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하이퍼카 제조사 파가니가 와이라 R을 공개했다. 오직 트랙 주행만을 위해 태어난, 파가니 역사상 가장 강력한 모델이다. 동시에 와이라 라인업의 마지막을 알리는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성장해온 와이라를 돌아보기로 했다. 참고로 이몰라나 트리콜로레 등 생산 대수가 열 대 미만인 모델은 뺐다.
파가니 존다 F
파가니의 창립자 ‘호라치오 파가니(Horacio Pagani)’는 어릴 적부터 자동차 제작에 재능을 보였다. F2 포뮬러 경주차의 보디를 직접 만들어 전설적인 드라이버 ‘후안 마뉴엘 판지오(Juan Manuel Fangio)’의 눈에 띄기도 했다. 이후 람보르기니에 입사해 쿤타치 에볼루치오네를 개발했고, 이후 ‘가장 이상적인 수퍼카를 만들겠다’라는 목표와 함께 파가니 브랜드를 설립했다.
든든한 지원군도 있었다. 메르세데스 F1 팀에서 활약했던 판지오의 소개로 메르세데스-벤츠의 V12 AMG 엔진을 공급받기로 했다. 파워트레인을 해결한 파가니는 1999년, 첫 번째 모델 존다 C12를 출시했다. 이후 F와 친퀘(Cinque), 트리콜로레(Tricolore), R 등 수많은 가지치기 모델을 선보였다. 그리고 2017년, 호라치오 파가니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HP 바르케타를 마지막으로 단종을 맞았다.
1. 와이라(Hauyra, 2011)
후속작 와이라의 데뷔 무대는 2011 제네바 모터쇼였다. 이름 ‘Huayra’는 잉카어로 ‘바람’이라는 뜻. 바람에 깎인 듯한 차체 디자인 덕분에 존다보다 한층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다. 하지만 파워트레인 성능은 여전히 흉흉했다. AMG가 빚은 M158 V12 6.0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730마력, 최대토크 101.9㎏·m를 뿜어냈다.
커다란 뒷날개를 달았던 존다와 달리, 와이라는 색다른 방법으로 공기를 다스렸다. 앞머리와 꽁무니에 각각 두 개씩 자리한 에어로 플랩이 그 비밀이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이 플랩들은 스티어링 휠 각도에 반응한다. 코너링에 필요한 다운포스를 책임질뿐더러, 급제동 상황에서 에어 브레이크 역할도 맡는다.
몸무게는 존다보다 살짝 늘었다.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과 티타늄을 아낌없이 넣었지만, 각종 전자장비가 늘어난 탓이다. 그럼에도 공차중량은 단 1,350㎏. 현대 아반떼 N 라인보다도 20㎏ 가볍다. 브랜드 창립 전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을 제작할 장비부터 마련한 회사답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 이후 등장한 특별한 와이라들은 더 혹독한 다이어트를 거쳤다.
2. 와이라 BC(Hauyra BC, 2016)
2016년, 기본형 와이라를 모두 판매한 파가니는 스페셜 모델을 선보였다. 이름은 와이라 BC. 파가니의 첫 번째 고객인 사업가 ‘베니 카이올라(Benny Caiola)’의 약자다. 최고출력을 750마력으로 올리고, 공기역학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풍동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툭 튀어나온 프론트 스플리터와 큼직한 리어 윙이 새로 생겼다.
공차중량은 총 132㎏ 줄어든 1,218㎏. 차체 곳곳에서 무게를 덜어 지붕 빼고는 기존 와이라와 공유하는 외부 패널이 단 하나도 없다. 서스펜션은 항공기에 쓰는 고강도 경량 알루미늄 ‘HiForg’로 만들어 무게를 25% 줄였다. 전자식 디퍼렌셜 기어를 품은 변속기는 40% 더 가볍고, 타이어도 내부 구조를 바꿔 3% 감량했다. 와이라 BC는 단 20대만 한정 생산했다.
3. 와이라 로드스터(Hauyra Roadster, 2017)
이듬해에는 오픈톱 모델인 와이라 로드스터가 등장했다. 단순히 지붕만 걷어낸 모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최고출력이 763마력으로 오히려 와이라 BC보다 강력하다. 경량화 기술도 놀랍다. 통상 로드스터는 비틀림 강성을 챙기기 위해 보강재를 덧대 쿠페 모델보다 무겁다. 하지만 와이라 로드스터의 몸무게는 70㎏ 가벼운 1,280㎏에 그친다. 파가니가 직접 개발한 카보-티타늄 & 카보-트라이액스 HP52 모노코크 섀시 덕분이다.
4. 와이라 로드스터 BC(Hauyra Roadster BC, 2019)
2019년 8월, 와이라 로드스터 BC가 데뷔했다. 이제 최고출력은 802마력으로 성큼 뛰었다. 최대토크도 107.0㎏·m로 조금 올랐다. 공차중량은 1,217㎏. 한층 더 진화한 카보-티타늄 HP62 G2 & 카보-티타늄 HP62 모노코크 섀시를 밑바탕 삼았다. 출력이 오른 만큼 네 바퀴를 노면에 꽁꽁 묶어야 했다. 그래서 차체를 휘감는 공기를 다스려 시속 280㎞에서 500㎏의 다운포스를 만든다. 로드스터 버전은 전 세계 40대만 만들었다.
5. 와이라 R(Hauyra R, 2021)
최초의 와이라가 등장한지 10년 만에, 시리즈의 마지막을 알리는 와이라 R이 모습을 드러냈다. 핵심은 ‘트랙 전용’ 모델이라는 점. 일반 도로 주행을 위한 갖가지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파가니의 모든 기술력을 담아냈다. 가령, 터보차저를 덜어낸 V12 6.0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은 회전수를 9,000rpm까지 올릴 수 있다. 이때 배기음의 크기는 F1 레이스카에 가까울 정도. 단, 트랙 소음 제한 기준인 110㏈(데시벨)은 넘지 않는다.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각각 850마력과 76.5㎏·m다. 반면 몸무게는 1톤을 조금 넘는 1,050㎏이다. 기본형 와이라와 비교하면 무려 300㎏이나 가볍다. 섀시는 와이라 로드스터 BC와 같은데, 차체 뒷부분 프레임을 파워트레인과 엮어 굽힘 강성과 비틀림 강성을 각각 51%, 16%씩 높였다.
한편, 호라치오 파가니는 와이라 R을 공개하면서 “오늘날의 경주차는 주로 공기역학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1960~1970년대 경주차들은 굉장히 빠르면서도 위험했고, 동시에 아름다웠다. 특히 페라리 P4나 포드 GT40 등의 디자인은 오늘날 우리 차에 영감을 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과거의 경주차로부터 와이라 R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라고 전했다.
<제원표>