬라적 이원론과는 차이가 있다. 버나드는 "육신"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좋은 물질적 요소를 말하고, 또 하나는 인간의 타락한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육신과 영혼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비정상적으로 되어버린 육적 욕망을 의미한다. 버나드는 그의 인간론에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죄성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적 욕망의 악함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에게 참여하게 하신다. 인간이 이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자신이 처해 있는 문제에 대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인성
죄와 타락으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상태임을 버나드는 보여 주었다. 그 겸손과 소망은 인간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출발이다. 그러나 이 출발은 우리 자신의 조력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서 버나드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먼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와 계셔야 함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칭의와 성화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은 중세의 상황에서 이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버나드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친밀감을 가져다주는지 강조한다. 우리의 영성이 그의 인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교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는 것에 대하여 세 가지 내용을 설명한다. 첫째로 그 비움은 형식적이거나 제한된 비움이 아니었다. 심지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기까지의 비움이었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움이었다. 둘째로 그리스도 인성은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위한 근거를 제공했다. 그와 그의 백성 간의 사랑의 교제가 무엇이건 그의 성육신은 필수적인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땅에서의 체험은 신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세울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명상의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버나드는 신자에게 필요한 유일한 반응인 사랑과 열정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버나드의 인간론은 인간의 죄성과 부패, 그리고 타락을 말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깨지고 일그러진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문제와 한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나라에서나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게 했다. 죄와 불행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여 완전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이상을 추구하게 했다. 이것은 신비주의 명상 체험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신비주의 명상가들은 이 세상에서 명상을 통하여 바로 이것을 잠시나마 즐기고 누리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제5장 버나드의 구원론
버나드는 구원 메시지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접근한다. 버나드가 하나님의 살ㅇ과 자비를 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육신적" 사랑이다.
1. 육신적 사랑
버나드가 말하는 육신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속적으로 사용하는 세상적이고 인간의 욕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부정적 의미에서의 인간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버나드는 인간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가지고도 육신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신적 사랑은 먼저 접촉이 가능한 그리스도 인성의 육신적 사랑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그 후에 그리스도 인성의 육신적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그리스도 신성의 영적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 인성의 육신적 사랑은 그리스도 신성의 영적 사랑을 향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2. 네 단계의 사랑
그리스도 인성의 육신적 사랑에 끌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출발하는 인간의 육신적 사랑의 길을 버나드는 단계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이고, 둘째는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고, 넷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원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고 버나드는 가르친다. 버나드에 의하면 인간의 이기적 죄성에서 나오는 육신적 사랑으로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의 사랑, 이것은 아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역시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점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자주 찾아오는 부족함은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고 더 자주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형성된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맛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게 한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잘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의 사랑이라고 버나드는 가르친다. 네 번째 단계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도취되어 마음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깨진 접시처럼 되어 하나님에게 달려가서 부착하며 그분과 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버나드는 이것이 인생에서 드문 경험이라고 말한다. 결국 네 번째 단계의 사랑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합일하는 신비주의적 체험으로, 이 내용은 버나드의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3. 그리스도 중심성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단계를 구원론으로 보았을 때,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표현되지 않았다.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단순한 현상적 묘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버나드에게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취급된 것은 아니다. 버나드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의 변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역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나드의 생각 속에는 그리스도의 역할이 인간의 창조로부터 구원과 영화의 모든 단계에 주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구원론은 기독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버나드는 성부 하나님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께서 창조에 참여하셨을 뿐만이 아니고 창조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의 원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변화와 완성을 위하여도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버나드는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야 하며 그리스도와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영혼이 돌아가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와 주시기를 원할 수 있는가? 버나드는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주셨고 방문하신 결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먼저 심령에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 종교개혁 신학의 구원론과 동일한 가르침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 버나드는 이 접근을 우리가 그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다. 버나드는 여기서 사랑과 은혜를 통한 성부와 성자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오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나에게 접근하셨다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가? 버나드는 이 시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버나드는 사랑의 진보를 그리스도의 행적에 나타난 구원의 사건과 연결시켰다. 그리스도의 삶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의 육적 사랑이 영적 사랑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을 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버나드는 말한다. 버나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향한 헌신이 성령님의 선물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성령님의 선물이라도 버나드는 육신적 사랑의 헌신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는 기초단계의 이 육신적 사랑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육신적 사랑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사랑도 불가능하고 진정한 변화도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육신적 사랑이 이성적일 때에 더 발전하는 것이고, 영적일 때에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삶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을 육신적 사랑으로 접근하게 할 뿐만 아니고, 영적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단순히 그가 가진 윤리적 차원의 경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삶의 깊이를 깨닫고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육신적 사랑에서 영적 사랑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제6장 버나드의 명상적 신비 체험
버나드의 인간론,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의 모든 영역에서 신비주의 성향과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버나드의 인간론은 명상적 신비 체험의 근거를 마련한다. 버나드의 기독론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형상으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게 한다. 그리고 그분과의 애정적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처럼 되기 원하는 강렬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버나드의 구원론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종단계인 하나님과 하나 되는 단계를 소개했다. 이제 신비주의 체험 그 자체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점진적 상승
버나드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혼이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명확하게 앎으로 시작된다. 버나드에 의하면 죄에 떨어져 비참한 현재 상태의 모습이 비관과 무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바닥으로부터 위를 향하여 올라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버나드의 신비주의는 또한 상승의 단계성을 매우 중시한다. 버나드는 영적 추구에 있어서 높은 곳에 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서서히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각적이고 신속한 상승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더러운 자가 갑자기 거룩한 자의 입술을 만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분의 손이 그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야 함을 버나드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버나드가 말하는 점차적 상승의 필연성은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강렬한 사랑의 염원과 긴장 관계에 있다. 인간은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서서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최상의 목표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으로 그 목표를 더욱더 갈망하는 참기 어려운 격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버나드가 영혼 상승의 세 단계를 말할 때에 그것을 세 가지 키스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려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히며 하나님의 발에 키스할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갱신과 새 힘을 얻으려는 예배자의 정성어린 헌신은 하나님의 손에 키스하려 할 것이며, 명상의 즐거움은 황홀경에 이르는 안식으로 인도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이다."
2. 사랑
사랑은 버나드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사랑으로 이해되며 사랑으로 표현된다. 버나드는 그의 신비주의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외적 사랑과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사랑하는 애정적 사랑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 사랑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여정을 위한 버나드의 근본적 출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타락한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고 버나드는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사람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에게 순수하게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게 되었을 때에, 그 하나님은 서서히 그러나 점점 깊이 알게 되고 달콤하게 체험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사랑의 힘을 중시하는 버나드의 일관된 입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버나드를 "애정적" 신비주의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시에 버나드와 같은 애정적 신비주의자들도 지성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 하나님과의 합일
버나드는 신비주의 명상이 명상가를 지,정,의 모든 면에서 피조물로서의 본질적 겸손을 떠나 하나님 위치로 올려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명상은 겸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버나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나드가 생각하는 명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이 지적영역의 내용이 아니고 형언할 수 없는 지극히 정적 체험의 차원임을 인식해야 한다. 버나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합일이 이성적이거나 해설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버나드에게 명상이란 시각적 형태로 상징화되어 나타나는 하나님 현존 체험의 연속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환상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환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에게로의 사랑의 부착이고, 곧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이다. 아울러 버나드는 명상을 위한 준비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명상을 위한 거룩과 열정의 준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명상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버나드는 거듭 강조한다. 명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영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자체가 융합하여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버나드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하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과 본질이 연합되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어떻게 의지의 연합이 가능한가?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인간이다. 이것은 쉽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의지가 하나 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황홀한 영적 체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 황홀한 영적 체험이 곧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버나드는 또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과 고린도전서 6:17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인간이 영혼 간의 연합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합은 신적 본질이 합쳐짐으로 생기는 연합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영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지, 동일 본질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같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이 사랑의 끈으로 서로 안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확실하고 완전한 힘으로 한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연합은 본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의지의 동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버나드가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은 그 구체적 합일의 대상이 그리스도이시다. 합일을 통한 내적 환상에서, 버나드는 아무리 강렬한 사랑을 가진 자에게라도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이 지속적으로 체험되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그분은 붙잡히시지만 계속 잡혀 계신 분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시 우리의 손에서 떠나시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하나님을 이 세 상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둘째는 족장들 시대처럼 외적 형상과 언어를 통하여 알려지는 것이다. 셋째는 이것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찾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미스틱의 신비주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합일을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의 영은 육신의 방법을 따라가려는 어떤 욕망에도 이끌리지 않고 성령님으로 인도되어지는 그 영혼의 아름다움에 의하여 끌리신다. 특히 하나님은 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볼 때에 더욱 찾아오시는 것이다. 버나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그런 환상은 이 세상에서 없다고 말한다. 비록 잠시이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신랑의 모습을 포함한 이 도는 내면적 환상들은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버나드는 가르친다. 버나드는 이 세상에서의 신비적 연합이 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7장 버나드의 실천의식
중세 신비주의가 개신교에 의하여 비판을 받는 것 중 하나가 수도원 은둔생활의 전통에서 우러나온 세상과의 소극적이고 부정적 관계이다. 버나드는 명상가들이 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명상가들도 세상에 참여해야 하고 자신의 행실과 삶을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고 구체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홀로 명상에 잠겨서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어떤 원칙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삶 가운데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고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행동의 동기를 유발하고 그 행동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1. 질서
버나드는 명상과 행동과의 관계에 대한 원칙을 질서 개념에서 찾는다. 피조물은 이미 어떤 질서를 갖추고 있다. 질서가 부실한 부분이나 파괴된 질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보면 피조물은 질서의 필요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왜 피조물에 질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그 질서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인간의 의지는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질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에 질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고 버나드는 생각한다. 우리의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순결한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하나님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 버나드는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도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버나드는 사랑의 질서를 위한 기본 원칙을 말한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참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맹렬한 투쟁이 있는 곳에 신중이 가장 필요하다. 이것이 사랑의 질서이다." 신중을 없애면 덕이 악덕이 되고 자연적 감정이 자연을 혼란시키며 파괴하는 힘이 된다.나아가서 신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어떤 조화가 있을 수 없다고 버나드는 말한다. 어떻게 이러한 사랑의 질서를 인간의 심령 깊이 가질 수 있는가? 신중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버나드 신비주의의 핵심이 드러난다. 버나드는 명상가의 명상을 통하여 이것이 가능함을 말한다. 이 체험은 인간의 지, 정, 의에 총체적인 영향을 주며 사랑과 거룩한 욕망으로 가득 차고 다양한 감정들은 이것에 입각하여 질서가 잡히고 제자리를 찾게 된다.
2. 명상과 행동
버나드는 여기서 사랑이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감정이 삶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룬다. 버나드는 사랑은 행동과 감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감정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발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완성은 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모든 입을 닫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기 위함이다.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또한 버나드는 내면적 감정의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내면적 감정 없이 지키는 것이 큰 죄악이라고 강조한다. 버나드는 행동적이고 명상적인 사랑의 상호작용의 이론적 기초를 세 종류의 감정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육신이 낳은 감정, 이성이 지배하는 감정, 그리고 지혜로 길들여진 감정"이다. 버나드는 "지혜로 길들여진 감정"이 바로 신비적 명상을 체험한 자가 갖출 수 있는 감정이라 말한다. 지혜로 길들여진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순서적으로 정리한다. 이 방식의 사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거나 또는 맛을 보기 시작한다. 또한 이웃을 내 자신으로 알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으 ㄹ두 가지 방법으로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곧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버나드는 감정적 사랑과 행동적 사랑의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한다. 또한 사랑의 이 두 질서가 이 세상에서 공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명상가가 행동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3. 행동의 중요성
사랑의 계명을 이해하는 데 버나드는 또 다른 질서의 원칙을 말한다. 그것은 주입과 방출의 원칙이다. 주입은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고 방출은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즉 주입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고, 방출은 인간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버나드의 신비주의는 은둔과 명상에만 사로잡혀 있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수도원의 폐쇄성과 극심한 수동성을 잘 알고 있는 버나드는 명상과 행동에 균형적 양면성을 호소하고 있다. 명상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고, 행동으로 잘 이어지기 위해서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이 사랑에서 우러나온다면 명상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이 우러나오도록 해야할 것이고 사랑도 질서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랑의 가치가 있는 것만을 알고 사랑하며, 사랑의 가치가 있는 분량만큼만 사랑하고, 사랑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러한 질서 있는 사랑을 말한다.
◆제8장 버나드와 개신교 종교개혁
버나드의 내용을 평가해 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종교개혁의 시조인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의 버나드에 대한 평가를 보아야 한다.
1. 버나드와 마틴루터
마틴 루터는 중세신학을 거부하고 중세 수도원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중세의 그릇된 스콜라주의 신학과는 다른 어거스틴의 전통과 성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버나드에 대하여는 동일한 부정적 입장을 취할 수는 없었다.
1) 루터와 신비주의
루터는 중세 신비주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루터 자신이 중세 말 수도사이었고 그의 수도원 삶은 중세 수도원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했고 그 장점과 단점도 분명하게 알게 했다. 루터는 죄인이 죄를 벗고 하나님과 교제하여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글에는 신비주의자로의 적극적인 가르침을 볼 수는 없다. 루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그의 가르침에 이신칭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이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남겼으며 그가 그들을 많이 인용한 것에서 입증된다. 버나드에서 발견되는 경건한 영혼에의 호소는 루터에게 짙은 인상을 남겼고 로마서 강의에 버나드는 자주 소개되었다. 중세 신비주의 전통 중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독일 신비주의였다. 아울러 루터가 타울러와 "독일신학"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들의 스콜라주의 방법론 탈피, 개인 경건, 하나님 은혜의 수동적 수용, 자기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 등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의 인간 타락의 개념은 루터로 하여금 여러 신비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내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 루터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여러 신비주의자들과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터가 중세 말 신비주의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혹독한 비평과 비교해 볼 때에, 버나드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달랐다. 버나드의 신학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개념이 있었다.
2) 루터와 버나드
중세 중엽의 인물로 루터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사람은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 였다. 루터는 그의 글과 설교에서 버나드를 자주 언급했다. 어거스틴 다음에 루터는 버나드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루터가 버나드를 흠모한 것은 루터의 스콜라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의식 때문이었다. 비록 버나드가 수도원 영성을 가르치고 보급했지만, 루터에게 버나드는 수도원의 삶이 천국을 향한 공로적 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고 그야말로 천국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온전히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는 그의 인생 말기까지 버나드를 흠모했고 존경했다. 루터는 특히 버나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존하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버나드와 루터는 삶으로부터 사상의 의미를 찾아내는 행동가였다. 버나드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버나드와 루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로 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에 일치한다. 버나드와 루터는 인간이 의로워진 후에도 죄는 실질적으로 남아 있고 우리는 평생 동안 죄와 투쟁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세상에서 죄는 은혜와 공존하는 것임을 인식하며 버나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우리 모두가 육신, 세상, 그리고 마귀에 지속적으로 대항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3) 수도원주의
루터는 수도원적 신비주의의 잘못된 부분을 비판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활동과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누구도 외적 방법 없이 소위 일컫는 영적 사색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이다. 인간이 명상을 통하여 잠시라도 이 세상에서 완전을 경험해 보는 버나드식의 명상을 통한 궁극적 신비 체험은 루터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루터는 나름대로 올바른 수도원 명상을 제시했다. 제대로 명상을 하려면 외적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과 명상에 잠기고, 세례에 대하여 명상하고, 설교를 들으며 부모를 공경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은신처에 처박혀서 이런 헌신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고 그리스도, 말씀, 성례 등도 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그릇된 수도원 신비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수도원 영성인 묵상과 명상의 내용을 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성경구절을 묵상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고, 이것은 루터의 수도원적 명상의 흔적으로 그는 수도원 금욕주의는 탈피했지만 평생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명상에 잠기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실천에 옮겼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말씀을 배제하거나 피하면서 하나님과 합일하려는 신비주의를 심하게 비판하고 배척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버나드의 수도원적 신비주의 영성은 루터에게 긍정적이 대상이었다.
2. 버나드와 요한 칼빈
칼빈은 중세 교리와 신학에 해박했으나 루터처럼 중세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경력은 찾을 수 없다. 그는 철저한 인문주의 배경을 가진 자이었다. 그러나 이런 칼빈에게도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었다.
1) 인간적 유사성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버나드를 매우 선호했다. 무엇이 칼빈을 버나드에게 끌리게 했는가? 우선 버나드와 칼빈의 경력에 유사성이 있었으며, 칼빈은 버나드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버나드는 교회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칼빈은 버나드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 개혁의 의지를 중시했다.
2) 칼빈의 버나드에 대한 신학적 호감
칼빈이 버나드를 선호한 데는 이유가 있다. 버나드의 신학이 많은 중세 신학자들과는 달리 어거스틴에 매우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버나드의 글은 성경구절과 성경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버나드가 성경을 다루는 방법은 칼빈과 매우 달랐지만, 버나드가 성경에 깊이 들어가고 그것을 그의 글에 전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칼빈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3) 칼빈이 버나드를 인용한 역사적 배경
칼빈이 버나드를 사용한 근본적인 목적은 변증적이었다. 칼빈이 버나드를 변증적으로 사용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역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적인 것이다. 버나드는 그 당시 교회의 부패한 상황에 대한 증거였고, 또한 화체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었다. 버나드는 칼빈에게 교리적 권위로서 사용되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오류에 대항하여 칼빈의 가르침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버나드는 교회가 더 분명히 어거스틴주의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나아가서 수도원주의의 원칙들을 성직자들에게 적용하여 교회의 계급주의를 타파하려고 했다. 이러한 버나드의 모습은 칼빈에게 개혁교회와 초대교회와의 역사적 연계성으로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었다. 칼빈은 약간의 비평 후에는 대개가 버나드에 대하여 긍정적이었고 그의 비판은 조심스럽게 언급되었다. 칼빈에 의하여 버나드는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증인으로 비춰졌다.
4) 칼빈이 버나드를 인용한 분야
칼빈에 의하여 버나드가 인용된 내용에는 세 가지 분야가 있다. 그것은 죄와 은혜 교리(특히, 노예 의지), 공로의 거부와 하나님 앞에서의 신뢰와 확신의 중요성, 그리고 성직자와 교황청의 부패이었다. 또한 칼빈은 예정론, 죽은 자의 상태, 화체설과 관련하여 버나드를 언급했다. 칼빈은 버나드의 신비적 가르침에는 전혀 아무런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칼빈이 버나드를 인용한 것은 칼빈 자신의 관심과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고, 그 내용은 상당히 많은 분량이었다.
-자유의지
칼빈이 1539년 버나드를 처음 인용한 것은 자유 선택의 정의를 인용하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후 버나드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긍정적이 되었다. 칼빈은 한 편으로는 의지 자체와 다른 한 편으로는 선하거나 악한 의지 사이를 구별하는 버나드의 입장을 결국 따랐다. 칼빈이 의지의 윤리적 자유를 거부한 것은 어거스틴이나 버나드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그들의 차이는 강조와 용어상의 차이였던 것이다.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성의 교리였다. 타락한 인간은 비록 강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버나드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에 용어의 차이는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칭의
칼빈은 버나드가 공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버나드는 공로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고 공로로 말미암은 교만을 경계한 것이다. 칼빈은 공로와 보상의 상호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버나드는 공로사상을 수용했고 칼빈은 공로사상을 거부했다는 단순한 공식은 옳지 않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인간의 교만을 격려하는 공로 개념을 거부했다. 버나드가 칼빈의 칭의교리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그가 죄의 전가를 말할 때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는 개념은 중세 전통에도 존재한다.
5) 칼빈의 신비주의
루터는 비록 중세 수도원주의를 비판했지만 그것은 수도원주의의 모든 것보다는 그릇된 수도원주의를 비판했다. 칼빈도 당시 수도원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칼빈은 어거스틴이 실천한 온건한 수도원주의를 존중했다. 칼빈은 또한 당시 수도원주의의 문제점으로 분리주의를 지적했다. 그는, 수도원적 삶을 사는 것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며 모든 수도원들은 분리자들의 집회라고 혹평했다. 당시 수도사들은 완전의 상태에 있음을 주장하며 일반 성도들과 자신들을 구별했다. 그러나 칼빈은 수도원 제도가 완전을 향한 최선의 길이라는 수도원주의 입장을 냉소하며 그 무지를 비판했다.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개인적으로 중세 수도원 영성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도원 제도의 문제점을 발견한 칼빈의 수도원주의 비판은 혹독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런 맥락에서도 칼빈에게서 성 버나드의 수도원적 신비주의 영성에 대한 확실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칼빈이 중세 수도원주의를 비판했고 버나드의 수도원 영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도 신비주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의 신비주의는 수도원 영성을 통하여 타나난 것이 아니고, 그의 구원론 신학에 잘 표현되었다. 칼빈의 구원론은 버나드 영성의 중심 내용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고, 칼빈의 성화론도 성찬론을 통하여 역시 버나드 영성의 주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9장 버나드와 청교도주의
버나드 유형의 신비주의 모습은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에게서 나타난다. 우리는 칼빈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이 그들의 신비주의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을 초월하는 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가서 해석이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영해를 중세의 그릇된 성경해석법이라고 생각하여 아가서 해석을 거부했고 아가서에 대한 그의 신학적이나 해석학적 입장에 침묵했다. 그러나 영국 청교도들은 아가서를 버나드식으로 영해했다. 이런 청교도 신비주의를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은 리처드 십스이었다. 17세기 청교도 영적 대표주자인 리처드 십스에게 나타난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애정을 그 토대와 골조로 하고 있다. 이것이 청교도 신비주의이다.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정적인 교감과 사랑의 교제는 당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영국 청교도들에게 위로와 힘을 불러일으키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이러한 청교도 신비주의 영성은 교회 영성의 역사적 흐름으로 보았을 때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 유형의 신비주의에 속한다. 버나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애정적 교제 내용을 펼치기 위하여 아가서를 본문으로 삼고, 영적 해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또는 신자) 간의 애틋하고 정이 넘치는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단, 십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라는 두 개념을 분리하여, 칭의와 성화가 혼동되지 않게 하는 종교개혁의 개신교적 구원론을 명확히 했다.
◆제10장 결론
클레어보아의 성 버나드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성경적 복음 진리를 떠나 있던 중세 시대에 고대로부터 종교개혁 사이에 진리의 맥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종교개혁 때처럼 그의 가르침에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신칭의 개념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의 신비주의는 우리가 말하는 성화 영역에 속하는 활동이라 하겠다. 버나드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모습을 바라보며 그분과 하나되고 그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버나드의 구원론은 결국 수도사로서의 훈련과 명상을 통하여 얻어지는 신비 체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버나드의 신비주의는 은둔과 명상에만 사로잡혀 있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수도원의 폐쇄성과 극심한 수동성을 잘 알고 있는 버나드는 명상과 행동에 균형적 양면성을 호소하고 있다. 버나드의 신비주의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합일이다. 이 합일의 성격은 융합이라기보다는 강렬한 교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본질적 합일이 아니고 의지적 합일이다. 의지적 합일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혼합을 배제하고 오직 의지의 합일을 말하는 것으로 신비주의의 문제점인 인간의 신격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성경에 근거하여 정통신학을 수호하며 수도원 신비주의영성을 발전시키어 지, 정, 의를 풍부하게 갖춘 전인적인 그리스도인을 배출하려고 노력했다. 타락한 인간이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우리들은, 우리와 이미 하나 된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열정으로 그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원하는 열망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를 흠모하며,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잠기며, 이것이 힘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의롭고 거룩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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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